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유의 새 앨범 ‘chat-shire’를 둘러싼 몇 가지 논란들은 각기 다른 것들이어서 구분돼 다뤄져야 한다. 이를테면 “아이유가 작사한 곡 ‘제제’가 어린아이를 성적으로 대상화 했는지”에 대한 문제제기와 “아이유가 스스로 취해온 로리타 컨셉”에 대한 문제제기는 엄연히 다른데, 이 두 가지가 뒤섞이면서 “로리콤은 페도필리아와 다르다”는 식의 불필요하고 피로한 논쟁들을 낳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 먼저 가장 뜨거운 논란이 된 부분. 아이유가 작사한 곡 ‘제제’는 어린아이를 성적으로 대상화 했을까?
시작에 앞서 생각할 것들
가장 먼저 하고 싶은 얘기는, ‘제제’의 가사가 문제가 되는지에 대해 논하면서 ‘표현의 자유는 보장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표현의 자유’에 대한 중요성이 역설될 필요도 없다. ‘제제’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는 사람들이 전부 ‘표현의 자유’에 반대하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표현의 자유는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과 “자유에도 멈춰야 할 선은 있다”는 것. 우선 이 두 가지 명제에 대한 동의는 전제된 채 대화를 시작해야 한다. 아이유에 관련한 논란이 아니더라도, 예술과 창작의 영역에서 이 두 가지 명제 자체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과 어떤 유의미한 대화를 할 수 있겠는가. 두 개의 명제에 동의한다는 전제 하에, “그렇다면 ‘제제’의 가사는 선을 넘었는가 넘지 않았는가”가 이번 논란의 핵심이다.
우선 가사에서 제제를 ‘교활’하다고 표현한 부분이 문제가 될까? ‘제제’의 가사에서 가장 많이 지적된 건 이 부분이다. “넌 아주 순진해 그러나 분명 교활하지 어린아이처럼 투명한 듯해도 어딘가는 더러워”
소설 속의 제제는 또래에 비해 조숙하고 ‘작은 악마’로 불릴 만큼 매우 짓궂은 아이다. 그런 제제를 ‘마냥 순진하기만 한 것이 아닌 교활함도 있는 아이’라고, 독자로서 그렇게 느꼈을 수 있지 않을까. 그걸 두고 제제는 그런 아이가 아니라며 ‘어떤 아이’라는 하나의 해석을 정해둔 채 그 하나의 해석을 근거로 다른 해석을 내놓는 이를 손가락질하는 것은 황당한 일이다. ‘나의 제제’가 훼손됐다며 그걸 아이유 탓으로 돌리는 것도 마찬가지다. 제제를 긍정적으로만 바라보고 싶은 마음에 제제에 대한 그 어떤 부정적인 해석도 비난하고 나서는 태도는 ‘표현의 자유’를 이유로 들어 비판할 여지가 충분하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제제의 ‘성격’에 대해 부정적으로 묘사한 부분이 아니다. 가사를 더 들여다보자. “어서 나무에 올라와. 여기서 제일 어린잎을 가져가. 하나뿐인 꽃을 꺾어가” “발그레해진 저 두 뺨을 봐.”
‘나무에 올라’ ‘가장 어린잎’ ‘꽃을 꺾는다’는 등의 표현은 수많은 창작물에서 성적인 은유로 흔히 쓰이는 표현들이 아닌가. 성적인 표현을 사용할 의도가 전혀 없었으나 그저 우연히 그렇게 되었다고 말하기에는 “제제를 질투하는 모습에서 밍기뉴가 여자로 느껴졌다”는 아이유의 인터뷰와 앨범에 실린 삽화 사진 등이 그 같은 성적 은유를 뒷받침하는 걸로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이걸 두고 ‘포르노 적당히 보라’는 식으로 반응하는 것은 정말이지 끔찍하게 유치한 수준이다. 포르노를 단 한 편 본 일이 없는 사람도 ‘제제’라는 노래의 가사에 흐르는 성적인 은유는 눈치 챌 수 있다. 적어도 “혹시 이 표현들이 성적인 은유를 담고 있는 것일까” 의심해볼 여지는 충분하다.
만약 아이유가 공식 입장문에서 밝혔듯 “다섯 살 어린아이를 성적 대상화하려는 의도로 가사를 쓰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성적인 은유로 흔히 쓰이는 표현들을 굳이 걸러내지 않은 것에 대해서 작사가로서의 분명한 책임이 있다.
