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도 날 막을 수 없어. 네놈이건, 연합이건, 프로토스건, 그 누구도! 코프룰루를 가질 수 없다면 차라리 잿더미로 만들어 버릴 테다… – 아크튜러스 멩스크
유시민의 정계은퇴 선언을 들었을 때, 필자는 의외로 무덤덤한 기분이었다. 필자가 뭐, 미래를 내다보았다 그런 것은 아니고, 이미 유시민은 정치생명이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이미 정치생명이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그걸 공식적으로 선언한다고 대체 뭐가 달라지겠나. 한때 필자는 <은하영웅전설>의 욥 트뤼니히트에 빗대어 유 시미니히트라는 별명까지 붙였을 정도로 그를 싫어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글쎄, 이미 정치 생명이 끝나버린 사람에게 더 화를 내봤자 무엇하겠는가. 이제는 별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다.
어쨌건, 한때 그의 열혈 안티(…)였기 때문인지 필자에게 유시민의 삶과 역사를 비평하는 글을 써보라는 청탁이 들어왔다. 그의 삶이나 역사는 필자가 다루기에는 너무 거창한 주제이다. 유시민을 전설로 만들어 준 항소이유서 같은 것을 평할 능력은 없지만, 정치덕후로서 유시민의 정치 역정 후반부를 담담하게 조명해 볼 생각이다. 물론 필자는 전문 언론인이 아니기에, 주례사 비평이나 입에 발린 칭찬보다는 유시민 안티로서의 역할에 충실하기로 했다.
그렇다면 그의 11년 정치 역정의 후반부를 어디서부터 잡는 것이 좋을까? 일단은 2007년의 17대 대선 직후, 통합신당 탈당과 대구 출마 선언부터 잡고 싶다. 참여정부도 열린우리당도 몰락했고, 유시민 또한 수도권의 고양 덕양갑 지역구를 떠나 대구 수성을에 출마했던 그 시기 말이다. 개혁국민정당과 열린우리당, 열린우리당의 내전과 이합집산 과정에서의 행적에 대해서도 할 말은 많지만. 일단은 그의 정치 역정 후반부, 몰락에서 부활하기까지, 그리고 다시 몰락하는 과정에 집중하고 싶다.
1. 영남지역 출마와 낙선, 노무현의 자살까지
유시민이 고양 덕양을 버리고 대구 수성에 출마한 것은, 종로를 버리고 부산에 출마한 노무현의 행보를 따라한 것이라는 사실은 다들 짐작하실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총선에서 유시민에 대한 대구의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대선 직후 총선까지는 4개월이 좀 넘는 시간이 있었을 뿐이나, 유시민의 득표율은 32%를 기록했다. 이는 탄핵 역풍의 17대 총선에서 열린우리당 윤덕홍 후보가 기록했던 것보다 12% 가량 높은 득표율이다.
총선 기간 동안 유시민은 ‘대구 남자’ 슬로건으로 지역 연고를 강조했고, 지역 밀착형 선거운동을 펼쳤다. 그는 선거 연설에서 지역 연고와 의리를 강조했으며, 낙선하면 서울 갈 것이라는 말에 떨어져도 고향에 대한 의리를 끝까지 지키겠다고 말했다. 비가 옴에도 우산을 쓴 채로 낙선 사례를 하는 모습이 인터넷 동영상으로 퍼져 좋은 반응을 얻어내기도 했다. 유시민은 이미지 변신에 어느 정도는 성공한 듯 보였다.
어쨌건 낙선은 낙선이었고, 약속도 약속이었다. 유시민은 경북대 2학기부터 ‘생활과 경제’라는 과목을 강의하기 시작했고, 이 강의의 정원 400명은 당시 경북대 2학기에 개설된 교과목 중 제일 많은 인원이었다. 당시 그는 “지난 총선에서 낙선공약을 통해 떨어지면 대학에서 강의하겠다고 말한 것을 지키게 돼 다행”이라고 말했으며, 정치와는 무관한 강의라고 선을 그었다.
