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이 밝히지 않아도 아실 일이다. 나는 30여 년째 중등학교에서 아이들에게 문학을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을 빼면 오늘의 한국문학이나 문단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무명의 독자다. 20대의 한때 문학청년이었다는 것도 따로 내세울 게 없는 게 그 무렵의 젊은이들 중에 문청이 좀 많았는가 말이다.
가뭄에 콩 나듯 연간 두어 차례 시집을 사는 게 고작이고 소설 쪽은 그보다 훨씬 성글게 만나는 형편이니 ‘독자’라도 그리 성실한 축에는 끼지 못한다. 그러나 한때 문청으로 그쪽 판을 기웃거려 본 전력에 기대어 겉으로는 아니라고 하면서도 우리 문단에 대해서 알 만큼은 안다고 믿고 있는 구석도 있다.
독자들의 ‘상식’과 ‘믿는 구석’
이 ‘구석’이 책임질 필요 따위는 전혀 없는 사적 모임에서 비평적 안목과는 무관하게 개인적 취향에 따라 작가와 작품을 혹평하거나 우리 문학과 문단에 대해서 이런저런 사적 평가를 내리는 기반이다. 모르긴 해도 아마 우리 문학의 독자들 중 상당수가 이런 ‘구석’을 저마다 하나씩 갖고 있을 터이다.
표절 여부에 대해 ‘전문가’들이 ‘문자적 유사성’ 따위의 모호한 언어로 아무리 포장을 해도 그걸 표절이라고 명확히 단언할 수 있는 것은 우리들 독자가 가진, 말 그대로의 ‘상식’ 덕분이다. 전문가들은 ‘의식적’이냐 아니냐를 두고도 다투지만 독자의 상식으로 그걸 판별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무의식’이라 해서 그게 갑자기 독자의 책임으로 바뀌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말이다.
‘문단 권력’ 운운하는 부분도 독자들은 바로 알아들었다. 실제로 문단의 권력 구조 따위에 생소할 수밖에 없는 일반 독자들이 변죽만 울린 ‘문단 권력’ 이야기를 재깍 새겨들은 것은 나름의 깜냥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저것을 모두 헤쳐모여 형식으로 나눌 수는 없어도 우리 문학판이 보여주는 일련의 현상에서 느껴온 감이 있는 것이다.
표절 사태는 제2라운드로 접어든 듯하다. 이응준 작가의 폭로 이후, 고조된 비판에 대해 창비 쪽이 어정쩡한 답변으로 몰매를 맞은 게 1라운드다. 최근 출간된 <창작과비평> 가을호를 통해 편집주간이 해명하고, 편집인인 백낙청 교수가 이를 지지한다는 의견을 페이스북에 올리면서 2라운드가 열렸다.
표절 사태의 2라운드
백낙청은 “문자적 유사성을 발견했으나 의도적인 베껴 쓰기로 단정할 수 없다”는 백영서 편집주간의 의견을 지지하면서 “신경숙 매장 움직임에 동참할 수 없다”는 완강한 입장을 드러냈다. 이 일련의 사태가 70년대 이래 진보문학, 민족문학 진영을 대표해 왔던 노학자의 심기를 꽤나 불편하게 한 모양이다.
여전히 우리 문단의 주류라 할 수 있는 모모한 인사들은 침묵하고 있다. 1라운드부터 용감하게 창비를 비판했던 이들이 이에 대해 절망적 심정을 드러냈을 뿐이다. 그래서 ‘그는 이미 너무 멀리 가 버렸다’는 김명인과 ‘한 시대가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오길영의 비탄이 외롭게 들리는 것이다.
창비와 함께 문단권력으로 지목받은 <문학동네>에서 신경숙의 표절을 인정하고 ‘독자들이 분노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의견을 밝힌 것은 다소 뜻밖의 상황 전개다. <문학동네> 가을호에서 비평, 표절, 권력을 다룬 특집을 마련하고 출판사의 인적 쇄신 가능성을 내비치는 것도 창비와 차별적인 스탠스다.
어저께 창비 주간을 역임한 이시영 한국작가회의 이사장이 신경숙 표절 사태에 대한 창비의 대응을 비판하고 나선 것은 일종의 번외 경기 같다. 그는 ‘전설’의 부분 표절은 인정하되 그것이 신경숙 문학 전반에 대한 평가절하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는 다소 절충적인 태도를 드러냈다.