꺾지 말아야할 꽃도 있다
그렇다면 어린아이를 성적대상화 하는 것은 표현의 자유에 있어 ‘선’을 넘은 것인가.
그렇다. 제제가 실존인물이든 아니든 그건 중요치 않다. 제제가 소설 속에서 학대받은 아이였다는 사실 역시 중요하지 않다. 그게 누구든지간에 아주 어린 꼬마아이로 익히 알려져 있는 대상에게 ‘어서 나무에 올라타 꽃을 꺾으라’며 ‘Climb up me’를 반복하는 노래가 ‘선’을 넘은 것으로 판단 될 여지는 아주 많지 않은가.
제제와 밍기뉴를 남자와 여자의 구도로 설정하고 다분히 성적으로 해석될 여지가 많은 표현들을 담은 노래가 다수의 대중에게 불편함을 야기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어린아이를 성적대상화 하는 것에 대한 문제제기를 위해 ‘아동을 대상으로 한 성범죄의 증가를 야기할 것인지’를 반드시 밝혀내야 할 필요는 없다. 인과관계를 명확히 밝혀낼 방법도 없거니와, 다수의 윤리적인 문제는 그 자체로 문제가 되는 것이지 꼭 그것이 극단적인 나쁜 결과로 이어지기 때문에 문제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상당히 ‘이유 있는’ 대중의 문제제기를 두고 ‘표현의 자유를 모르고 시대를 역행하는 사람들’ 혹은 ‘아이유를 마녀사냥하려는 미개한 사람들’에 의한 것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많다는 것은 참 의아한 일이다.
‘제제’의 가사가 문제될 것이 없다고 말하는 이들은 “제제의 가사를 아이에 대한 성적 대상화로 볼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인지 “제제를 성적으로 대상화한들 그것도 표현의 자유”라고 주장하는 것인지 궁금하다. 표현의 자유가 어디까지 허용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는 – 명확한 답이 없는 문제이기에 더더욱 – 굉장히 유의미한 것이기 때문이다.
제제의 가사가 문제될 것이 없다고 주장하는 많은 사람들의 글을 읽어 보았으나 출판사 ‘동녘’에 대한 비난, ‘나의 제제가 훼손됐으니 책임지라’는 엉뚱한 주장을 펼치는 사람들에 대한 비난, 아이유를 소아성애자로 모는 비상식적인 사람들에 대한 비난이 대다수여서 안타까웠다.
그런 이들을 향한 비난에도 충분한 이유는 있다. 그러나 ‘표현의 자유가 허용되어야 한다는 점에는 동의하지만 아동을 대상으로 한 성적대상화에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합리적인 문제 제기에 걸맞는 합리적인 반박의 목소리는 될 수 없다. 나열된 이들에 대한 비난은 결국 ‘표현의 자유의 중요성’이라는 1차원적 관점에 머물고 있는 것일 뿐 ‘표현의 자유가 어디까지 허용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유의미한 논의로 이어지지 못한다.
냉장고에 하나 남은 달걀
창작에 있어 넘지 말아야 하는 선. 이른바 ‘터부’로 여겨지는 것들은 결국 상대적인 기준에 의한 것이다. ‘절대’ 안되는 건 없다. 터부를 다뤘다고 해서 표현의 자유가 강제적으로 제한될 수 없으며, 그 같은 주장은 앞서 밝힌 ‘표현의 자유는 보장되어야 한다’는 전제에 어긋나므로 논외로 해도 좋다.
터부라는 건 마치 냉장고에 하나 남은 달걀이랄까. 이걸 깨려거든 책임지고 후라이를 하든 지단을 부치든 해야지 마룻바닥에 던져 깨놓는 것까지 칭찬해줄 순 없는 노릇이다.
터부가 깨질 때 예술이 발전한다는 주장은 일견 타당하다. 그런데 비판의 목소리를 모조리 틀어막으며 깨어지는 터부에 대체 어떤 의미가 있나. 터부가 깨질 때 예술이 발전하는 것이 아니다. 터부를 깬 창작이 공감을 얻을 때 비로소 예술의 영역이 확장된다. 불편한 작품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을 ‘한 여가수를 마녀사냥 하고 있다’고 몰아가는 사람들. 둘 중 ‘마녀사냥’을 닮아있는 건 어느 쪽인가.
비판을 제기하는 다수의 대중을 ‘표현의 자유를 모르는 미개한 우중’으로 취급하는 사람들은 ‘표현의 자유’보다 더 기본적인 ‘자유와 방종의 차이’에 대한 인식부터 놓치고 있는 건 아닐지.
원문: 정소담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