반년 후인 2009년 초, 유시민은 정치 에세이 <후불제 민주주의>를 출간했고, 이 책은 1년 전의 촛불시위 여파와 함께 날개 돋친 듯이 팔려나갔다. 이 책에 대해 학문적 입장에서 상당한 비판이 있으나, 그건 이 글에서 다룰 주제는 아니니 생략하겠다. 아무튼. 당시 인터뷰에서 그는 자신을 정치인보다는 ‘지식 소매상’으로 정의했으며, 정치에는 뜻이 없음을 분명히 했었다. 여기까지는 좋았지만, 곧 폭풍이 밀려왔다. <후불제 민주주의> 출간 이후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4월 7일, 노무현 전 대통령이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에게 돈을 받았다고 시인했다. 그리고 2009년 5월 23일, 노무현 전 대통령이 부엉이 바위에서 투신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당시의 서거 정국에서 유시민은 스타로 떠올랐다. 봉하마을과 서울역 빈소를 지키는 그의 모습이 언론을 통해 널리 퍼졌고 국민장 이후의 대선후보 여론조사에서는 박근혜 다음으로 2위, 야권 대선주자 중에서는 1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지방선거 서울시장 여론조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노무현의 죽음은 친노에게는 불행이기도 했지만 기회이기도 했다. 바야흐로 친노가 폐족에서 부활하는 순간이었고, 유시민은 그 선두에 서 있었다.
노무현 추모 열기와 이명박 정부의 실정으로 인해 야권이 2009년 후반기 재보선에서 승리했으나, 유시민의 행보는 조심스러웠다. 과거 개혁당의 실패 기억 때문이었을까? 원외 친노계 일부가 ‘국민참여정당’, 훗날의 국민참여당(이하 참여당) 창당을 준비했고, 이것이 사실상 유시민의 개인 정당이었음이 나중에 드러나지만 유시민의 입당은 늦은 편이었다. 그는 “언젠가 함께 할 날이 올 것”이라는 너스레도 떨어주셨다.
결국은 입당했지만. 입당하면서도 그는 민주당과 진보정당들에 대한 비판과 비난어그로를 잊지 않았다. 민주당에는 꿈을 가진 정당이 가진 이상의 향기가 없고, 진보정당들은 국민을 위한 정치보다는 자기 자신의 신념을 위한 정치를 한다는 식이었다. 그렇다면 유시민과 국민참여당은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균형을 찾았다는 말일까? 뭐 이후 벌어지는 일들을 보면 그랬을 것 같지는 않다. 참여당 창당대회 당시 대리트윗 의혹 같은 작은 해프닝도 있었지만 그에게는 좋은 시절이었다.
2. 국민참여당 창당과 잡음, 그리고 경기도지사 낙선과 김해 패배의 주역
사귀는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의 됨됨이를 알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국민참여당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사람들 중에선 이상한 사람들이 몇 있었다. 참여정부 청와대 대변인 출신으로 국민참여당의 창당 주역이자, 이후 은평을 재보선과 총선에 출마했던 천호선은 삼성 특검 정국 당시 검찰의 편을 들어주며 특검에 회의적인 입장을 보인 적이 있다. 참고로 이러시던 분이 2년 후의 참평포럼에서는 언소주가 조중동 재벌 ‘삼성’을 긴장시키는 현상을 높이 평가하셨으니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 다음, 이백만 전 청와대 홍보수석도 참 모를 분이시다. 이 분은 청와대 시절 강남 아파트를 두 채나 보유했다는 것이 드러나 논란이 되었는데 이때 이 수석님의 해명은, 그 강남 아파트들이 투기용이 아닌 순전히 주거용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방선거와 총선 출마는 도봉구에서 하셨다. 그러니까 주거는 강남에서 하시지만 출마는 도봉에서 하신다는 것인지? 아니면 설마 그 아파트들이 정말로 투ㄱㅣ… 쿨럭쿨럭. 혹은, 비리 혐의자이고 잦은 탈당 및 입당, 무소속 출마 행보로 구설수에 올랐던 송병태 전 광산구청장이 입당해서 지방선거에 출마한다는 것이 논란이 되기도 했다.
