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Yo’라는 SNS를 아는가? 이 SNS의 가입자는 등록한 친구들에게 오직 한 마디, ‘요Yo’만 보낼 수 있다. 다른 문자를 포함해서 사진도 보낼 수 없다. 버튼을 클릭하는 순간 오직 ‘요’만 보낼 수 있고, 친구로부터도 ‘요’만 받을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 단순무식한 서비스가 자그마치 120만 달러를 투자받았고, 100만 명 이상이 다운로드를 받았다는 사실이다.
하루 동안 인간이 말하는 단어는 여자가 평균 3만 개, 남자가 2만 개 정도 된다고 한다. 이 가운데 다소 습관적으로 하는 말을 제외하면, 실제 ‘표현한다’고 할 수 있는 단어는 얼마나 될까? 희한한 것은 표현을 제대로 하고자 마음먹으면 말수는 점점 줄어든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에는 침묵조차도 표현이 된다. 악보에도 쉼표와 휴지 부분이 있고, 그림에서는 여백, 시에서는 행간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처럼 말이다.
떨어지는 별, 유성을 소재로 한 두 편의 시가 있다. 첫 번째 것은 <소나기>의 작가로 유명한 황순원의 아들인 시인 황동규의 <유성>이란 시이고, 그 아래 것은 고은 시인의 <별똥>이란 작품이다.
유성
뜰 곁에 말없이 서서 사소한 많은 일을 생각하다가
거기 몸 부비며 내려오는 유성流星어디선가 밤새가 울며
기쁨 속에서나 슬픔 속에서나
항상 내 하나의 외로운 것에로
이끄는 것.그러나 어느 날
그도 나에게 하나의 사소한 일로 될 때에
비로소 그의 참모습을 발견發見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로소
무심히 사랑해 온 것을 發見할 수 있을 것이다.
별똥
옳거니 네가 나를 알아보누나!
<유성>은 유성이란 대상을 향해 시인의 마음을 투사한 것이고, <별똥>은 유성을 철저히 외부적 소재로 삼아 그저 시인의 마음을 드러낸 것이다. 이렇게 같은 소재로 시를 써도 표현 방식과 문장 길이가 다르다. 달리 말하면, 문장의 길이 또는 사용된 단어의 개수는 표현의 한 방식들이며 또한 마음을 잘 드러내기 위해 적절하게 이용될 뿐이다.
하지만 ‘요’가 다른 표현 방식과 다른 점은, 단어를 고를 수 없다는 것이다. 오직 ‘요’라는 한 단어만 쓸 수 있기 때문에 질문과 대답조차 구분되지 않는다. 물론, 정황과 맥락에 따라 뉘앙스가 달라질 수 있다.
먼저 ‘요’라는 메시지를 보낸 사람이 질문은 아니지만 질문에 가까운 커뮤니케이션을 했다고 볼 수 있다. 평소에 짝사랑하던 사람에게 자정쯤 ‘요’라는 메시지를 보냈다면 그것 또한 나름의 의미가 있을 것이다. 아니면, 정오에 다섯 명의 사람을 만나기로 약속을 했는데, 모임을 주도한 사람이 11시 30분경에 ‘요’라는 메시지를 보내면 알람의 역할을 할 수도 있다. 이 모든 맥락에서 유통되는 커뮤니케이션의 공통점은 ‘요’라는 상대가 있는지에 대한 ‘존재 확인’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이다.
커뮤니케이션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대상이 있어야 한다. ‘요’라는 SNS는 커뮤니케이션을 하기 위한 멍석의 역할까지만 하고,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받아들이는 듯 하다. 사실, 현대인에게 있어 ‘존재 확인’은 중요하다. 현대인이 개성을 상실했다는 것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모른다는 의미다. 그러니 누구를 만나야 외로움을 덜고 사랑을 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열쇠의 돌기와 자물쇠의 홈이 맞아야 하는데, 어떻게 튀어나오고 들어가 있는지 모르고서는 맞는 홈을 찾을 수 없는 것이다.
