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메르스로 온 나라가 들썩였다. 중동 지역을 중심으로 발생한 급성 호흡기 감염병인 메르스는 사우디아라비아에서만 1,010명이 감염되고 442명이 사망했다. 우리나라에서는 186명이 감염되고 36명이 사망했다.
이 글은 메르스가 유행하던 시기에 가족간병인으로 겪은 일을 기록한 것이다. 나이 스물여섯, 2년 째 백수로 살던 나는 엄마를 간병하기 위해 광주의 한 병원에 12일 동안 머물렀다.
낯선 광주
2015년 6월 1일 월요일. 엄마가 병원에 입원하는 날이다.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거리에 마스크를 쓴 사람들이 늘었다. 광주행 기차를 타러 용산역에 갔다. 기차역에 도착하자마자 마스크를 사러 약국에 갔더니 다 팔리고 없었다. 캐릭터가 그려진 어린이용만 서너 개 남았다.
일주일 전 엄마한테 전화가 왔다. 수술하고 딱 1년 째 되는 날, 엄마는 수술 경과를 알아보는 검사를 했다. 다른 혈관이 부풀었다는 진단을 받았다. 의사는 정확한 검진을 위해 입원을 권했고, 엄마는 딸인 내가 옆에서 간병해주길 바랐다.
기차에 올랐다. 1년 전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엄마는 운동을 하다가 쓰러졌다. 병명은 뇌출혈의 한 종류인 지주막하출혈이었다. 뇌졸중은 빠른 시간에 치료를 받을수록 생존율이 높다. 하지만 고향인 순천에서는 뇌수술을 할 수 있는 병원이 없었다. 구급차로 한 시간 반을 달려 광주에 있는 대학병원에 갔다. 8시간이 넘는 수술 끝에 엄마는 중환자실로 옮겼다. 나는 광주에서 간병을 하며 보름을 보냈다.
몇 밤을 자도 익숙해지지 않는 병원처럼, 광주는 여러 번 와도 낯설었다. 창밖으로 풍경이 빠르게 지나갔다. 처음보다는 병원생활이 수월할 거라며 마음을 다잡았다.
전문가 아닌 내가 할 수 있는 일
신경외과 병동에서 보낸 첫날밤, 한숨도 자지 못했다. 이튿날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보고 놀랐다. 다크서클이 내려와 판다곰 같았다. 소리에 예민한 엄마는 2인실을 택했지만 겪어보니 6인실이나 2인실이나 스트레스 받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뇌수술 환자들은 작은 자극에도 민감했다. 나는 다른 환자까지 신경을 써야했다.
입원실에는 붕대로 머리를 감은 중년 여성이 먼저 들어와 있었다. 그날 밤, 그녀는 병실 창문을 전부 열고 잠들었다. 나는 낡은 간이침대에 누워 몸을 웅크렸지만 밤새 추위에 시달려야 했다. 병원 생활이 쉽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옆 환자는 서른세 살 먹은 아들이 돌보고 있었다. 광주에 사는 그는 얼마 전에 가게를 열었는데 간병 때문에 일을 잠시 놓았다고 했다. 아픈 어머니가 수시로 짜증을 내도 생글생글 웃었다. 엄마는 효자라며 칭찬했다.
두 환자가 낮잠을 자고 있을 때였다. 커튼 너머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가 잠든 어머니에게 힘들다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아서 천성이 유쾌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1년 전 내 모습이 떠올랐다. 마음을 알 것 같아서 그가 더 안쓰러웠다.
나도 그 때 엄마 옆에서 최선을 다했다. 회복 중이던 엄마는 눈에 보이는 것들 중에서 아픈 원인을 찾으려 애썼다. 약 성분이 달라진 것 같다고, 링거액이 바뀌어서 아픈 거라고 고집을 부렸다. 그때마다 나는 간호사실로 달려갔다. 돌아오는 답은 똑같았다.
“약이나 주사는 아무 이상 없어요.”
나는 알면서도 늘 의사나 간호사에게 질문을 했다. 그게 전문가가 아닌 내가 엄마 옆에 있는 이유라고 생각해서였다. 엄마는 의료진의 답을 전해 듣고 나서야 안도했다.