아무튼, 지방선거 정국이 시작되었다. 유시민이 서울시장으로 갈 것이란 예측도 있었고, 대구를 계속 지키지 않겠느냐는 이야기도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예측을 뒤엎고 유시민은 경기도지사 출마로 선회했다. 같은 친노 인사인 한명숙 전 총리와의 경쟁이 부담스럽다는 것은 유시민 본인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대구의 야권 지지자들이 느낀 배신감이나, 2년 후 김부겸이 대구에서 맞닥뜨려야 했던 ‘유시민 학습효과’ 등은 뭐 그렇다고 치더라도, 유시민 본인의 해명도 썩 만족스러운 수준은 아니었다. 대구와의 인연을 소중히 여기겠다고 했지, 뼈를 묻겠다고는 안 했다, 약속대로 대학 강의도 1년 간 하지 않았느냐 이런 식이었지.
이 때 유시민의 변신은 그의 정치 역정에서 제일 극적인 순간이었다. 옛 민주당의 분당을 부추기고 (링크), 반한나라당 연합을 부정하고 (링크), 민노당보다는 한나라당이 낫다고 외치던 (링크), 유시민이 갑자기 반이명박 야권연대의 전도사가 된 것이었다. 루저가 되지 말고, 연대해서 위너가 되자 (링크), 그런 식의 논리였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민주당의 경기도지사 후보 김진표를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김문수 도지사와 다를 것이 없다고 공격하기도 했다. 흐음, 그런데 김진표는 노무현 정부에서 경제부총리와 교육부총리를 지냈고, 유시민이 부추긴 분당으로 만들어진 열린우리당에서 공천 받아 국회의원이 된 사람이다. 유시민이 신경 쓸 일은 아니겠지만.
아무튼, 지방선거의 경기도지사 단일후보는 결국 유시민으로 결정이 났다, 8000명 당원의 국민참여당이 30만명 당원의 민주당을 이겼다 하여 화제가 되었다. 지지율은 상승했고, 선거 자금을 모으기 위해 만든 유시민 펀드는 40억원이 넘는 돈을 모금했다. 선거 유세 때마다 젊은층이 몰려들었으니, 당시 유시민의 인기는 현재의 안철수가 부럽잖은 수준이었다. 투표일 직전에는 진보신당의 도지사 후보였던 심상정이 사퇴하여 유시민에게 힘을 실어주기까지 했으나… 유시민은 위너가 되지 못했다. 경기도의회와 기초의회는 민주당의 압승이었으나, 유시민은 간발의 차이로 김문수에게 패배했다.
일단은 유시민이 대선후보 여론조사에서 야권 1위를 유지하고는 있었고, 한겨레의 ‘놈현 관장사’ 논란 때 한겨레 절독까지 대놓고 거론했던 것처럼 친노 진영의 대표 주자 이미지 또한 유지하고 있었다. 민주당 또한 지방선거 직후 치러진 재보선에서 패배하면서 기세가 꺾인 상태라 유시민을 압도할 수 없었다.
하지만 양측 모두 출구가 필요했고, 2011년 초의 재보선에 사활을 걸었다는 점에서는 같았다. 그리고 당연히 충돌이 벌어졌다. 발단은 김해을 재보선의 단일화 방식이었다. 노무현의 고향이자 무덤이 있는 김해을 지역구는, 노무현의 후계자를 자처하는 민주당과 참여당 양당 모두에게 물러설 수 없는 곳이었다. 시민사회가 나서서 중재했음에도, 유시민은 자신에게 유리한 방식만을 고집했으며 거의 폭언에 가까운 말까지 쏟아냈다.