봇코짱의 공감
일본 엽편소설(콩트) 작가 호이 신이치의 『봇코짱』이란 소설을 보면, 간단한 말밖에 할 줄 모르는 로봇 봇코짱에게 위로받는 인간들이 등장한다. 게다가 술집 매니저가 만든 봇코짱이 술을 먹는 척하며 뒤꿈치에 저장해 다시 파는 속임수를 펼쳐도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 사실을 모르지만 안다 해도 그 술집에 계속 왔을 것이다.
봇코짱은 인공지능 수준이 낮아, 대화를 주도적으로 이끌기는 불가능하고 맞장구치는 수준밖에 안 된다. 소설 속에서는 봇코짱의 간결한 대답이 도도해 보여 인기를 끌었다고도 하지만, 실은 그것보다는 자기가 한 말에 있는 그대로 반응해 주는 봇코짱에 사람들은 감동을 느꼈을 것이다. 인간 사이에 오고가는 수다 중에 과연 10%라도 공감이 이루어지고 있을까? 아무리 길게 얘기해도, 사람은 자신에게 관심이 있는 소재나 해야 할 일을 위주로 재확인하는 경우가 많다.
제발 의사를 불러 주
‘요’는 모바일 인프라 완성 후에 범람하는 SNS의 시대 속에서 차별적으로 등장한 SNS라고 할 수 있다. ‘요’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됐을 때, 알프레드 알바레즈가 쓴 『자살의 연구』란 책이 떠올랐다. 책의 서문에는 테드 휴즈와 실비아 플라스 부부의 얘기가 나온다. 두 명 모두 시인으로 남편 테드 휴즈는 영국에서 계관시인이 될 정도로 높은 명성을 누렸다.
실비아 플라스도 천재였다. 그녀의 시가 처음 활자화된 것이 여덟 살 때였고, 웰리슬리 고등학교를 다니면서는 학생이 탈 수 있는 상은 모조리 탔다. 스미드 대학에서 줄곧 장학금과 스트레이트 A를 받았고, 미국 대학교의 우등생들로 조직된 친목회인 파이 베타 카파(Phi Beta Kappa)의 회장이었으며, 뉴욕의 <마드모아젤> 지는 이미 그녀를 유명인 취급했다. 그녀는 풀 브라이트 장학금을 받고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으로 갔으며, 그곳에서 남편을 만난 것이다.
하지만 실비아는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책에서는 어린 시절 죽은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그녀의 마음에 상흔을 입혔을지도 모른다고 추정한다. 그녀에게 성인(成人)이란 살아남은 자(survivor)를 뜻했다. 대학 시절에 이미 신경쇠약을 겪었고 자살 시도도 했었다. 결혼 후 그녀가 두 아이를 낳고 기르는 사이 남편은 시인으로 큰 명성을 얻어 가고 있었다. 그녀는 죽기 얼마 전에 다음의 시를 남겼다.
여인은 완성되었다.
그녀의 죽은
몸뚱아리는 성취의 미소를 걸치고 있다…
똘똘 감긴, 죽은 아이들은 하나씩의 하얀 뱀
…
그녀는 그 죽은 아이들을 되접어
자신의 몸뚱아리 속에 집어넣는다.
이 책의 서문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그녀가 자살하기 전날에 두 사람에게 연락하는 대목이다. 그녀가 연락한 첫 번째 사람은 자신의 집 바로 아래층에 사는 늙은 화가였다. 실비아는 우표를 빌린다는 핑계를 대며 찾아가, 자신이 아침 9시 전에는 꼭 일어난다고 말했다. 그리고 새로 온 가정부에게는 다음 날 아침 9시에 오라고 재확인을 했다. 실비아가 자살한 날 아침에 한 일은, 가정부가 오기 전에 아이들을 위해 우유와 식빵을 준비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모든 문과 창문을 꼭꼭 막고 가스를 틀었다.
하지만 가정부가 열리지 않는 문을 아무리 두드려도 아래층 화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귀가 잘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건축업자들이 문을 열었을 때 실비아는 이미 가스 중독으로 죽은 뒤였다. 그녀가 남긴 마지막 메모는 “제발 의사를 불러 주…”였다.
혹시 ‘요’라는 짧은 단어를 현대적으로 해석한다면 “도와 달라”는 외침 중의 하나가 아닐까?
※ 이 글은 필자의 저서, 『구글의 달로 가는 길』 원고 중 일부를 발췌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