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들어가면서
진정한 평등과 자유를 일궈내기 위한 사회 개혁과 개선에 있어서 방법적 회의에 절망하여 다른 방법을 모색한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제부터 설명할 사쿠 형제들의 자율/ 자유/ 이해의 단위 사회 개혁 시도는 그 방법론에 있어서 가장 극단적이고도 강렬한 방법을 택한 부류 였다는 점에서 소개할 가치가 있다 생각됩니다. 우선 그 첫번째 시도를 감행한 맏형, 이사쿠의 개혁 시도와 이야기를 서술하겠습니다. 말미에 이사쿠 개혁활동의 비판점과 한계, 그리고 기존 비판에 대한 생산적 해체를 통해 또다른 발전점을 모색하고 이후 이어질 슈사쿠, 키사쿠 형제의 행동 양태에 대한 분석틀을 마련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평등과 자유의 꿈
선행하는 기록인 ‘유작’은 고교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평소 학교 수위로 일하는 기층 대중인 이사쿠는 학교의 대부분을 이루는 학생 / 교사들이 소수인 수위(교직원)인 자신을 억압하고 멸시하는 것에 못견뎌 하여 결국 갈등구조를 타파하고 모두의 평등을 도모하기로 마음 먹지요.
여기서 이사쿠의 혜안이 드러납니다. 모두의 평등, 그것은 실질적인 동등성을 담보함으로써만 가능한 것이었지요. 나이와 직위에서 학교에 군림하는 교사와, 최대다수를 이루기에 피폐한 대중이라 스스로를 오인하지만 실제로는 역시 탄압자인 학생, 그리고 실질적인 최저 계층인 교직원. 이같은 억압적이고도 불평등한 교내 사회구조는 학교라는 특수성을 가진 조직의 근본에 기인하여 도저히 학내에 국한된 방식으로는 타파가 불가능합니다. 이에 이사쿠는 학내 구조에 국한된 사고에서 벗어나 보다 더 폭넓은 사고를 해내지요. 현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근원적 금기를 벗겨냄으로써 모두의 실질적 대등함을 이뤄 내는 것입니다.
물론 모두의 평등을 단번에 일으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무엇보다도 기 억압 구조에 포섭된 수백에 달하는 사람들을 단번에 각성시키는 것은, 한명뿐인 활동가에게는 불가능한 과제지요. 그래서 이사쿠 형님은 적절한 선에서 대표자를 선발하여 그들을 먼저 각성시키는 것을 선결 과업으로 선정했습니다. 바른 방법은 아니지만 실용적으로는 옳은 선택이지요.
이들 대표자가 대중 내에 적절한 대표성과 영향력을 갖고 있다면, 그리고 이들의 각성이 우선 전제된다면 전체 학생/교사 대중의 각성 또한 그다지 먼 일이 아니니까요. 하지만 각성이 점진적으로 이뤄진다면 이는 현실적으로 무용한 방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무래도 고교는, 3년이면 모든 학생 대중이 교체되는 특수한 구조이니까요.
여기서 이사쿠는 결단을 내립니다. 불용 교사를 학습의 장으로 마련하여 초기 충격요법을 통해 이들 대표자의 각성을 이뤄내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나름 좋은 시도라 할 수 있습니다. 자신에게 기 부여된 책무를 수행함에 있어 큰 무리가 없으면서도, 실질적인 변혁의 장을 마련할 수 있었으니까요. 이렇게 마련된 장에서 이사쿠가 학교 사회의 실질적 변혁을 일궈내기 위해 마련한 학습의 방법은 기존 사회 구조의 역전 경험과 심리적 근본 금기 타파입니다.