병원이야, 집단 수용소야
검사를 하루 앞 둔 날 자정이 넘은 시각, 간호사실에 도착하자 의사가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혈관조영술(조영제를 투입해 몸속 혈관을 촬영하는 검사)의 부작용을 설명했다. 나는 검사 동의서를 물끄러미 보다가 보호자 서명 란에 이름을 갈겨썼다. 병실로 돌아왔다. 잠든 엄마의 얼굴을 슬쩍 보고 누웠다. 의사가 했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새벽 다섯 시 반. 겨우 두 시간을 잤다. 복도는 소란스러웠다. 눈을 비비며 목욕용품을 챙겨 샤워실로 갔다. 6층에는 신경외과 병동과 내과 병동이 있는데 공용 샤워실은 남녀 각각 하나뿐이다. 새벽이라서 한가할 줄 알았다. 샤워실 문이 굳게 잠겨있었다. 문 앞에 쭈그리고 앉아 15분을 기다렸다.
맞은편 공용화장실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쉴 새 없이 사람이 오갔다. 일흔이 넘어 봬는 할머니가 U자 모양 보조기구에 양팔을 얹고 복도를 가로질렀다. 할아버지가 옆에서 할머니를 도왔다. 노인 환자들의 보호자는 대부분 그들의 배우자다. 아내를 간병하는 할아버지들끼리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샤워실 문이 열렸다. 직업 간병인으로 보이는 오륙십대 여성이 미안한 표정으로 재빨리 나왔다. 김 서린 안으로 들어서자 쌓여있는 쓰레기가 눈에 들어왔다.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내가 있는 곳이 병원인지 집단 수용소인지 헷갈렸다. 사람들이 밀집한 병동은 청결하게 관리되지 않았다. 면역력이 떨어지는 환자들에겐 좋은 환경이 아니었다. 이런 환경에서 전염병이 돌면 무방비로 노출되는 것은 아닐까 염려됐다.
오전 열한시 반. 검사가 끝나고 지혈과의 사투가 시작됐다. 간호사가 동맥을 뚫은 엄마의 허벅지에 무거운 주머니를 얹었다. 다음날 아침까지 침대에서 꼼짝도 하면 안 된다고 여러 번 당부했다. 엄마가 지겹다며 한숨을 쉬었다. 나도 덩달아 병실에 발이 묶였다.
보호자는 1+1 세트다. 간호사가 일러준 보호자 역할은 엄마가 움직이지 않도록 감시하고, 병원 편의점에서 사온 소변 통으로 서너 시간에 한 번씩 소변 주머니를 비우는 일이다. 침대엔 엄마가 간이침대엔 내가 누웠다. 엄마가 고개를 삐죽 내밀어 멀뚱히 눈만 굴리는 나를 내려다봤다.
“할 일도 딱히 없는데, 나가서 커피라도 마시고 와.”
듬직한 딸인 척 행세하느라 괜찮다고 말했지만 금세 후회했다.
그날 밤 12시. 간호사실 모니터에 아침에 촬영한 사진이 띄워졌다. 한 눈에도 엄지손톱만큼 부푼 뇌혈관이 보였다. 의사는 코일로 혈관을 메워야 뇌출혈을 막을 수 있다며, 되도록 빨리 수술 날을 잡자고 했다. 엄마에게 수술 소식을 덤덤히 전했다. 담요를 끌어당겨 머리끝까지 덮었다. 괜히 눈물이 났다.
귀먹은 간병인이라도 24시간 상주
이틀 뒤, 옆 환자가 2차 병원으로 옮겼다. 나는 퇴원한 환자가 쓰던 창가로 재빨리 짐을 옮겼다. 병실에 아무도 없는데 엄마가 옆에서 속삭였다.
“퇴원한 아줌마 부자인가 봐. 아줌마 명의로 된 원룸이 몇 채나 된대. 아까 들었어.”
“그런데 왜 아들이 일도 안 나가고 간병해?”
“효자 아들이라서 그런가보지.”
