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겨울 개봉한 영화 ‘변호인’이 천만 관객을 돌파한 건 하나의 사건이었다. 송강호란 배우의 이름값이 있다지만, 이 영화는 정치적으로 민감한 영화였다. 이 영화는 전두환 정권에서 일어난 대표적인 용공조작 사건 ‘부림사건’을 소재로 각색한 영화다. 그리고 이 사건의 변호인 중 한 명이 바로 노무현이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 2항,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국가란 국민입니다!”
‘변호인’ 속 송우석 변호사(송강호 분)의 일갈이다. 그는 실존인물 노무현을 모티브로 만든 가상 인물이다.
그의 외침은 공허했다. 주권은 군부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청와대로부터 나오던 시절이다. 국가란 박정희이며 전두환이었던 시대다. 그래서 그는 패배한다. 진실 또한 패배한다.
81년, 검찰은 부산 지역에서 사회과학 독서모임을 갖던 학생, 교사, 회사원 등을 불법적으로 체포, 감금한다. 이 모임이 반국가단체를 찬양하고 사회 불안을 야기하였다는 죄목이었다. 검찰은 짧게는 20일, 길게는 63일 동안 구타, 물고문, 통닭고문 등을 자행하여 사건을 조작했다.
영화가 흥행하자, 부림사건 당시 담당검사였던 고영주는 조선일보의 온라인 매거진 조선Pub와 인터뷰를 갖고 영화 ‘변호인’의 왜곡이 심각하다고 강변했다. 당시 고문을 했다는 증거가 없으며, 부림사건 관련자들은 실제 종북 세력의 뿌리라는 것이다. 물론 그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는 없다. 그는 나아가 노무현이 인권이 아니라 공산주의를 변호한 것이라 궤변을 쏟아내기도 했다.
조선Pub는 고영주의 편을 들어, “(부산지법이) 사건의 핵심인 국가보안법 위반에 대해서는 유죄판단을 유지”하고 있다고 기술한다. 그러나 이는 당시 대법원이 아직 국가보안법 부분에 대해 파기를 하지 않아, 법적 절차상 부산지법이 이에 대한 판단을 내릴 수 없었기 때문일 따름이다. 사실 법원 판결이 없었을 뿐 사건의 실체가 거의 드러난 상황이었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맥락 왜곡이며, 언론으로서는 자격 미달이라 할 만하다. 인터뷰로부터 8개월 후인 2014년 9월, 대법원은 재심을 통해 부림사건 피해자들에게 국가보안법 무죄를 비롯한 최종적인 무죄 판결을 내렸다.
고영주와 조선일보는 그야말로 구체제, 공안, 사법의 탈을 쓴 살인과 폭력, 그 야만의 변호인들이었던 셈이다.
야만의 아들이 돌아왔소
그런데 2015년, 그 고영주의 이름이 다시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2015년 8월 그가 방송문화진흥회(방문진) 이사장에 오르면서다. 방문진은 MBC 대주주이자 이를 관리감독하는 기관으로, 바로 그 MBC의 사장 임명권을 갖는 등 권한이 막강하다.
고영주는 이사장으로 선출된 뒤 열린 국감에서부터 망언을 쏟아냈다. 부림사건에 무죄 판결을 내린 사법부가 좌편향 사법부라고 주장하고, 역사학자들의 90%가 대한민국을 공산주의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등 자극적인 발언을 이어갔다. 또 문재인이 공산주의자라 확신하고 있다는 자신의 발언을 재확인하기도 했다.
과거 용공조작 사건의 책임자였으며 그 과거를 전혀 반성하지 않는 이런 인물이 어떻게 공영방송 MBC를 책임지는 이사회의 장이 될 수 있는가? 애당초 방문진 이사회 자체가 여당이 6명을 추천하고 야당이 3명을 추천하는 편향된 구조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야당측 인사들이 반발하여 모두 퇴장하는 사태가 일어나더라도 여당측 인사들이 밀어붙이면 그만이다. 그렇게 선출된 이사장이 고영주다.
근본적으로는 김대중, 노무현 정부 때부터 이명박, 박근혜 정부에 이르기까지, 보혁을 막론하고 이어져온 이 편향된 구조를 고쳐야 할 것이다. 다른 분야라면 몰라도 방송 및 언론 분야는 최대한 중립을 추구해야 하는 분야다.
그러나 고영주 수준의 인물이 임명되는 건 문제가 조금 다르다. 고영주는 편파적인 발언만 쏟아낸 게 아니다. 그는 국감에서 전파료 배분제, KBS와 EBS의 의무재전송 문제, IPTV의 지상파 컨텐츠 제공 등 현안에 대해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꼭 편향된 구조가 아니더라도, 최소한의 전문성과 넓은 식견, 양심을 가진 인사가 추천된다면 이런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임명권자가 최소한의 상식이 있는 인물이라면 이런 사람을 올리는 건 불가능하다. 여권은 지금 전문성도 없고, 식견도 없으며, 양심도 없는 인사를 추천하고 있다.