진정한 자유 및 공화주의를 이루고 헌법적 정의를 이룩하고 평등을 결단해 내기 위해서는 합리적이면서 배려적인 인성의 정립이 우선 선행되어야 합니다. 시민 대중에게 이같은 덕성의 함양이 결핍되었다면 진정한 자유와 평등의 실현은 불가능하다고 해야합니다. 그러나 기존 억압적 갈등 구조에 이미 편입된 사회성을 학습한 인간들에게 이해와 배려를 바탕으로 한 인성을 기대하기란 힘든 일이지요. 이미 지배층, 억압계층에 속한 이들에게서 실질적인 이해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그런 억압구조를 역전하여 갈등 구조를 직접 체험하도록 하는 것이 근본적으로 회의를 만들어낼 수 있는 좋은 방법일 것입니다.
이에 따라 이사쿠는 학내 사회에 존재하는 세 계층간 위치 구조를 역전하기 위한 장치를 꾸몄지요. 여기에 공포와 은닉이라는 방법이 사용된 것은 옳은 일은 아니지만 초기 활동가로서 이사쿠에게 불가피한 요소였을 것입니다.
한편 공포와 은닉을 통하여 권력구조를 역전시키고 보다 더 근본적인 인성의 전환을 도모하기 위해 이사쿠는 현 사회에 기본적으로 내재된 갈등 요인인 성적 금기를 거부하고자 합니다. 근친혼의 타부에서 문명이 시작되었다는 레비스트로스의 지적이 아니더라도 성욕과 그에 대한 금기에서 억압적 인간관이 생기고 자유/자율적 인성 함양이 결핍된다는 것은 기본 교양이기 때문이지요.
이에 대한 거부를 위해 이사쿠는 초기 활동가다운 열성으로 자신이 몸소 해당 과업을 수행하고자 합니다. 자신의 생물학적 성별이 남성이기에 대상 대표자들이 여성으로 대부분 채워진 것은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것이지만 이사쿠 활동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여기서 이사쿠는 자신의 동료로서 역시 남성을 포섭하는 실수를 보입니다. 여성이었으면 정치적으로 올바른 방향에서 볼 때 더 나았을 것이지만, 실용적으로는 남녀간 성적 불평등 구조상에서 무의미하다는 판단이 전제되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2) 실질적 한계
이 시점 이후, 기록자의 부재로 인한 것으로 생각되지만, 서로 다른 기록이 존재합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아쉽게도 이사쿠의 평등사회 실현 계획은 실패로 돌아갑니다. 어느쪽의 기록을 따르든 이사쿠는 계획 도중 우발적 요인으로 결국 사망하게 되며 피교육자들은 순합리적 건전한 이성관을 함양받지 못한 상태로 마감됩니다. 불에 타서 사망한 것이든, 금기 타도를 위한 관계 진행 중 과로로 사망한 것이든, 어느쪽이 진실이든간에 결론적으로 초기 행동가였던 이사쿠는 사망하고 차후의 과업은 그의 동생 슈사쿠에게로 전이되게 됩니다.
이사쿠는 실제 행동과 계획에 있어서 많은 한계를 보였습니다. 첫번째로 이사쿠는 학생 및 교사 대중을 교화가능한 대상으로 보는 계몽주의적인 태도로 계획에 임하였습니다. 일대 다의 교도 노선을 택한 것이 그 대표적인 증거라 할 수 있겠습니다. 선도적 자유인으로서의 자각이 초기 활동가로서 완전히 함양되지 못한 것도 있을 테고, 부적합한 사회여건상 실용주의 노선에서 오는 한계일 수도 있겠지만 이는 비판받아야 할 요소이며 다른 동생들은 이같은 교조적 계몽주의에서 조금 탈피한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후기의 이사쿠도 역시 이같은 문제점을 깨닫고 피교육자로 선정한 대표자 상호간의 금기 제거 활동을 권장하는데, 이는 최상단 계층이던 교사와 남학생 간의 교류나 미유키라는 여학생과 모든 일이 종결된 뒤 이사쿠를 기록한 남학생 간의 관계를 주도한 것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역시도 덕성 함양이 일정 수준 이뤄진 뒤의 활동이 아니기에 강제성을 띄고 이뤄졌다는 것에서 마찬가지의 한계를 지닌다고 하겠습니다.
