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필자의 저서, 『구글이 달로 가는 길』 원고 중 일부를 발췌한 것입니다.
셀카봉 신드롬
셀피는 스마트폰 등으로 자신의 얼굴을 촬영하거나 그것을 SNS에 올리는 행위를 말한다. 셀피란 단어는 조용하지만 거대한 바람을 타고 흙먼지를 일으켰고, 그다음에 셀카봉이 출현했다.
최초의 셀카봉은 1983년에 두 명의 일본인이 만들었다. 디지털카메라가 막 등장하기 시작한 80년대 초에, 우에다 히로시와 미마 유지로는 길이 조절 막대와 막대 끝에 카메라를 고정시키는 장치, 그리고 손잡이에 달린 스위치로 구성된 셀카봉을 만들었다. 그들이 만든 셀카봉은 1984년에 일본에서 공개된 다음, 1985년에 미국에서만 특허로 등록됐다.
이미 20년이 지나 특허 존속 기간은 끝났지만, 새로운 기능을 조금씩 덧붙인 셀카봉 특허는 지금도 계속 출원되고 있다. 한국에서 셀카봉 관련 특허는 아이폰4S가 출시된 2011년부터 출원되기 시작했는데, 2013년까지는 매년 한두 건 정도만 등록되더니 2014년에 들어서는 8건의 특허가 쏟아져 나왔다. 스마트폰을 고정하는 막대 끝에 링을 달아 스마트폰을 360도로 돌리며 촬영하는 기능 등이 추가된 것들이다. 특이한 것은 이런 특허들을 특허 법인이나 제조사 등의 기업이 아니라, 모두 개인이 출원했다는 점이다.
‘2014년 올해의 히트상품 30’에서 셀카봉은 단연 1위로 꼽혔고, 미국 <타임>지에서도 올해 최고의 발명품으로 선정됐다. 물론 셀카봉이 최근에 발명된 것은 아니지만, 모바일 인프라가 완성된 2014년을 셀카봉이 실제로 발명된 해로 삼아도 될 것 같다. 세계이동통신사업자협회에서 발표한 바에 따르면, 2014년이 지나며 세계 인구보다 개통된 유심 수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자신의 얼굴을 찍는 행위가 이렇게까지 유행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도대체 셀피가 무엇이길래 ‘셀카봉 신드롬’까지 만들어 낸 것일까?
‘셀피’의 역사
기록된 것을 기준으로 보면 인류 최초의 자화상은, 자화상이 아닌 자각상이다. 자신의 얼굴을 작품에 새긴 것이 먼저 시작됐다. 플리니우스(Gaius Plinius Secundus, 23~79)가 저술한 『박물지』를 보면, 기원전 6세기의 조각가인 테오도루스는 네 마리의 말이 이끄는 이륜 전차를 모는 자신의 얼굴을 조각했다고 한다.
자화상이 본격화된 것은 인간이 인간에게 집중하기 시작한 르네상스 시대부터다. 14세기 이탈리아의 시인이었던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는 “바깥 세계를 탐하지 말라, 너 자신 안으로 가라, 인간의 내면에 진리가 있다”고 말했다. 15세기 이탈리아의 화가 파올로 우첼로는 <지오토, 우첼로, 도나텔로, 안토니오 마네티와 브루넬레스키의 흉상>이란 그림을 그렸는데, 이는 당대 유명했던 화가 다섯 명의 얼굴을 그린 것이었다.
비밀리에 자신의 얼굴을 그려 넣던 고대와는 달리 조금 더 뻔뻔스러워지고 당당해진 것이다. 다만,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마음은 변함이 없었다.
또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는 플라톤과 땅을 가리키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나오는 그림으로 유명한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에도 개인의 자부심이 반영되어 있다. 플라톤은 다빈치의 얼굴을 따 그렸고, “만물은 흐른다”로 유명한 고대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미켈란젤로의 모습을 가져왔다. 라파엘로는 이 54명의 인물 속에 자신의 얼굴도 그려 넣었다.
