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경제원처럼 인간에 관한 성찰도 없이 교육을 말하면 위험해진다
나는 진보도 보수도 아니다. 우리 사회를 위해 진정으로 옳은 것, 선한 것, 아름다운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기 때문에 어떤 사안에서는 진보적이지만, 어떤 사안에 대해서는 보수적이다. 어느 편이냐고 물으면, 나는 진보와 보수의 어느 한 편에 서있지도 않다. 그렇다고 중도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도 아니다. 그럼 너는 뭐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냥 나다. 진보와 보수라는 이분법으로 나를 색깔 지울 수 없다.
최근에 자유경제원이라는 게 특별히 언론의 주목을 받는 바람에 잠시 들여다 봤다. 자유경제원이라는 기관이 아주 단순하게 생각하는, 좀 어딘가 부족한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인상을 예전부터 받고 있었는데, 이번에 확실하게 그렇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유경제원의 원장인 현진권이라는 남자는, 2015년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앵거스 디턴(Angus Deaton, 1945~) 교수의 경제이론을 완전히 왜곡해서 자기 신념대로 해석해 버렸다. 실수를 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고 의도적으로 왜곡한 것이 분명해 보인다. 공산주의나 자본주의와 같은 인간에 대한 성찰이 부족한 이념이 극단화하면 인간을 자원으로 본다. 또한 합리성을 결여한 어떤 신념에 경도되는 경우 사태의 진실을 왜곡할 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 정신적으로 폭력을 가하게 된다. 이번에 디턴 교수의 <위대한 탈출>의 번역 과정에서 그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이번에는 자유경제원의 전희경이라는 여자가 나타나서 국사교과서의 국정화에 대해 그럴듯한 얘기를 쏟아내고 있다. 아주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자유경제원이 어떤 수준인지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 여자는 인간에 대한 성찰이 없었던 군국주의 시대에나 통할 것 같은 도구주의적 인간관에 머물러 있는 것으로 보인다. 21세기에 살아가는 오늘의 지성으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수준이다. 무식한 전사형 인간이라고나 할까. 무식하면 용감한 법이다. 이런 발언을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끼리끼리 놀고 있다고 밖에…
자유경제원 사무총장이라는 여자가 국사교과서의 국정화에 대해 새누리당 의원들에게 연설하고 있다. 이런 수준의 강연이 왜 문제인지 간단히 생각해보자.
1. 건국일을 기념하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가?
이 동영상을 보면 국사교과서에 건국일이 없어 문제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국사교과서를 국정화해야 한단다. 정말 그런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건국에 대하여 <한국민속대백과사전>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네이버에 검색하면 가장 먼저 나온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9년 4월 13일 3·1 운동 정신을 계승해 일제에 빼앗긴 국권을 되찾고 나라의 자주독립을 이루고자 중국 상하이(上海) 하비로 프랑스 조계 내에서 이동녕(李東寧), 김구(金九)를 포함한 40여 명의 임시정부 요인들에 의해 수립 선포된 이후 1945년 11월 김구 등이 환국할 때까지 국내외 독립운동의 구심점이 되었던 3권 분립의 민주공화제 정부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일에 대해서는 4월 11일이라는 견해도 있다. 임시정부의 설립 주체였던 임시의정원(의장 이동녕)이 1919년 4월 10일 밤 10시에 개원, 국무총리 및 6개 부서의 총장과 차장을 선출한 후 조소앙(趙素昻), 신익희(申翼熙)가 초안한 헌법을 축조 심의하여 10개조로 된 임시헌장을 철야 심의한 후 4월 11일 오전 신석우(申錫雨)의 제청으로 ‘대한민국’이라는 국호(國號)와 국무총리를 수반으로 하는 절충식 내각제인 국무원 체제의 헌장(헌법)을 제정했다. 따라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일은 4월 11일이며, 4월 13일은 임시정부가 수립된 사실을 대외적으로 선포해 정식으로 국가 탄생을 공포한 날이라는 것이다.
사실 이런 역사적 설명보다 더 중요한 것은, 현재 우리에게 구속력을 가지고 있는 1987년 헌법이 어떻게 기록하느냐가 중요하다. 우리 헌법 전문에는 아주 명백하게 기록하고 있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 국민은 3·1 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
해방 후 1948년 7월에 공표된 제헌 헌법의 전문에도 다음과 같이 명백하게 되어 있다. 헷갈릴 수가 없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 국민은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 독립국가를 재건함에 있어서…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를 가진 국가를 운영하기 위해 정부를 수립했고, 한반도 전체가 일본의 통치하에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상하이에다 임시로 정부를 세웠을 뿐이다. 1919년 삼일운동에 의해 근대적인 공화국이 이미 건립되었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근대적인 국가가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로 이미 건립되었다는 것을 제헌 헌법에서부터 줄기차게 기록하고 있다.