그리고 그 정점에 있는 인물이, 바로 박근혜다.
박근혜
고영주만 이런 논란에 시달리는 게 아니다. KBS 이인호 이사장은 조부의 친일 행각과 더불어 “그런 식으로 친일을 단죄하면 일제시대 중산층은 다 친일파”라는 본인의 발언으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방송 심의를 담당하는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위원장에 뉴라이트 운동가 박효종을 임명한 것 또한 전문성을 무시한 이념 위주의 인사였다. 총리 황교안은 공안 검사 출신이다.
언로(言路)는 더욱 참담하다. 2012년, 대선에서 승리한 박근혜는 인수위 수석대변인으로 윤창중을 임명했다. 그리고 뒤이어 그를 청와대 대변인으로까지 임명했다.
사실 박근혜의 인사는 참사 수준이다. 초대 내각부터 김대중이나 노무현 정부 때를 잣대로 삼는다면 모두 낙마해야 마땅할 정도로 부실했다. 하지만 윤창중은 개중에서도 화룡점정이었다. 그는 뉴데일리에 대통령 문재인 시대가 오면 종북좌파세력이 총궐기할 것이라거나, 폴리페서들이 문재인에게 90도 인사하며 타락하고 있다는 등 노골적으로 편향적이며 선정적인 칼럼을 기고해왔다.
뉴데일리와 마찬가지로 극우 매체로 분류되는 데일리안, 미디어펜 등의 운영진을 청와대로 불러들인 것도 박근혜다. 출범했을 때만 해도 언론이라 부르기조차 낯뜨겁다 여겨졌던 이 매체들이 박근혜의 세계관에서는 주류 언론인 셈이다.
박근혜가 권좌에 앉아있긴 하지만, 만사를 직접 주관할 수는 없다. 한 사람의 통치자가 세상을 뒤집어놓을 수도 없다. 그러나 그 강력한 권한인 인사권을 이토록 엉터리로 휘두른다면 조금 얘기가 다르다.
보수인가, 극우인가
박근혜를 위시한 여권은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역사를 계속해서 강조한다. 자랑스러운 역사를 가르쳐야 한다며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밀어붙일 정도로 말이다.
그러나 박근혜 정권 출범 이래 정말 우리에게 부족한 것이 자랑스러움이었던가? 고영주는 실로 상징적인 인물이다. 그 시대에는 공안검사가 필요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국민에게 주권이 있다는 헌법을 걸어놓고는, 이를 짓밟고, 고문을 자행하며 사건을 조작하던 그 순간을 감히 자랑스럽다 말할 수는 없다.
많은 것을 요하는 것이 아니다. 네 역사관이 그릇되었으니 내 것으로 바꾸자는 요구가 아니다. 그야말로 최소한의 부끄러움이다. 피해자 앞에서 고개를 숙이는, 적어도 감히 자신이 정의라 강변하지는 않는, 그런 최소한의 부끄러움 말이다. 광주의 5월, 제주의 4월까지 바로 볼 것을 차마 기대하지 못할지라도 말이다.
그러나 모르겠다. 박근혜부터 그렇다. 유신을 두고 불만이 있으면 그때 말해야지, 부귀영화는 다 누려놓고 이제와서 그러느냐 따진다. 사법 살인 사건을 두고 두 개의 판결이 있다며 자신에 대한 정치 공세라고 강변한다. 그게 박근혜다. 이토록 자기중심적일 수가 없다.
그리고 그 아래에선, 21세기 공중파 방송의 수장에 용공 조작 시대 인사가 앉아 부끄럼없이 피해자들을 힐난한다. 극우파의 주장을 날것으로 실어나르는 언론 같지 않은 언론들이 청와대에 입성한다. 그 어두운 야만의 역사를 열었던 자들이 자랑스러워야 마땅할 대한민국을 다시 지배하려 한다.
왜 보수는 역사 앞에 부끄러움을 잃었는가. 이미 지도자부터 제 일신의 양심마저 잃은 탓이다. 과거의 죄인들과 야만스런 망령들이 그 자신의 죄마저 부정하고 있는 탓이다. 자기 양심조차 닦지 못하는 이들에게 역사를 직시하길 기대할 순 없는 법이다.
그럼 왜 그것이 우리의 몫이 되어야 하는가. 왜 우리가 부끄러워해야 하는가. 그래도 누군가는 대화해야 하기 때문이다. 과거의 야만에 비추어 현재의 야만을 직시할 누군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현재의 야만에 비추어 과거의 야만을 반성할 누군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부끄러워할 줄 앎으로써 비로소 나를 진정 자랑스러워할 수 있다. 그렇게 나를 자랑스러워함으로써 곧 우리를 자랑스러워할 수 있다. 그럼으로써 그네들이 그렇게도 원하는 것처럼, 이 국가를 자랑스러워할 수 있다. 국가란 곧 국민이라 하지 않았던가? 영화 속의 누가 토해냈듯이, 적어도 정의롭고 자유로운 대한민국은 그래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