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삼성의 디자인은 왜 이렇게 구린가?’라는 칼럼이 나왔었다. 직설적이고 풍자가 가득한 글을 정말 재밌게 읽었는데, T times에서 번역글이 올라왔다.
그런데 실제 원문과 다르게 엄청나게 순화(?)된 표현에 놀라고 말았다.
먼저 [원문]을 보자
삼성 디자인이 구린 이유를 설명하겠음.
(1) 문화가 제품이다
제품력은 문화에서 나옴. 일단 문화가 구림. 관료적임. 윗사람들은 자신들의 영업성과만 생각하기 때문에 같은 제품을 여러 가지로 라인업 함. 정말 멋진 디자인을 만들고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음. 이게 애플과의 결정적 차이.
(2) 카우보이 흉내 내기(서구에서는 비아냥 거리는 투로 사용)
카우보이 흉내 내는 디자인을 많이 만들어냄. 만들지도 못하는데 멋진 컨셉 디자인만 그림. 이것도 결국엔 1번의 문화적인 특성 때문에 생겨난 것. 회의 시간에 하는 일이라곤 서로의 권위를 확인하는 것뿐인데 여기서 어떻게 성공적인 디자인이 나옴?
(3) 변화 없음
앞으로 당분간 삼성에 변화를 기대하기 힘듦. 왜냐, 서구의 비판에 그들은 ‘우리의 유교문화를 존중해달라’는 말만 하고 있으니까.
이것을 어떻게 번역했는지 [번역글]을 보자
제목이 ‘삼성 디자인이 구린 이유’ 정도의 뉘앙스에서 ‘삼성은 왜 디자인에 약한가’로 바뀜.
(1) 삼성의 라인업
한두 가지에 집중하지 못하고 라인업만 많음.
(2) 비현실적 디자인
디자인 에이전시들이 멋지지만 비현실적인 디자인만 가지고 온다.
(3) 문화적 문제
삼성은 디자이너 위에 군림하려고 하는데 서구는 디자이너들로부터 배우려고 함. 이런 문화의 차이 때문.
번역글을 본 소감
이건 정말 멘붕ㅋ 완전히 다른 글이라고 볼 수 있다. 게다가 제목도 원문에선 심지어 삼성 디자인에서 ‘악취가 난다’ 라고 하고 있다. 왜 이렇게 다른 글이 나오게 됐을까? 나는 이 현상 자체가 문제라고 본다.
원문은 단순히 ‘삼성’만의 문제를 지적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 사회에 뿌리박힌 군대식 권위주의, 꼰대 정신을 비판하는 것이다. (유교문화 라고 미화시키고 있는…) 그러나 일처리의 비효율/비합리는 유교문화라고 해서 딱히 생겨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천민자본주의’에 근본을 두고 있는 윗분들의 부패와 탐욕에서 기인하는 게 더 크다.
번역글은 정말 어이없게 원문의 뉘앙스를 왜곡하고 있다. 근본적인 문제를 지적하기보다 마치 삼성의 전략적 선택이 잘못된 탓인 것처럼 읽히게 한다. 디자인 에이전시의 문제도 그 현상이 일어난 원인에 대한 이야기는 온데간데없고 디자인 에이전시가 무능해서인 듯한 말로 둔갑시켜 놓았고, 문화적인 문제는 ‘삼성’이기 때문에 디자이너들 위에 군림하려고 한다는 투로 읽힌다.
삼성이든 디자인 에이전시든 언론사든 우리나라 어디에도 ‘디자인과 혁신’이라는 단어와 어울리는 문화적 토대가 전혀 없다는 것이 핵심이다. T times에서 컨텐츠 편집장은 무엇이 두려워 삼성 눈치를 보고 교묘하게 원문을 왜곡한 것일까?
원문: 권현준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