나는 <창작과비평> 대신 <실천문학> 가을호를 사서 읽었다. 이번 호는 ‘표절과 문학권력, 대안’을 중심으로 한 특집이 336쪽짜리 잡지를 채우고 있었다. 정작 이번 표절 사태의 당사자인 창비나 문학동네보다 후발 잡지인 <실천문학>이 이 문제에 주력하는 것도 특이하다.
<실천문학> 가을호는 젊은 작가 좌담회(‘한국문학의 폐쇄성을 넘어서’), 문학기자 좌담회(문단 외부에서 본 신경숙 표절논란과 문화 권력 논쟁)에 이어 두 개의 특집(1. 한국문학, 위기와 활로, 2. 문화생산의 구조 변동과 새로운 예술의 가능성)을 실으면서 이번 사태를 집중 분석하고 있다.
순서 없이 이것저것을 가리지 않고 읽고 난 소감은 막연하게 느끼던 생각이나 심증이 사실과 가까울 수 있다는 일종의 개안 비슷한 경험이다. 한국문학의 독자들은 베스트셀러나 문제작에 유난히 민감하지만 정작 한국문학이 맞닥뜨린 위기와는 무관한 소비자에 불과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아니 할 수 없는.
<실천문학> 가을호의 접근
다음은 <실천문학> 가을호에 수록된 글에서 드러난 내용을 출처나 저자를 일일이 명시하지 않고 거칠게 소개하고 이에 대한 소감을 끄적거린 것이다.
한국문학은 출판사와 문예지를 중심으로 하는 문단 내지 출판 권력이라는 특유의 폐쇄성을 갖고 있다. 그 막힌 중심에 공모전(문학상)이 있고 이는 결국 대형 출판사가 시장 지배력을 유지하기 위해 작가들에게 휘두르는 도구가 되었다. 일부 작가들이 공모전의 폐지를 주장하는 까닭이다.
도스토옙스키의 미발표 유고가 번역되어 익명의 한국 작가 이름으로 발표되어도 가치를 알아볼 수 있는 문인이 단 한 명도 없을 거라는 극단적인 의견(소설가 손아람)을 내세우는 까닭도 공모전이 문학을 왜곡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문학상을 중심으로 출판시장이 형성되다 보니 한국문학의 장편 창작 수준에 비해 너무 많은 상이 운영된다. 이는 결국 신인의 배출로 이어져 작가의 과잉공급을 초래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문학상은 한편으로 비평의 문제로 이어지며 출판 권력으로 전화된다.
이처럼 문학상과 출판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에서 비평은 극찬과 상찬을 거듭하고 결과적으로 독자들에게는 납득하기 어려운 비평으로 전락해 버린다. 문학권력이 사실상 독자를 무시하고 있다고 보는 것은 이 때문이다.
최근 1~2년간 <창작과비평>이나 <문학동네>의 지면을 얻거나 서평을 받은 작가는 창비는 20명 중 16명이, 문학동네는 30명 중 28명이 해당 출판사에서 책을 냈거나 공모전에 당선했거나, 출간했거나 출간 예정인 작가였다고 한다. 이는 문예지가 작가 관리의 도구로 쓰이고 있다는 증거로 넉넉해 보인다.
문학상도 넘친다. 일례로 <문학동네>가 운영하는 문학상은 총 7개고, 창비가 운영하는 문학상은 모두 10개다. 미출간 원고를 대상(문학동네)으로 한다거나 기출간 도서를 대상으로 한다(창비)는 차이점을 떠나 이는 문단 권력으로서의 양사의 권위와 영향력을 실증하는 예다.
젊은 작가들의 좌담과 개별 기고자들의 원고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한국문학의 ‘독점구조’와 ‘대중적 소통불능’이 한계에 이르렀다는 사실의 지적이다. “문학책을 출간하는 회사가 문학잡지를 발간하면서 담론의 생산까지 함께 수행하는 기이한 방식”(서영인, 아래 같음.), ‘판매와 평가를 함께 수행하는 이 위험한 구조’가 한국문학의 현실이다.