바닥에 직업간병인협회 스티커가 떨어졌다. 캐비닛에 도로 넣어두었다. 새로 온 사람은 스티커가 필요할지도 몰랐다.
저녁에 새 환자가 왔다. 멜론 포장지처럼 생긴 그물을 쓴 60대 여성이 침대에 실려 왔다. 중환자실에서 막 일반병동으로 옮긴 그녀는 말투가 구수했다. 군산에 산다는데 인근 병원에서 코일삽입술(늘어난 뇌혈관에 코일을 삽입해 뇌출혈을 미리 막는 시술)을 받던 중 뇌출혈이 발생하는 바람에 광주의 대학병원으로 오게 되었다고 했다.
머리가 반쯤 벗겨진 남편이 병실로 따라 들어왔다. 웃는 인상이 하회탈을 닮았다. 아줌마가 아저씨에게 피곤할 테니 집에서 자고 내일 오라고 하니, 옆에 있던 간호사가 단호하게 안 된다고 말했다. 보호자가 24시간 상주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아저씨는 병원에서 밤을 보냈다.
나는 뜬 눈으로 아침을 맞았다. 간병이 서툰 아저씨 때문이다. 저녁식사 시간에 간호사가 옆 환자의 침대를 세웠다. 아저씨는 새벽에 깬 아줌마가 허리가 아프다고 할 때까지 이유를 몰랐다. 우왕좌왕하는 남편이 답답했던지 그녀는 소리를 질렀다. 결국 내가 침대 내리는 법을 알려줬다.
그 뿐 아니었다. 옆 환자의 링거바늘이 빠져서 수액과 피가 시트를 흠뻑 적셨다. 아줌마가 다시 남편을 불렀다. 그는 다른 사람들보다 2배는 늦게 반응했다. 간병을 하기에는 여러모로 어설퍼 보였다. 차라리 내가 두 환자를 돌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결국 아줌마가 한 글자씩 큰소리로 말을 했다.
“간.호.사.불.러.오.라.구.요.간.호.사!”
그제야 병실 밖으로 몸을 돌렸다. 아줌마가 엄마와 나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아저씨가 평생 뒤치다꺼리를 해본 적도 없는데다가 귀까지 먹어서 그렇다고 했다. 며칠이 지나도 아저씨는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아들만 셋인 아줌마는 딸을 둔 우리 엄마를 무척 부러워했다. 나는 아줌마가 가여웠다. 비전문가는 미숙할 수밖에 없다.
결국 웬만한 일을 간호사가 처리하게 됐다. 그런데도 환자 옆에 24시간 보호자가 붙어있어야 하는지 의문이 들었다. 엄마가 아줌마에게 돈 주고 간병인을 구하는 게 낫지 않겠냐고 물었다.
“아이고, 아저씨 있는 데선 그런 말이랑 말아유. 아저씨가 싫어해유. 간병비가 하루에 8만5천원이라면서….”
아줌마가 시무룩한 투로 답했다. 그리고 6인실 병실과 2인실 병실 가격 차이보다 훨씬 많은 돈을 보태야 간병인을 구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엄마 옆에 나 말고 전문가가 있었다면
시술 전날, 간호사가 자정부터 금식해야 한다고 일렀다. 점심 이후 엄마는 속이 더부룩하고 소화가 안 된다며 일부터 트림을 했다. 위장이 안 좋은 엄마가 늘 하던 말이라 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엄마가 소화시키고 오겠다며 병실 밖으로 나갔다.
나는 엄마 심부름으로 체리를 사서 돌아왔다. 산책을 다녀온 엄마는 갑자기 머리가 아프고 눈앞이 어지러워 식겁했다고 말했다. 옆에 있던 환자가 지압을 해줘서 괜찮다고 했다.
마음이 덜컹 내려앉았다. 1년 전, 엄마에게 나타난 뇌출혈 전조 증상이 바로 그랬다. 엄마는 태연한 얼굴로 연신 트림을 했다. 나는 말없이 등을 두드려줬다. ‘엄마 옆에 내가 아니라 전문가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면 스치듯 하는 말도 허투루 듣지는 않았을 텐데.’ 잠시라도 떨어져 심부름을 다녀온 게 후회됐다. 이러다 사고라도 나면 어떡하나 걱정이 됐다.