또한 지나치게 자신에게 중심을 두고 활동했다는 것 역시 한계라 지적하겠습니다. 여건이 부족한 상황에 활동가가 스스로에게 중심을 두는 자체는 문제가 없겠으나 현실적 한계치를 고려치 않고 지나치게 많은 대상을 교화의 대상으로 선정해 사상적 전환을 도모한 것은 분명히 무리한 활동이었습니다.
현존하는 두가지 상이한 기록 중 ‘유작 리스펙트’라고 불리는 영상문헌에서 볼 수 있듯 결국 이사쿠는 세 가지 서로 다른 차원의 착안 사항 – 사회 구조 역전 체험, 금기 제거를 통한 자율성 함양, 전 구성원간의 실질적 관계 개선 중 두번째 사항의 현실적 적용 방안이었던 성욕의 노출이라는 측면에 한정해서조차 여력이 부족하여 결국 탈진해 사망했습니다.
(물론 또다른 기록인 ‘유작’에서는 실화로 인해 불에 타 죽었다고 나옵니다만 이쪽 기록에서도 유작은 자신에게 너무 한정되게 활동하여 자신과 뜻을 같이하였던 진파치 군 (고교생, 남, 18) 마저 끝내는 여타한 피교육자와 같이 대하는 실착을 보이게 됩니다. 지도적 행동가로써 특권층을 두지 않는 점에서는 칭찬할 만하지만 실용적으로 인력의 부족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실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계몽주의 자체에 내재된 한계를 무시하더라도, 그가 추구한 노선 자체가 한계성을 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찻잔 속의 태풍이라는 말처럼, 결국 그가 자신의 노선을 끝까지 이뤄냈다고 하더라도 이는 한 고교 내에 한정된 평등성만을 담보해낼 수 있었을 뿐입니다. 실질적 변혁을 위한 것으로 보기에는 너무도 작고, 한정된 활동이었습니다. 또한 그 속에서도 다시 대표자들을 선발해 대상지어 활동한 것도 역시 평등화한 사회가 이룩된 뒤에도 결국 선발자와 후발자 간 불화를 야기할 여지가 너무도 많으며, 대표자 선발 역시 영향력이라는 측면 외에 미모라는 요소를 강조하는 자의성을 보이기도 하였고, 대표자간 실질적 관계 형성 역시 미흡하였습니다.
일차적 교화의 성과가 뚜렷할 경우 이후 전 학교로 활동을 확대하는 경우에서는 이 미모의 영향력이 지대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실질적 효과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본능적 요소에 심하게 치우친 다수 대중의 교화에서 자율을 가장한 문란한 교접 이상의 효력을 볼 수 있었을지 의문입니다.
(3) 그러나, 무시할 수 없는 그의 업적
결국 최종적으로 이사쿠는 실패했습니다. 초기 활동가로서 많은 한계를 내포한데다가 제한된 여건 상 여력의 부족으로 인해 사망이라는 최악의 비극으로 마감지었습니다. 아쉽지만, 이는 신규의 이데올로기나 이상을 실현하는 장에 있어서 초기의 활동가들에게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는 예상된 비극이었다는 것에서 이미 그가 고려하고 활동한 것이라는 추측이 그나마 우리를 진정하게 합니다.
하지만 이사쿠는 완전하게 실패한 것은 아니라 하겠습니다. 그가 애초에 목표로 한 기존 억압 구조의 역전은 완벽히 성공하였고, 계층간 자유로운 관계 형성도 일정부분 달성했다 하겠습니다. 실지로 이전까지 서로 경원시하던 남녀간, 또한 교사 학생간 관계가 일정정도 강제성을 띈다고 하더라도 성사되었으며, 본능 및 학습능력을 가진 인간의 특성상 이는 차후의 관계 형성에 명백한 효과를 가질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입니다.