<문학동네>가 ‘문단의 신인들을 독점’하고 <창작과비평>이 ‘전통과 권위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작가들의 문학적 가치를 분점하는 가운데 한국문학의 독점 현상은 심화되는 것이다. 이 점이 신경숙 표절 사태와 함께 환기된 문학권력의 현실이고, 문제다. 그것은 또 한국문학이 ‘골방문학’, 또는 ‘자기들만의 리그’로 불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독점구조의 한가운데에 그 독점 이익과 권위를 누려온 창비가 있다. 백낙청과 그의 가족인 대주주의 ‘주식회사 창비’가 ‘권력의 폭압 속에서 염결하게 지켜온 문학의 위엄’을 ‘대중성, 통속성, 상업성과 맞바꿔 독자들에게 자신의 과거 이력에 기대어 문학이라고 팔았다’(정문순)는 문제제기를 나무랄 수 없는 이유다.
신경숙 표절 사태는 이러한 상황적 요인에서 배태된 사고다. 이미 10년도 전에 제기되었으나 묻히고 무시되었다가 드러난 이 사태 앞에서 소수의 비주류 문인들만이 외롭게 대응하고 있는 것은 여전히 공고한 문학 권력의 구조를 증빙하고도 남는다.
이 닫힌 문단의 폐쇄성에 균열을 일으킨 것은 상호 막힘없이 뚫린 사회적 관계망 서비스(SNS)다. 덕분에 15년 전의 그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이 사태는 전개되고 있는데, 칼자루를 쥔 쪽에게 해결이 맡겨진 형국이라 독자들은 그 귀추를 기다리는 게 고작이다. 결국 여전히 독자는 ‘을’의 자리를 벗어나기 어려운 것이다.
창비의 독점구조와 김사인의 ‘만해문학상 사절’
표절 사태로 드러난 것은 수백만 부의 베스트셀러가 떠받치고 있는 듯하지만 기실 내부적으로는 독자를 잃으면서 지리멸렬해지고 있는 한국문학 위기의 확인이다. 그게 ‘대중적 글쓰기를 예술로 포장하여 양두구육 행위를 일삼은 문단이 재생산의 한계에 이르렀음을 나타내는 징후’(정문순)이든, 소통 없는 한국문학의 폐쇄성의 확인이든 간에 말이다.
위기를 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모두가 아는 일이니 굳이 부연할 일은 없다. 일찍이 1917년에 춘원 이광수의 장편소설 ‘무정’으로부터 비롯된 한국문학 100년의 역사가 여러 시대적 변화에 조응하면서 이룩해 온 성찰의 시간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리는 것으로도 족하지 않을까.
사태의 당사자들이 드문드문 떼는 입을 바라보면서 간신히 유지되는 이 사태의 진전을 바라보는 독자들은 문학시장의 판을 끌어올린 당사자면서도 여전히 변방을 서성거리는 게 고작이다. 어제 일부 언론에 실린 기사 한 편이 독자들의 눈길을 끈 것도 그 때문이다.
시인 김사인이 창비에서 운영하는 ‘만해문학상’ 수상을 사양했다는 뉴스다. 김사인이 밝힌 수상 사양 이유는 세 가지다. 그는 예심에 해당하는 시 분야 추천과정에 관여했고 비상임이지만 창비 편집위원 명단에 이름이 올라 있고 시집 간행 업무에 참여하고 있어 ‘상 주관사와의 업무 관련성이 낮다 할 수 없는 처지’라고 밝힌 것이다.
만해문학상 심사위원회(편집인 백낙청, 비평가 염무웅, 시인 이시영, 소설가 공선옥)는 그 뜻을 존중하여 ‘수상자 없음’의 결정을 내렸다고 한다. 이번 수상 대상작이었던 김사인의 시집 <어린 당나귀 곁에서> 역시 창비에서 발행한 시집이다.
유명 문예지의 편집위원인 시인이 그 문예지를 내는 출판사에서 시집을 내고, 그 시집이 그 잡지에서 운영하는 문학상의 수상자로 선정되었던 것이다. 만해문학상의 권위나 시인의 수상 자격을 의심해서가 아니다. 시인의 사양과는 무관하게 그 상의 유통 경로에 머리를 갸웃했던 독자들은 아마 머리를 주억거릴 것이다. 막연하게 인식되었던 이른바 ‘독점구조’나 ‘폐쇄성’의 정체가 구체적 실체라는 걸 확인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원문: 이 풍진 세상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