2015년 8월 15일 박근혜 대통령이 광복절 경축사에서 했던 “오늘은 광복 70주년이자 건국 67주년”이라는 말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광복 70주년은 맞지만, 어떤 의도로 건국 67주년이라는 말을 했는지 모르겠다. 박근혜 대통령은, 제헌 헌법에서부터 끊임없이 국민에게 가르치고 있는 국가 건립의 시점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역사인식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매우 심대하고도 위험한 오류라고 할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후 독일은 연합국이라고는 하지만 사실상 미국의 군사정권하에서 4년간이나 통치를 받았다. 민간인이 정부를 이양받은 것은 1949년이었다. 서독인들은 1949년 5월에 가서야 사실상의 헌법을 만들어 공포하면서 헌법(Verfassung)이라고 하지 않고 기초법(Grundgesetz)이라는 용어를 썼다. 독일 민족이 온전히 통일된 상태가 아니라서 서독은 임시헌법을 만들었던 것이다. 독일 민족이 온전히 통일된 후에 온전한 헌법을 만들어 시행하려고 했다. 서독은 이렇게 동독과의 통합을 생각하면서 준비해왔다. 나는 독일에 살면서 건국절과 같은 날짜나 건국을 기념하는 행사를 경험한 기억이 없다. 일반적으로 보자면, 건국절 같은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유럽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정말 중요하게 생각하는 기념일은 크리스마스와 부활절 정도다.
건국절 같은 날을 기념하고 싶으면 정치인들이 합의하여 날짜를 정하면 되는 것이다. 건국일을 기념하느냐 마느냐가 국사교과서의 국정화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말이다. 그러나 1919년 4월 13일을 건국일로 기념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한반도가 통일된 상태로 나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민족과 국토가 양분된 상태에 있다. 남한은 아직 북한지역과 통합된 온전한 상태를 확립하지 못한 채 아직까지 임시상태가 계속되고 있는 셈이다.
지금 박근혜, 황교안, 황우여, 김정배 등이 주장하는 것처럼 북한이 1948년 9월 9일을 자신들의 건국일로 삼고 있는 상황에서 남한이 1948년 8월 15일을 건국일로 정한다고 치자. 1948년에 남한과 북한이 동시에 건국을 했으니 두 나라가 공존하는 모양새가 된다. 이렇게 되면 서독과 동독의 관계가 아니라, 북한은 완전히 다른 나라가 되는 것이다.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완전히 다른 나라가 된 것처럼 말이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황제 치하에서는 거의 천년 이상 신성로마제국이라는 하나의 공동체로 묶여온 나라들이었다. 프로이센의 독일 통일과정에서 오스트리아 제국과 전쟁을 치렀다고 해서 완전히 남남으로 찢어지고 말았다. 둘 다 독일어를 쓰면서 거의 같은 민족이었는데도 말이다.
1948년 8월 15일을 남한의 건국일로 정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정녕 남북한이 독일과 오스트리아처럼 갈라서기를 바라는 것인가?
북한이 자신들의 건국일을 1948년 9월 9일로 정한 것은 남한의 1919년 4월 13일에 비해 한참이나 뒤늦은 일이다. 그러므로 김일성이 건국했다는 북한(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은 역사적이고도 법률적인 정통성이라는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독립운동가들에 의해 건립된 국가와 연계되어 있지 않다는 측면에서 보면 분명히 잘못된 것이고 사이비 정권임이 분명하다. 그러니 북한의 1948년을 건국의 해라고 주장하고 9월 9일을 건국절이라고 기념해도 남과 북이 재통일이 되면 그런 주장은 자연 소멸될 것이다.
박근혜, 황교안, 황우여, 김정배 등의 속셈은 무엇인가?
사실 이 사람들이 역사교과서를 국정화하려는 속셈은 뻔하다.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을 축소하거나 왜곡하여 자신들의 친일매국행위를 숨기면서 독재자 이승만을 국부로 삼고, 민주시민의 목숨을 건 항쟁을 통해 이룩한 민주화의 노정을 축소하거나 왜곡하면서 독재자 박정희를 산업화와 경제부흥의 아버지로 추앙하는 역사를 만들고 싶은 것이다.
2. 인간은 과연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 또는 도구인가?