일종의 야사로서 존재하는 것으로 보이는 ‘유작 리스펙트’의 기록을 참고해 보면 차후의 관계에서 특히 여성들에게 고정관념에 입각한 이성관계 및 남녀간 불평등한 성적 권력구조가 타파되고 최소한 섹슈얼한 측면에 있어서는 합리적이고 자율적인 인간 관계가 형성되었다 하겠습니다. 애초에 이사쿠가 고려한 부분은 사회 구조상의 개혁이었겠으나, 합리적이고 사회적 인간상이 필연적으로 여성주의를 동반한다는 점에서 볼 때는 분명한 그의 성과라 하겠습니다.
특히 여성간 교류나, 강제적인 계몽을 통한 교류를 가졌던 사람 간의 연결적 관계 고리는 이사쿠가 시도한 개혁이 완벽하게 실패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웅변하는 요소라 하겠습니다. 분명 이사쿠 자신은 실패했으나 그의 시도 자체가 무의미한 것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무엇보다 뒤에 이어지는 슈사쿠, 키사쿠 형제의 ‘사쿠형제사회개혁협의체’ 활동 양상을 볼 때 여러가지 착안점과 자체적인 비판을 낳았다는 것에서 이사쿠를 높게 평가할 수 있습니다.
(4) 기존 이사쿠 비판에 대한 활동적 해체
이사쿠의 개혁 활동에 대비하여 존재하는 비판은 크게 세가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이사쿠가 강제적 성욕 발산을 통한 또다른 성적 불평등 기제를 양산했을 뿐이라는 정치적 관점에 있어서의 여성주의 비판과, 실질적인 평등을 초래하는 과정 상에서 일시적이라고는 하나 이사쿠 자신이 정점에 군림하는 체제로서 강압적인 계몽에 주력하여 북구 국가들에서 흔히 보이는 일인 독재의 양상을 보였다는 자유주의적 비판, 끝으로 미모의 여학생과 여교사라는 성적 코드에 대한 자신의 무분별한 성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야욕일 뿐이라는 인신 공격적 비판이 존재합니다.
첫번째 경우, 이는 이사쿠의 후학격인 슈사쿠. 키사쿠에서도 일정 부분 반복되는 부분입니다만, 이는 기존 전파와 학습, 그리고 계몽적 태도에서 보여지는 무용성에 대한 반발적 행위로서 나타난 방법론적 회의에 입각해 새로이 도입된 방법으로 보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실제로 기존의 사회 학습적 방법이 대세를 이뤘던 시절에도 결국 그 효과는 무용하였으며 언어적 방법으로는 설득이 불가능하다는 일반론적 진리와 설득 자체가 내포한 계몽주의적 한계를 절감한 뒤에 각자 자신의 입장에서 강제적 방법을 수반하긴 하지만 스스로 깨우치도록 유도하고자 하는 그런 전술적 측면에서 이해할 여지가 있지 않은가 싶습니다.
도덕률의 경우 기존 사회 구조가 불평등하고 그 자체로서 악으로 작용할 경우 행동가로써 일정 정도 훼손할 수 있다는 말이 단순한 아집과 또다른 독재라는 지적은 타당하지만 초기 활동가로써 미약한 여건에서 극단을 뛰어넘은 개혁을 시도했던 이사쿠로서는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해야하겠습니다. 물론 여성주의적 관점이 아니라 하더라도 성적 자결권을 박탈하고 진행된 차후의 학습 내역을 결코 긍정할 수는 없지만 그런 방법을 택해야했던 그의 고뇌를 이해할 여지는 있다는 지적입니다.
