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브라질 상파울루의 빈민가를 무대로 한 소설 <나의 라임오렌지나무>는 우리나라에서 유독 인기가 많다고 한다. 전 세계 21개국에 번역된 명작이니, 보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제제를 바라보는 관점이 달랐다고 해야 한다.
유럽과 미국의 독자들은 제제가 당하는 폭력 묘사를 보며 ‘아동학대’라고 눈살을 찌푸리거나 불만을 제기했다면, 한국의 많은 독자들은 “이것은 내 얘기”라며 펑펑 울었다. 급작스럽게 형성된 대도시 빈민가의 분위기와, 부모가 자식을 죽도록 두들겨 패는, 그러고도 아무렇지도 않고 또 아이는 아이대로 일상을 이어나가는 가정문화가 전혀 이질적이지 않았던 모양이다. 어릴 적 가까운 누군가가 이 동화를 유독 좋아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약간 마음아픈 일이다. 내 또래만 하더라도 70년대 태어난 선배들보다 이 동화를 덜 좋아하는 것 같다.
이런 제제를 성적인 코드로 “잘못 해석했다”며 출판사 동녘이 아이유에게 항의하는 입장을 밝혔다. 영상·예술 표현에 대한 항의치고 지금까지 나온 것 중에서, 비교적 나은 반응이라고 생각하나 나는 톤이 더 차분했으면 한다. 예술에서 재해석의 방향은 항상 열려있고 ‘옳다/그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영역은 아니다. 더구나 아이유는 <나의 라임오렌지나무>에서 사실상 제제라는 캐릭터만 빌려온 것으로 수많은 문화콘텐츠의 2차 창작에 흔히 있는 일이다.
그저 <나의 라임오렌지나무>를 아는 입장에서 이번 재해석은 쉽사리 공감 받거나, 예술적 깊이를 느끼기 어려울 뿐이다. 수많은 재해석의 가능성 중에서 하필 순진하면서도 교활한, ‘섹시한 제제’라니. 얼마나 재미없고 쉬운 해석인가. 흔히 소녀가 대상이 되는 걸 소년으로 바꿨다 한들 일본에서 ‘쇼타’란 말이 나온 게 20년도 넘었다. 창의력과 상상력의 빈곤일 뿐이다.
안타까운 건, 동시대 또래 음악인들과 견줬을 때 수준 높은 가사와 곡을 뽑아내던 아이유가 이런 빈곤함을 보여줬다는 것이다. 아이유의 문제가 아니라 생산자와 소비자가 처해 있는 전반적 상황의 문제다. 독서경험이 풍부한 사회라면 상업적 이유에서라도 애초에 이런 가사가 안 나갔을 테니까. 나는 개개인들의 합의를 넘어서는 ‘도리’라는 것이 있다고 믿기에, 차라리 유자(儒者)에 가까웠으면 가까웠지 한 번도 자유주의자인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자유주의자를 정체성으로 삼을 생각이 없다.
그런 관점에서 제제가 교활하거나 말거나 문제가 안 되지만, 5살 아이를 성적으로 코드화하는 것은 환영하긴 어려운 일이다. 더구나 제3세계 빈곤과 폭력을 상징하던 아이를 성애화하는 것은 조금 더 두터운 뻔뻔함이나 무지를 필요로 한다. 아이유 또래에서 <나의 라임오렌지나무>가 제대로 안 읽혀진 탓이자, 개인적으로 읽었을 때 제대로 독해하지 못한 탓이며, 그런 가사를 쓴 아이유가 가창력으로든 가사로든 동시대의 누구보다 감성을 건드리는 표현력을 가진 축에 든다는 게 우리의 현 주소인 것이다.
유교적 엄숙주의와 꼴통 페미니스트 때문에 성적인 농담할 자유가 제한돼 있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제제’ 건은 이 땅에서 가장 자유로운 영역이란 ‘성적 코드’의 표출 밖에 없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제제를 보면서 가난과 폭력을 상상하지 못할 만큼, 다른 모든 종류의 상상력은 갈수록 빈곤해지는데, 성적인 코드의 ‘재현’과 관련해서만 즐길거리들이 풍부해진다면 이것은 과연 우리사회가 정말 자유로워진다는 증거로 볼 수 있을까.
제제의 성애화는 도발적이고 창의적인 상상력의 산물이 아니라, 불과 기십년 전 이웃이자 자신의 모습이기도 한, 제제를 보며 ‘이것은 내 얘기’라고 펑펑 울던 수많은 달동네와 반지하 주택가 소년/소녀들의 존재를 망각했거나 떠올리지 않게 된데 익숙해졌다는 의미다. 스물세 살 가수에게 이 빈곤함의 책임을 물으려는 것이 아니라, 그 가수가 속한, 음반을 내 주는 시스템이 그러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가사는 혼자 쓸 수 있어도, 궁극적으로 상품으로 만들어 파는 건 혼자 할 수 없으므로.
이런 관점을 담아 동녘에서 ‘제제, 원작 소설 속에서는 원래 어떤 아이였나?’라며 차분하고 건조하게 사실관계만 밝혔다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출판사가 입장을 밝힌 것은 반가우나, 이슈가 터지면 숟가락을 얹어 장사를 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 입장에서 다른 종류로 아쉬운 것이다. 워낙 책을 안 읽고, 읽어도 제대로 독해하는 것을 반쯤 우습게 여기는 사회에서, 이런 논란을 통해서라도 <나의 라임오렌지나무>가 한 권이라도 더 팔렸으면 하고 생각하는 것도 씁쓸하다.
원문: 박은하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