새누리당 의원들에게 했다는 위 강연을 듣고 있으면, 아주 위험한 수준을 넘어 무섭기까지 하다. 인간을 국가발전의 도구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나치시대의 군국주의적 발상과 맥을 같이 한다.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발상이다. 적어도 나의 인간관과 교육관에 의하면 그렇다. 인간은 존재하기 위해 존재하는 존재다. 그러므로 인간에게만 실존하는 존재라고 말한다. 그런 인간의 존재 유지를 위해 국가의 존재가 필요한 것이다. 국가를 위해 인간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과거의 역사가 어찌 되었든, 긍정적 역사관과 경제발전의 기적적인 역사를 가르쳐서 세계 시장에 나가 싸울 수 있는 강인한 인재를 길러야 한다는 논리가 강연의 주된 메시지처럼 보인다. 이런 주장은 군국주의적 교육관에 의거하면 당연하게 여겨질 것이다. 이런 강연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은, 인간을 존재 그 자체를 위한 존재가 아니라, 국가나 이념을 위해 동원되어야 할 자원이나 수단으로 간주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교육이란 인간을 인간답게 성장하도록 돕는 행위다. 교과서는 그것을 지향해야 한다. 인간이 인간답다는 것은 무엇인가? 어떤 아이는 음악을 좋아하고 다른 아이는 그림을 잘 그린다. 어떤 아이는 수학을 좋아하지만 어떤 아이는 이야기 만들어내는 것을 잘 한다. 어떤 아이는 운장장에 놀기 좋아하고 어떤 아이는 책 보는 것을 좋아한다.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각자 자신의 재능을 맘껏 발현하는 상태가 가장 인간다울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누구나 자신이 어떤 재능을 타고 났는지 알고 그에 따라 교육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 기성세대는 그런 교육환경을 만들어오지 않았다. 오로지 수능시험 성적으로 인생이 결정되는 모순적인 사회를 만들어 온 것이다. 학생들을 경쟁환경으로 몰아넣어서 경쟁에서 낙오하는 학생들에겐 국물도 없는 사회를 만들어 온 것이다.
현실사회가 이렇게 되도록 만든 결정적인 정신이 있다. 바로 군국주의적이고도 도구주의적인 교육관이다. 인간을 존재 자체를 위한 존재로 간주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어떤 특정한 이념이나 집단이 요구하는 목적을 위한 도구나 수단으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그 목적에 부합하도록 길러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유경제원이 바로 그런 곳이다. 그들이 주장하는 목적이 곧 경제성장이다. 경제성장을 위해, 그것도 대기업집단의 성장을 위해 인간이 수단으로써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인간을 기르는데 검정제 하에서의 다양한 국사교과서는 그들에게 매우 거추장스러울 뿐이다.
이제 겨우 민주화된 정부가 인간의 실존적 가치를 위해 조금씩 바꾸어가던 제도적 장치들이 이명박, 박근혜 정부에서 군국주의적인 시대로 회귀하는 것이 분명하다. 자유경제원과 같이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성찰조차 할 수 없는, 매우 수준 낮은 집단들이 그동안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정부의 이데올로기를 제공해왔다.
3. 자유민주주의라는 말에 대하여
하나 더. ‘자유’민주주의라는 용어를 쓰는 사람들은 민주주의에 대한 개념이 부족한 것으로 보인다. 위 동영상에서 끊임없이 ‘자유’민주주의를 외치고 있는데, ‘자유’민주주의라는 말은 근본이 없는 말이다. 민주주의는 기본적으로 자유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라는 말로 충분하다. 거기에다 ‘자유’를 추가로 붙이는 이유는 아마도 자신들이 자유를 억압하거나 군국주의적인 행태를 숨기고 싶어서 자유라는 단어를 민주주의에다 덧붙인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민주당이면 충분한데 거기다 정의를 덧붙여서 민주정의당을 만드는 것과 비슷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겠다. 가장 정의롭지 못한 사람들의 정당이었던 것을 우리가 잘 알고 있다. 서양 언어로 말하자면 자유민주주의라는 말은 없다. 민주주의라는 말로 자유를 충분히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4. 부유한 나라에서는 어떻게 교육하는지 살펴볼 일이다
이 지구상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들은 북유럽에 있다. 우리는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의 사회운영모델을 스칸디나비아 모델이라고 부른다. 그다음에 잘 사는 유럽 나라들은 스위스를 위시한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독일 등이다. 우리는 이런 나라들의 국가운영모델을 게르만 모델이라고 부른다. 나라마다 약간씩 차이가 있지만 이들은 인간에 대한 뚜렷한 관점을 가지고 있다. 인간존중의 사상이다. 이들은 인간을 어떤 존재로 생각하며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지 살펴보라. 인간에 대한 정신적 토대(mental model)가 무엇인지 배울 필요가 있다. 이런 정신적 토대 위에서 역사를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지 살펴보라.
원문: 최동석의 brun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