“죽든 살든 정당끼리 책임지겠다고 했어요. 정치 잘 모르는 시민단체는 빠져라, 그 식이었죠. 막판에는 핏발 선 눈으로 단일화가 안 돼도 좋다 그랬죠. 깜짝 놀랐는데, 결국 이거죠, 뭐. 6·2 지방선거 때처럼 정당끼리 막판 단일화할 테니 능력 없는 시민단체는 빠져라.”
결국은 양보가 이루어졌고, 참여당은 기어이 김해을의 단일후보 자리를 차지하는데 성공했다. 문제는 선거 운동이 썩 잘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애초에 무명의 후보 자체가 마이너스 요인이었으며, 외부 자원봉사자 위주, 후보보다 유시민이 전면에 나섰던 선거 운동이 김해 유권자들의 반감을 불러왔다. 심지어는 인터넷을 통한 홍보와 선거 운동에도 소극적이었다는 증언까지 나왔다.
특히 ‘투표 안 하면 집니다’는 식의 선거운동은, 2년 후의 대선에서 투표율이 높으면 이긴다는 문재인 캠프의 선전을 연상케 했다. 분당을에서 손학규가 생환한데다 강원도지사 선거 또한 승리로 이끈 민주당과, 김해을 단일후보를 차지했음에도 패배한 유시민과 국민참여당. 둘의 희비가 엇갈리는 순간이었다. 당시 한겨레가 칼럼과 사설로 유시민의 아픈 상처를 찌름으로서, 과거의 치욕을 갚은 것은 덤이라 하겠다.
3. 통합진보당 창당과 경기동부 사태로 인한 진보의 몰락까지
그나마 유시민에게는 새로 출간한 <국가란 무엇인가>가 잘 팔리는 것이 위안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손학규가 야권주자 1위로 떠오르고, 김해을에서 중재를 맡았던 문재인이 부상하기 시작했다. 유시민은 새로운 출구를 찾으려 했고, 그것이 후에 잘못된 만남으로 판명될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앞서 유시민의 이상한 동료들에 대해 소개한 적이 있다. 이번에 등장할 그의 동료는 그보다도 더 이상한 인연이라고 할 수 있다. 2011년 상반기 재보선이 끝나자마자, 참여당과 민주노동당(이하 민노당)의 통합설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한국 진보정당사의 흑역사로 남을 통합진보당의 시작이었다.
당시 민주노동당에서는 진보신당과의 재통합을 더 중요하게 보고 있었기 때문에, 유시민과 당시 민노당 대표였던 이정희의 접촉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게다가 유시민의 과거 행적이나 발언들을 보면, 참여당과 민노당의 접촉은 거의 적과의 동침 수준이었다. 하지만 이 적과의 동침은 너무 순조롭게 흘러갔다.
2011년 7월 14일에는 이정희와 유시민의 대담집 <미래의 진보>의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이는 열렬한 호응을 얻었고, 전국 순회 북콘서트 또한 성공적이었다. 한편으로, 유시민은 지방선거 이후 심상정과의 접촉도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진보신당이 민노당과의 통합안을 부결시키면서, 노회찬 심상정 조승수가 주도하는 통합파가 진보신당에서 탈당해 새진보통합연대를 만들었고, 결국 참여당, 민노당, 통합연대 이 셋이 합당하여 통합진보당(이하 통진당)이 탄생했다. 유시민에게 다시 한번 기회가 오는 듯 했다.
