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운서: 올해도 어김없이 민족의 큰 명절 추석 연휴가 찾아왔습니다. 기차역과 버스 터미널, 도로 위까지 귀성을 준비하는 사람들로 북적이는데요. 임예인 기자가 올 추석 귀성 풍경을 전합니다.
기자: 한산했던 버스 터미널이 버스표를 끊는 인파로 북적입니다. 벌써부터 도로가 얼마나 막힐지 걱정이 태산입니다. 회사 안 나간다고 퍼먹은 술이 아직도 안 깨 연신 하품입니다. 빨리 표 끊어야 하는데 앞 사람이 어버버하면 열블이 납니다. 차 타기 전에 화장실은 한 번 들러야 하는데 여자 화장실은 줄이 화장실 밖까지 이어져 있습니다. 짜증납니다.
고사리손으로 엄마 아빠 손을 꼭 잡고 있는 아이들은 할머니 할아버지를 만날 생각에 벌써부터 설렙니다. 얼굴도 잘 모르는 친척들이 학교 성적은 어떠냐 운운하며 귀찮게 구는 건 짜증나지만 일 년에 두 번뿐인 대목이기 때문에 놓칠 수 없습니다. 친척집을 순회하며 용돈벌이에 나서야 하기 때문입니다. 고작 오천 원 만 원 쥐어주는 집은 시간낭비다 싶은데 엄마 아빠가 억지로 끌고 갑니다.
오랜만에 고향을 찾는 직장인은 양 손 가득 회사에서 뿌린 싸구려 식용유 햄 세트를 들고 버스를 기다립니다. 취업하기 전까진 엄마친구아들은 어디 취직했다더라 하는 소리에 시달렸는데 취직한지 얼마나 됐다고 이젠 참한 아가씨가 있다 언제 결혼을 할 거냐 온갖 오지랖에 시달립니다. 왕래 한 번 없던 친척들이 부리는 오지랖에 부모님 얼굴 봐서 도망칠 수도 없고 아주 죽겠습니다. 맘 같아선 나가서 술이나 먹고 싶습니다.
남자는 오지랖만 괴롭지 여자는 이건 쉬는 게 쉬는 게 아닙니다. 큰 아버지란 인간이 자긴 손 하나 까딱 안 할 거면서 차례는 지켜야 한다느니 젊은이들이 전통을 모른다느니 하는데 입에 제기 물려버리고 싶습니다. 그냥 시장에서 대충 사다 하자 하니 그러면 안 된다고 일갈을 하셨다던데 제삿상에 패드립이나 얹어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남자들은 모여서 씨름 보고 앉았는데 일하다 힘들어서 아육대라도 볼까 좀 틀어놓으면 귀신같이 다시 씨름으로 바꿉니다. 죄다 안다리 걸어버리고 싶습니다.
고속도로는 그래도 십 년 전에 비하면 많이 쾌적합니다. 많이 쾌적해서 평소에 두 시간 걸리던 거리 다섯 시간이면 갑니다. 막히는 도로에 마음까지 갑갑한데 집에서 전화 와선 왜 이렇게 안오냐고 몇 번을 물어봅니다. 마음이 절로 무거워집니다. 며칠 되지도 않는 연휴에 부모 친지 순회를 돌아야 합니다. 결혼 십년 차이지만 여전히 이놈의 차례음식은 왜 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전 부치느라 힘들어 죽겠는데 조카가 나타나 모양이 이상하다느니 맛이 없다느니 깐죽댑니다. 때리고 싶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친척들과 윷놀이 제기차기 전통 놀이의 즐거움에 빠지긴 개뿔 롤이나 하고 싶습니다. 모르는 사이면 패드립이라도 치지 이건 재롱잔치도 아니고 아주 죽겠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이런 걸 하고 놀았다니 정말 끔찍한 시대였던 모양입니다.
제일 부러운 건 귀성 안 하는 사람들입니다. 심지어 출근하는 사람들도 부럽습니다. 김 대리는 미혼이라고 추석 연휴 근무를 자청했답니다. 난 왜 결혼을 해서 이 고생인지 모르겠습니다. 안 내려가면 안 되나 싶다가도, 심지어 이효리가 남편이랑 추석 샌다는 기사에 네티즌들이 시부모는 잘 모시냐며 오지랖 부리던 걸 보면 미친 짓이지 싶습니다. 친척들이 얼마나 씹어댈지 눈에 선합니다. 결혼 제도란 게 없어져버렸으면 좋겠습니다.
구라빨 쩌는 TV 뉴스 대신 기분도 우울한데 도로마저 꽉꽉 막히는 추석 연휴 첫날 진짜 귀성 풍경을 전해드렸습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같지만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원문: 임예인의 새벽 내리는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