17세기가 되면서, 자화상은 조금 더 당당하게 등장하기 시작했다. 개인주의가 자본주의와 맞물리며 부흥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개인주의 없이는 발달할 수 없다. 가령 자본주의에서는 당사자 간에 법을 포함한 형식적 계약에만 이상이 없으면, 아무 문제가 없다. 하지만 예전엔 그렇지 않았다. 대표적인 스콜라 철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는 “판매자가 자기가 만든 상품을 그 상품의 가치보다 비싸게 팔고, 구매자는 그 상품의 가치보다 더 싸게 산다면, 판매자와 구매자는 서로를 기만하는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자본주의하에서는 개인이 스스로 판단해 결정했다면 아무 문제가 없다. 상품 거래에 의해 이윤이 발생한다는 것은, 어느 정도의 상호기만을 전제로 하고 있다. 사실, 마케팅도 기만의 영역이다. 겸손과 정직도 마케팅의 영역 안으로 들어가면 교묘하게 기만적으로 이용된다.
당시 네덜란드는 영국이 세계를 제패하기 전에, 가장 발전된 형태의 자본주의 국가였다. 네덜란드는 14세기 초, 당시 가장 많이 소비되던 생선인 청어를 오래 보관하는 방법, 즉 청어 염장법을 발명했다. 이 발명에 따른 제조업의 성장으로 네덜란드에는 도시가 만들어졌고, 도시의 형성으로 자연스럽게 돈이 모였다. 네덜란드는 그 돈으로 스페인과 포르투갈로부터 아시아 향신료의 무역 독점권을 빼앗아 왔다.
당시 유럽인들은 계피, 후추 같은 향신료 소비를 원했고, 네덜란드는 아시아로부터 향신료를 수입할 수 있는 항로를 점령하여 향신료 무역권을 독점했다. 당시 네덜란드에서 유화가 발전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무역 덕에 네덜란드 화가들은 돛을 만드는 데 쓰이던 캔버스와 아마인(亞麻仁) 기름을 그림에 쓸 수 있었던 것이다.
17세기에 가장 유명한 화가 중 하나인 렘브란트는 네덜란드 출신이다. 당시 네덜란드에서는 자화상을 그리지 않은 화가가 거의 없었다. 렘브란트 역시 약 100점의 자화상을 그렸다. 그중 <웃고 있는 자화상>이란 작품이 있는데, 제목과 달리 그림은 울고 있는 것 같다. 누군가는 이 얼굴을 보고 “마치 화산 폭발 뒤에 남은 자의 모습과 같다”라고 했다. 개인주의가 보편화되면서 혼돈 그 자체인 인간의 내면을 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19세기 낭만주의 조류가 시작되면서, 이런 경향은 더욱 짙어졌다.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 귀스타브 쿠르베는“나는 일생 동안 내 마음의 변화를 반영하는 자화상을 여러 편 그렸다. 한마디로 나는 자화상으로 내 생애를 썼다”고 말하기도 했다.
우리가 셀카를 찍는 이유
다시 셀카봉 이야기로 돌아오자. 당연한 말이지만 셀카봉은 자신의 얼굴을 더 잘 찍기 위한 도구이다. 결국, 셀카의 외연에 포함된다. ‘그림을 그리는 것’과 ‘사진을 찍는 것’은 엄연히 다른 행위이지만 작자와 모델이 일치한다는 점에서는 같다. 셀카를 찍는 이유로 먼저는 나르시시즘을 생각할 수 있다. 자신의 멋짐 또는 아름다움을 알리고자 하는 마음 때문이다.
그런데 단지 그런 이유밖에 없을까?
정확히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경험상 셀카를 찍은 횟수는 SNS에 공유하는 횟수보다 10배, 100배, 1000배가 넘는다. 특이한 설정과 포즈로 자신의 개성을 알리고자 SNS에 공유하는 사람도 있지만, 누구나 그것이 어느 정도 가면이란 것을 알고 있다. 그것은 SNS 관람객들에게 잘 해야, 한 번의 웃음을 줄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단지 나르시시즘 때문에 셀카를 찍고 SNS에 공유한다는 것은 근거가 희박하다.
정신학계에서는 나르시시즘을 ‘자기애성 성격장애’로 규정하고 있다. 물론 셀카를 찍는 사람이 그런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셀카 행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런 부분이 참고가 될 것이다. 프로이트는 자기애성 성격장애에 대해 이성의 몸을 대하듯 자신의 몸을 대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즉, 자신의 몸을 응시하고 애무하며 성적 쾌감을 느낌과 동시에 만족을 추구하는 것이다.
조금 풀어서 말하면, 인간은 원래 타인에게 어느 정도 의존성을 보이는 것이 ‘정상’인데, 나르시시즘에 빠진 사람은 누구의 시선도 의존하지 않고 오직 자신만 본다는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타인의 시선을 차단해 버린 것이다.