밤 11시, 주사바늘 세 개가 엄마의 양 팔에 나뉘어 꽂혔다. 시술을 앞두고 잠이 오지 않았다.
머물 곳 없는 병원
병원에는 보호자가 오래 머물만한 곳이 없었다. 엄마는 아침부터 달려온 아빠에게 기다리지 말고 순천으로 돌아가라고 당부했다. 하지만 아빠는 엄마가 수술을 마치고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다. 엄마는 오전 9시에 수술실로 이동했다. 담당의가 수술 후에 중환자실에서 상태를 지켜본 뒤, 일반 병동으로 돌아갈 거라고 말했다.
침대가 빠진 병실엔 먼지 뭉치와 간이침대만 남았다. 아침 일찍 운전하고 온 아빠는 피곤해 보였다. 간이침대에서 눈을 붙이라고 한 뒤 자리를 비켰다. 나는 테라스 벤치에 앉아 목을 뒤로 젖혔다. 20분을 졸다가 깼다. 병실로 돌아갔더니 아빠가 앉아서 책을 읽고 있었다. 아빠는 눈치가 보여 잘 수 없었다고 했다. 결국 병원 밖으로 나왔다.
아빠가 영화를 보며 시간을 때우겠다고 해서 가까운 영화관으로 갔다. 액션 영화 <악의 연대기>의 티켓을 샀다. 시작까지 시간이 좀 남아서 카페에 들어갔다. 소파에 기대 잠깐 눈을 붙인다는 게 나나 아빠나 30분 넘게 자고 말았다. 아빠를 깨워 허겁지겁 상영관에 들어갔다.
한 시간쯤 뒤 전화기에 062로 시작하는 번호가 떴다. 황급히 상영관을 뛰쳐나왔다. 중환자실에서 수술이 잘 끝났다고 알리는 전화였다. 곧 베드를 일반 병동으로 옮길 테니 병원에 도착하면 알려달라고 했다. 아빠와 나는 서둘러 밖으로 나왔다. 광주 지리는 하나도 모르고 마음만 급한 우리는 결국 길을 잃어버렸다.
그날따라 햇볕이 뜨거웠다.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었다. 등 뒤로 땀방울이 떨어졌다. 짜증이 밀려왔다. 자리에 주저앉고 싶었다.
세 번이나 미뤄진 베드 이동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중환자실로 갔다. 간호사가 지금은 베드를 옮길 수 없다며 난처해했다. 허탈했다. 병원 1층에서 기다렸다. 2시간 후에 중환자실에서 다시 연락이 왔다. 5층에 있는 중환자실로 가서 벨을 눌렀는데 이번에도 안 된다고 했다. 불러서 간 터라 더 황당했다. 중환자실 앞에서 한 시간을 기다렸다.
알고 보니 중환자실에서는 계속 신경외과 병동으로 연락을 했는데 간호사들이 바쁘다며 베드 이동을 미뤘다고 했다. 저녁 6시 반이 되서야 병실로 돌아온 엄마는 옆 환자에게 불만을 털어놓았다. ‘작년보다 신경외과 병동 간호사 인원이 줄어든 것 같다,’ ‘아무리 일이 많아도 병동 간호사들이 베드를 세 번이나 미룬 것은 무책임하다…’ 아줌마도 맞장구를 쳤다. 자신도 신경외과 병동에서 자꾸 미루는 바람에 저녁에야 중환자실에서 나왔다고 했다.
나는 두 환자의 대화를 듣다가 병원 내부의 인력 부족 문제가 환자가 간병인을 구해야 하는 현실과 관련이 있는 게 아닐까 궁금해졌다.
