착한 사마리아인 이야기
누가복음에 한 율법교사와 예수님이 나눈 흥미로운 일화가 실려있다.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이야기가 오고 간 후 율법교사는 예수님께 묻는다.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예수님은 인류의 위대한 스승들이 그러하듯 비유와 질문으로 이에 답한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그를 때려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고 가 버렸다. 마침 어떤 사제가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레위인도 마찬가지로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그런데 여행을 하던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가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다르게 질문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우리는 율법교사나 예수님의 질문에 집중하지 말고, 표현되지 않은 착한 사마리아인의 질문에 집중해 보자. 강도에게 돈을 빼앗기고 두들겨 맞아 길가에 쓰러져 신음하던 낯선 사람을 돕기 전에 그는 어떤 질문을 했을까?
Q1: 이 사람을 돕는다면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Q2: 이 사람을 돕지 않는다면 ‘그에게’ 무슨일이 일어날 것인가?
사마리아인보다 먼저 지나친 사제나 레위인을 비난하기 위한 의도는 아니다. 먼저 그 길을 지나간 두 사람은 아마도 쓰러진 이를 보고 첫 번째 질문을 떠올리지 않았을까? 그들의 입장에서 변론해 보자면 무섭기도 하고 귀찮은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으리라.
다르게 질문하면 다른 답이 떠오르기 마련이다. 사마리아인의 자비로운 행위 이전에 그의 내면에 스치고 지나간 질문은 자신을 중심에 둔 질문이 아니라, 쓰러진 이의 입장에서 품은 질문이였을 것이다.
왜 우리는 착한 사마리아인처럼 질문하지 못할까?
우리는 학교에서 수많은 질문에 답하며 많은 시간을 보낸다. 예를 들어 이런 질문이다.
Q1: 철수에게 15개의 사과가 있었다. 영희가 다가와 4개의 사과를 먹었다. 남은 사과는 몇개일까?
정답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이 질문에 사로잡히는 순간 우리는 다르게 질문할 기회를 잃어버리게 된다. 이런 질문의 유형을 예를 들어 ‘철수질문’이라 부르자. 수학적이고 인지적 사고를 촉발시키기 위한 질문이지만, ‘만약(if)’ 우리가 다르게 질문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상상해보자.
Q2: 철수에게 15개의 사과가 있었다. 영희가 다가와 4개의 사과를 먹었다. 철수의 기분은 어땠을까?
질문의 차이가 느껴지는가? 인지적이며, 계산적인 훈련을 목적으로 하는 질문이 아니라, 만약 교사가 철수의 입장에서 공감하기 위한 질문을 던진다면 학생들은 어떻게 반응하리라 보는가?
만약 철수가 욕심쟁이였다면 기분은 어땠을까? 만약 철수가 영희를 짝사랑 했다면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 영희가 사과를 아무말 하지 않고 그냥 가져가 버렸다면 철수는 어떤 기분을 느꼈을까? 우리의 자녀가 자신의 감정을 소중이 여기며, 타인의 입장에서 공감할 수 있고, 이웃을 사랑하는 철수가 되길 바란다면, 가정과 학교에서 일상적으로 탐구하는 질문이 달라져야 한다.
질문은 공감능력을 끌어내는 열쇠가 될 수도 있다
질문은 사고를 돕기 위해서도 쓰일 수 있지만, 잠들어 있는 우리의 공감능력을 이끌어내는 열쇠가 될 수도 있다. 착한 사마리아인처럼 물어보자. 선택은 당신의 몫이다.
Q1: 만약 여러분이 자신의 입장에서만 질문한다면 우리의 삶은 어떻게 될까?
Q2: 만약 여러분이 타인의 입장에서 질문할 수 있게된다면 우리의 삶은 어떻게 달라질 수 있을까?
우리는 서로 맺어지기 위해 꼭 노력해야 한다. 들판 여기저기에서 타오르는 저 불빛들 중 몇몇과 소통하기 위해 애써야만 하는 것이다.
─ 생텍쥐페리, 『인간의 대지(1939)』
원문: 질문술사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