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력충 베지터의 비애
그는 왕의 아들로 태어났다. 좋은 유전자를 가진 그는 태어날 때부터 왕의 전투력을 넘어섰다. 긍지 높은 전사인 그는 지루하게 노는 것보다는 나가서 싸우는 것을 좋아했다.
하지만 평화로운 나날은 그가 없는 사이 다른 행성에서 침략해온 점령군들에 의해 산산조각났다. 그의 집은 불타 없어지고 종족 자체가 멸망했다. 긍지 높은 전사인 그에게는 참을 수 없는 치욕이었다. 그 뒤로 그는 적들을 무찌르기 위해 엄청나게 훈련에 매진한다.
하지만 다른 행성의 왕자,
근본 없는 생명체,
어디로 튈지 모르는 불안한 놈
등에게 계속 털리면서 자존심이 땅에 떨어진다. 하지만 무엇보다 참을 수 없었던 건 자신보다 한참 아래로 내려다 봤던 하급전사(손오공)의 능력이 자신을 능가한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그가 노력을 하지 않았던 건 아니었다. 중력실에서, 시간과 정신의 방에서, 아들(트랭크스)과도 계속 수행을 했지만 문제는 오공도 똑같이 노력한다는 점이었다. 그의 노력은 언제쯤 빛을 발할 수 있을까.
애덤 스미스도 노오오오력이 부족해!
앞에 나온 인물은 만화 드래곤볼의 원조콩라인 ‘ ‘영원한 2인자’ 베지터다. 베지터가 누군가. 좋은 유전자를 타고났고 강해지기 위해 노력까지 엄청해대는 ‘사이어인의 왕자’ 아닌가.
하지만 뭔가 항상 2% 부족한 모습을 보이면서 적들에게 계속 지고 털리는 모습만 보여준다. 사실 존나 센데…
만약 그때 손오공이 베지터에게 이렇게 말한다면 어땠을까.
“베지터, 그건 너의 강해지기 위한 ‘노오오오오력’이 부족해서야.”
자본주의 사회에서 ‘무한 경쟁’은 찰스 다윈의 ‘자연선택론’의 논리처럼 인정받는 요소다. 인간은 욕망을 끝없이 추구하는 동물로, ‘한정된 예산 하에서 최대의 효용을 뽑아내려 한다’는 것이 주류 경제학의 전제다.
여기에 일반인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개념이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이다.
그는 시장에서 개인의 이익 추구가 많은 경우 만인의 이익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깨달은 최초의 인물이었다. 그런데 이 좋은 개념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어째 “노오오오력을 하라”는 메시지로 변질된 것 같다.
그런데 스미스가 ‘보이지 않는 손’을 꼭 신봉하진 않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은 모양이다.
그는 자신의 책 『국부론』에서 사적 이익의 추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개인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함으로써 실제로 사회 이익을 직접 추구할 때보다 더욱 효과적으로 그것을 높이는 경우가 많다.” 여기서 포인트는 ‘그런 경우가 많다’는 것이지 ‘꼭 그렇다’는 것은 아니란 점이다.
사실 자연선택론은 ‘모두가 노오오오력하는 사회’의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비용편익의 원리에 따르면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얻을 수 있는 편익이 비용보다 더 클 때만 행동을 해야 한다. 만약 우리가 하는 어떤 일에 비용이 따른다고 했을 때, 그 비용을 모두 부담하고 모두 100%의 편익을 취한다면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잘 작동하는 사회일 것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 우리의 행동은 타인에게 다른 편익이나 비용을 가져오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럴 경우 ‘보이지 않는 손’은 오작동한다.
“처지고 싶지 않음 죽어라 뛰어!”
하이힐을 예로 들어보자. 하이힐은 여성의 키를 키워줄 뿐만 아니라 등을 똑바로 펴게 해준다. 가슴은 앞으로 엉덩이는 뒤로 밀어주면서 S라인 몸매를 강조한다.
하지만 모든 여성들이 아름다워지기 위한 노오오오력으로 하이힐만 신는다고 가정해보자. 이러한 장점들이 사라질 것이다. 모든 여성들이 하이힐로 키를 키우고 S라인을 만든다면 상대적인 신장에는 아무 변화가 없기 때문이다. ‘나만 하이힐을 신었을 때’ 비로소 다른 여성들과 차별화가 되는 것이다. 여기에 발이 ‘찢어지게’ 아픈 족저근막염 등은 덤이다.
야구장은 또 어떨까. 선수들을 좀 더 잘 보기 위해서 앞자리에 앉은 사람들이 노오오오력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고 해보자. 결국에는 뒤쪽에 앉은 사람들까지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겠지만, 모두가 자리에 앉아 있을 때보다 잘 볼 수도 없고 처음보다 더 불편하기만 한 것이다.
모두가 노력하여 그 노력이 함께 물거품이 되는 현상: 붉은 여왕 효과
이를 지적한 용어로 ‘붉은 여왕 효과(Red Queen’s Hypothesis)’가 있다. 루이스 캐럴의 소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붉은 여왕이 한 말로, 시장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기업이 끊임없이 노력하지만 경쟁사와의 차이가 도무지 좁혀지지 않는 상황을 일컫는 말이다.
붉은 여왕의 나라에서는 주변 세계도 함께 움직이기 때문에 열심히 뛰어도 좀처럼 몸이 앞으로 나갈 수 없다. 이때 붉은 여왕은 앨리스에게 말한다.
“제자리에 있고 싶나? 그럼 죽어라 뛰어!”
이러한 노오오오력
과 결부돼서 자주 쓰이는 말이 헬조선
이다.
우리나라가 지옥과도 같다는 의미를 지닌 신조어로 이제는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는 듯하다. 한국 사회가 너무 힘들고 삶을 유지하는 것이 고통스럽다고 생각하는 사람, 그리고 한국 사회에 큰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이 헬조선이라는 표현에 공감하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헬조선’이란 말에는 여러 가지 뜻이 내포돼 있다.
외환위기 사태 이후 노력을 해도 중산층으로 상승하기 어려운 환경, 모두가 대학에 진학하면서 그로 인한 스펙으로서의 학력이 무의미해져 결국 취업에서 차등이 생기지 않으면서 대학 등록금으로 인한 경제적 부담만 더해지는 사회구조, 몇 년씩 돈을 모아도 치솟은 집값에 자택 마련은 엄두도 못내는 상황 등등.
그래도 누군가는 이렇게 말한다.
“이렇게 된 건 너의 노오오오력이 부족한 거야.”
물론 노력은 중요하다. 최소한의 노력은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요소다. 아무 일 하지 않고 빈둥거리기만 하면 좋을 것 같지만 의외로 제 명에 못산다고 한다.
하지만 ‘노오오오력’은 다르다. 여기에는 그 사람의 주위 환경, 유전자, 자라온 여건, 자본력 등 요소가 모두 빠져 있다. 베지터가 아무리 노오오오력을 죽어라 해도 손오공을 이기지 못한 게 이 때문이다. 그동안 손오공은 노나? 하지만 베지터와 오공이 죽창을 가졌다면? 공평하게 나도 한 방 너도 한 방!
그래도 노오오오력을 하라고? 그렇다면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어린이날 행사 때 어린이들에게 강조한 말로 마무리하겠다.
“정말 간절하게 원하면 온 우주가 나서서 도와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