아빠는 엄마한테 화내는 걸 보니 시술이 잘 된 것 같다며 농담을 던졌다. 나는 병실 앞에서 아빠에게 졸음운전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다음날, 담당의사가 수술이 잘 됐다며 퇴원해도 된다고 했다. 필름 속 엄마의 뇌에는 코일이 공 모양으로 채워져 있었다. 그날 저녁을 먹으며 텔레비전을 틀었다. 전남 지역에 메르스 감염 확진자가 생겼다는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사람들이 모두 코와 입을 가리고 병원을 돌아다녔다.
가족 간병인이 감염의 원인?
병원 내에서 메르스에 감염됐다는 뉴스로 나라가 수선스러웠다. 병원에서도 화제는 단연 메르스였다.
나는 1년 전에도 병원에 있었다. 그 때는 시설이 더러워도 그 순간만 화를 냈고 불편해도 참고 넘겼다. 그런데 이번에는 병원의 광경이 작년과 다르게 느껴졌다. 의료시설이기 때문에 지역 사회보다 감염에 안전할 거라는 믿음이 무너졌다.
병실은 좁은데 환자와 환자를 돌보는 보호자와 간병인이 늘 붙어있으니 밀도가 높다. 1인실엔 두 사람이, 2인실엔 네 사람이, 6인실엔 열두 사람이 지내는 셈이다. 환자의 치료를 위해 있는 시설들은 여러 사람이 북적여 쉽게 지저분해진다. 병동 한 층에 하나밖에 없는 공용 화장실은 환자와 보호자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청결하지 않은 환경이라 오히려 병균이 퍼지기 쉬울 것 같다. 병원이 오히려 위험지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병원의 인구밀도를 높이는 보호자. 환자 옆에는 왜 꼭 보호자가 종일 붙어있어야 하는 걸까? 보호자의 출입이 제한된 중환자실에서는 간호사와 의사 등 전문가들이 환자를 돌본다. 상태가 호전되어 일반병동으로 온 환자라면 더욱이 보호자가 종일 상주할 필요가 없다.
내가 머문 병원은 보호자가 24시간 상주할 것을 요구했다. 보호자가 하는 일은 대부분 환자와 함께 있거나 뒤따라 다니며 감시하는 일이다. 엄마는 20년 전 간호조무사로 일했다. 그때만 하더라도 보호자가 환자 옆에 종일 붙어있는 경우는 거의 없었고 간이침대도 없었다고 한다.
치료과정의 일부를 가족들에게 분담시키고 있다
게다가 보호자는 환자를 돌보는 일에 미숙하다. 전문가가 손쉽게 할 수 있는 간단한 일을 보호자에게 맡기면 실수하기도 한다. 사소한 일이라도 전문 의료인이 해야 할 일을 보호자에게 맡기는 건 위험하다. 만일의 사고에 대비해 의료 전문가가 환자를 돌보는 것이 안전하며 효율적이다.
의료 인력이 늘면 간병인 없이도 환자를 돌볼 수 있다. 정부는 메르스의 원인으로 지목된 가족 간병 문화를 개선하기 위해 포괄간호서비스를 확대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포괄간호서비스란 간병인이나 가족 대신 간호사와 간호조무사가 24시간 환자를 돌보는 것을 말한다. 이 사업이 정착되면 따로 간병인을 고용할 필요도 없고, 보호자가 환자를 돌보지 않아도 된다.
언젠가부터 가족간병인이 병원에 상주하는 게 자연스러운 현상이 되었다. 가족도 없고 간병인을 구할 돈도 없는 사람들에겐 여간 부담스러운 일이 아니다. 며칠을 병원에 있다 보면 간병인 또한 반 환자가 된다. 나는 가족이자 간병인으로 지내면서, 병원이 치료과정의 일부인 ‘돌봄’을 가족에게 분담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간호학대사전에 실린 정의에 따르면 간병은 ‘질병이나 장애등으로 일상생활에 지장이 있는 경우, 기동의 보조나 신변을 돌보는 행위’다. 간호는 ‘개인, 가정, 지역사회를 대상으로 건강의 회복, 질병예방, 건강유지와 증진에 필요한 지식, 기력, 의지와 자원을 갖추도록 직접 도와주는 활동’이다.
병원에서 환자를 보살피는 일은 간병이 아니라 간호다. 의료 전문가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