관악을 경선 부정 논란이 불거졌고, 과거 민주노동당을 분당까지 치닫게 했던 NL의 행태들을 생각해보면 피해자와 가해자는 명백했다. 그럼에도 유시민은 이정희를 비호했고, 오히려 민주당과 김희철 측을 가해자로 몰아붙였다. 물론 이는 진보신당 탈당파들도 마찬가지였으나. 결국 이정희가 아닌 이상규가 통진당 후보로 출마하는 식으로 봉합되었다. 김희철은 이에 불복해 무소속으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19대 총선에서 통진당은 기존의 7석을 13석으로 불렸으며, 정당 득표율 10.3%를 기록하여 18대 총선보다 4.6%를 더 득표했다. 민주당은 국회 다수당이 되는데에 실패했으나, 통합진보당, 그리고 유시민에게 이는 승리였다. 그의 구상대로 민노당, 참여당, 그리고 진보신당 일부를 합쳐 만든 통진당이 명실상부한 제3당으로 뛰어올랐다. 총선 기간 동안, 비례대표 경선에서도 부정 의혹이 불거지긴 했으나, 그것이 뒤에 어떤 파장을 불러일으킬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 짧은 순간이, 정치인 유시민에게는 마지막 호시절이었을 것이다.
그로부터 한 달도 지나지 않은 2012년 5월 2일 오전, 통진당 진상조사위의 비례대표 경선 논란에 대한 조사 결과가 발표되었다. 유시민과 진보신당 및 참여당 출신들은 당권파, 이른바 경기동부의 반대편에 서서 지도부와 비례대표 후보 전원의 총사퇴를 주장했으나, 이정희와 당권파 측의 반발과 사보타주에 맞닥트려야 했다. (링크)
당시 유시민은 공식적으로 비례대표 승계, 당대표 출마, 대선 출마 등을 모두 포기했다. 그는 분당은 없고 통진당이 자신의 마지막 정당이라 못 박았다. 사실상 통진당 개혁에 자신의 정치생명을 건 것이다. 그러나 그의 노력은 부질없이 끝났다.
12일에 열린 통진당 중앙위원회에서, 조준호 진상조사위원장이 머리채가 잡혀 폭행당하는 모습이 언론을 통해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그때 유시민은 멱살을 잡히는 수모까지 당했다. 비당권파 혹은 신당권파를 중심으로 한 혁신비대위가 출범했고, 강기갑 원내대표가 비대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이에 맞선 구당권파의 당원비대위가 출범하여 한 지붕 두 살림의 형국이 되어버렸다.
7월의 전당대회에서 신당권파의 지지를 얻은 강기갑 비대위원장이 신임 당대표로 선출되었으나, 신당권파가 추진했던 사퇴를 거부하는 구당권파 소속 비례대표 의원들에 대한 제명안이 부결되었다 통진당은 무너져내리고 있었고, 7월 말부터 (링크) 10월까지 (링크) 집단 탈당 러시가 이어졌다. 한편 구당권파가 유시민이 아메리카노 커피를 마시는 것을 문제삼는 해프닝도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문제도 있었다. 옛 참여당은 정치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지방선거 때의 유시민 펀드를 본뜬 참여당 펀드를 만들어서 모금했다. 이후 참여당이 민노당과 합당하여 통진당이 되면서, 참여당 펀드의 부채 또한 통진당으로 옮겨 갔는데, 통진당이 분당하게 되면서, 참여당 시절의 부채를 누가 갚느냐가 문제가 된 것이다. 참여당 펀드에 투자한 사람들이 통진당에 부채 상환을 요구하며 집단 소송을 냈는데,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아직 모르는 일이다. 일단 유시민의 입장은 통진당이 갚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4. 진보정의당의 창당, 그리고 예정된 은퇴
10월, 통진당 탈당파에 의해 진보정의당(이하 정의당)이 창당되었다. 하지만 유시민의 정치적 위상은 예전 같지 않았다. 유시민이 대전에서 정의당 창당 발기인 대회에 앞서 기자들과 간담회를 열려 했으나, 대부분의 기자들은 같은 시각 대전을 방문하는 안철수를 취재할 예정이었다. 그는 이미 잊혀진 사람이었다. 정의당의 대선 후보 또한, 유시민이 아닌 심상정이었다. 곧 중도사퇴했지만 말이다.