2014년에 개봉한 <프랭크>란 영화를 보면, 24시간 가면을 뒤집어쓰고 이상한 노래를 부르는 가짜 천재가 등장한다. 가면을 벗는 순간 그는 바보가 되지만, 그래도 가면을 쓰고 있으면 가짜 천재 노릇은 할 수 있다. 그 유아론적이고 아주 좁은 세계 속에서 말이다. 얼굴과 가면 사이, 몇 센티미터에 불과한 그 작고도 짧은 세계.
타인을 피해 달아난 사람들이 닿을 곳은 자기 자신밖에 없다. 한마디로 자신을 찍어 줄 사람, 자신을 봐줄 사람이 없기 때문에 스스로가 모델이 되어 자신을 찍는 것이다. 셀카의 버튼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타인의 시선을 창조해 낸다. 사회 속에서 자기 존재에 대한 불안정성은 존재의 부인으로 이어지고, 사회 바구니에서 자신을 끄집어내어 자신만 있는 지하실로 이동한다.
나는 그들에게 무엇인가?
역사가 흘러 근대로 오면서 개인이 등장했다. 아니 개인을 ‘발명’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개인주의는, 개인이란 대상 또는 이상을 상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정말 개인이란 것이 존재하는가 하는 점이다. 하나의 부품 또는 기호로서의 개인은 있을 수 있지만, 정말 우리는 교과서에서 말하듯이 개성 넘치고 특별한 개인들일까? 더구나 자본주의 발달 이후 상품으로 전락해 버린 우리들이?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20세기 초에 쓴 『계몽의 변증법』(문예출판사, 1996년)을 보면 이런 말이 있다.
“개인들의 요지부동한 태도건 점잖게 자신을 드러내는 태도건, 모두 다 아주 미세한 부분에서 서로 차이가 나는 현관 자물통처럼 대량 생산된 것이다. 자아의 특수성이란 언뜻 보면 자연스러운 말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사회에 의해 결정된 개인들의 독점 상품이다. 개인의 특수성은 구레나룻, 프랑스적인 억양, 음탕한 여자의 깊은 저음…으로 축소된다. … 사회를 지탱시켜 주는 개인은 사회라는 보기 흉한 상흔을 지니고 다닌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고뇌의 화가’ 고흐는 모델을 살 돈이 없어 자화상을 그렸다고는 하지만 그것 역시 표면적인 이유 중 하나다. 고흐가 태어나기 전에, 한 명의 아이가 그의 엄마 배 속에서 죽었다. 그리고 부모는 두 번째로 임신했고 태어난 아이에게 ‘고흐’란 이름을 붙였다. 그것은 배 속에서 죽었던 아이에게 주려고 했던 이름이었다.
“나는 누구인가?”란 질문을 조금 더 솔직히 말하면, “나는 그들에게 무엇인가?”이다. 고흐는 이 질문을 평생 짊어졌을 것이고, 그래서 고뇌로 얼룩진 약 40여 편의 자화상을 그렸을 것이며, 그리하여 끝내는 한쪽 귀를 잘랐을 것이다.
철학자 자크 라캉은 자기 인식 과정에 대해 논의하면서 ‘거울 단계’란 개념을 설명한다. 거울 단계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이미지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을 말한다. 유아에게 거울이 필요한 이유는 자신을 하나로 통합적으로 인식할 수 없기 때문이다. 파편화된 자신이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거울에 비친 자신의 이미지가 필요하다. 그 이미지는 평안하고 온전해 보이지만, 그것은 사실 이미지일 뿐 내가 아니다.
셀카도 어쩌면 이 거울에 비친 자신의 이미지와 같을 수 있다. 내가 온전히 있음을 인정받고 싶은 욕구, 어떻게든 고작 하나뿐인 자신의 시선을 통해서라도 말이다.
라캉은 거울 단계를 거쳐 기호화된 개인이 사회로 편입된다고 말한다. 어쩌면 셀카를 찍고 바쁘게 사는 현대인들은 사회 구성원으로서 잘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아직도 거울이 필요한 유아 단계인지도 모른다. 현대인은 나를 찾고 싶다는 욕구는 있지만 그 거울 너머를 보지 않으려 한다. 그래서 계속 자신을 향한 카메라 렌즈를 바라보며 눈을 찡긋거리기만 하는 것이다.
※ 참고문헌
페터 코슬로브스키, 『자본주의 윤리학』, 이미경 역, 철학과현실사
조은정, 「반 고흐의 자화상 전 작품에 관한 연구」, 영남대학교 대학원 석사논문, 199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