유시민은 거의 활동을 하지 않았다. 참여계 비례대표 후보 또한 경선 부정 혐의로 구속되었을 때도, 공식적인 해명보다는 트위터로 이미 조준호의 보고서에 나와있던 내용이라는 글을 올린 것이 전부였다. 정의당의 팟캐스트 ‘저공비행’을 녹음하고, 문재인의 대선 유세에 몇 번 얼굴을 비추는 것 외에는 외부적 활동이 전무하다시피 했다. 삼자 토론에서 그의 옛 동료이자 적수인 이정희가 박근혜를 몰아붙여 유명세를 탔을 때도, 유시민이 사람들의 눈에 띄는 일은 없었다.
대선 이후, 새해가 되었음에도 마찬가지였다. 야권의 대선 패배를 이유로 트위터도 한달 가량 쉬다가 돌아왔다. 트위터에 올린 소식도, 여름부터 썼던 책 <어떻게 죽을 것인가>가 거의 완성되었다는 것 정도가 다였다. 이 책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2013년 2월 18일, 유시민은 정계 은퇴를 밝히는 트윗을 트위터 계정에 올렸다.
유시민의 정치 인생 후반부를 평한다면, ‘변신’이 아닐까 싶다. 그는 끝없이 변신했다. 중앙정치인에서 대구의 지역 정치인으로, 지식 소매상에서 다시 정치인으로, 대구의 지역 정치인에서 다시 수도권 기반의 중앙 정치인으로, 친노 진영의 대표주자에서 노조와 농민 조직을 기반으로 한 진보적인 정치인으로. 08년부터 12년까지, 이 4년 동안 그는 끊임없이 변해왔다. 하지만 그의 변신은 모두 실패했고, 그는 끝내 잊혀지는 신세가 되었다.
그의 변신 중 제일 과감한 것이었던, 진보 정치인으로의 변신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뤄졌던 것일까? 정말로 과거 참여정부의 과오에 대해서 심각한 부채 의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과연…? 과거 진보 정당의 역사를 안다면, 민노당과의 합당이 독이 든 성배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는 과연 NL의 패권주의를 상대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일까? 참여계 또한 부정경선에 참여한 것처럼? 모를 일이다.
어떤 사람은 유시민을 사악하지만 어리숙했던 야심가로 평할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돈키호테와 같은 이상주의자로 평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그가 너무 과대평가되었다는 생각을 감출 수가 없다. 물론 생각은 개인의 자유이고, 필자는 그저 필자의 생각을 이야기할 따름이다.
어떤 역사적 인물을 평하는데 중요한 것은, 아마 그/그녀가 남긴 역사적인 유산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 시점에서 그가 한국 정치에서 남긴 유산은 무엇인가? 시들어가는 정의당 하나 뿐이다. 혹은 통진당에 남은 참여당 펀드 빚더미도 유산으로 칠 수 있겠지만. 이인제에 대한 김영삼의 평을 빌리면, 유시민은 지나가는 사람일 뿐이다. 혹은, 이미 지나간 사람이겠지.
사족.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유시민은 안철수에게 이런저런 조언을 늘어놓고 있다. 기사에 의하면, 이상주의와 도덕적 대의, 좋은 이미지만으로는 정치를 할 수 없으니 도덕적 이상과 현실의 욕망 모두를 이끌어야 한다는 것이 핵심인 것 같다. 유시민의 조언이 경험에서 나왔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리고 아마, 유시민도 도덕적 이상과 현실의 욕망이라는 쌍두마차를 성공적으로 모는 데는 실패했을 것이다. 곧 물러날 예정이신 가카의 유명한 한마디가 떠오르는 순간이다.
내가 해봐서 아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