이미 키사쿠의 실패와 재 도전이 완료된 이 시점에서 향후의 방향성을 논의하기 위해서는 이같은 부분에 대한 덕률을 충분히 함양할 필요가 있다는 부분에서 동의하지만 다른 강력한 교화의 수단이나 사회적 전환의 수단에 대한 방법적 회의와 생산적 고민이 선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두번째와 마지막의 입장은 실질적으로 동등한 관점이라 생각됩니다. 욕망을 인간 행동의 최우선 기제로 보는 들뢰즈나 성욕을 인간 심리의 기틀로 파악하는 정신분석학의 관점에서 볼 때 이사쿠의 개혁안은 계몽 과정에서 현상적으로 드러난 양태를 피상적으로 파악했을 경우 단순한 난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었으며 강제적인 권력 구조를 강화하여 그 틀에서 자신의 입장을 권위적으로 강요한 이사쿠의 행동 양태는 결국 그가 미소녀들과의 다양한 선정적 교류만을 꾀했던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낳기에는 충분하다는 그들의 지적이 나름 합리적이라고 인정합니다.
하지만 선도적 입장에서 최전선에서 활동하다 결국 탈진, 또는 사고사한 활동가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점에서 우선 지적하고 시작하겠습니다. 결과에서 보여지듯, 진실에 보다 가까운 역사라고 생각되는 ‘유작 리스펙트’를 다시 활용하면, 그는 복상사하는 그 순간에 조차 성적 금기의 탈피를 위한 다대 일의 침상 대화를 시도하였으며 그 과정에서의 고통을 감내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과정 중반에 일정정도 자신의 성욕에 탐닉하였을 수도 있다는 지적은 타당합니다. 그 역시 인간이기에 본능의 완벽한 배재는 불가능한 것이므로. 허나 시도 의의나 결과에서 볼 때 그는 결국 자신을 헌신하기로 결심했던 것이며 그 자체의 의지를 손상시키는 지적은 일종의 모욕 내지는 비판자 자신에 내재한 폭력적 성적 욕구의 발로가 아닐까 고민합니다. 원래의 텍스트 자체를 비판하는 비판자 자신에게도 물론 자신이 지적하는 피사체와 동일한 욕구가 내재되어 있으며 그 욕구로 인해 피사체를 불합리하게 비판하거나 곡해할 여지가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게다가 실질적으로 이사쿠가 완전하게 독점적 권위를 행사했다는 지적도 사실이 아닙니다. 그는 각 층에 비밀 통로를 개설해 두었고, 그 통행을 완전히 거부하지도 않았습니다. 석고상 머리에 숨겨진 열쇠, 교탁 밑의 기름통으로 대변되는 그의 배려는 그가 자신의 계몽 대상들에 대한 애정을 버리지 않았으며 완벽한 독재 체제를 형성하는 것에 관심이 없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또한 계몽 대상과 계몽자 간의 일탈과 타자화를 연유로 결과적으로 생성될 권력적 일탈 양상을 우려하여 이미 진파치라는 개혁자를 피계몽인 사이에 섞어두어 그같은 분리를 막기 위한 방어책을 스스로 성립했다는 점에서 이같은 추측을 가능하게 합니다.
(4) 맺으며
갈등적이고도 억압적인 사회 구조는 필연적으로 행동과 개혁을 발현시킵니다. 이것은 역사의 필연이고 인간의 정의입니다. 그 다양성의 한 극단에 이사쿠 형제는 서 있습니다. 이들은 결국 최종적으로 실패했고 좌절했으며 방법상에서도 항상 정치적으로 옳았던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사회적 현상은, 그 자체로써 읽어야 합니다. 각자의 욕망과 각자의 정의가 개입되면 모든 현상은 오염되고 잘못 읽힙니다.
이사쿠 형제의 개혁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고민했던 정의, 그들이 도입한 방법론을 우리는 그들의 관점에서도 고려해 보고, 그 결과로서 폐지해야지 다만 국외자의 처지로써 평가하고 폐기한다면 역사적 순환의 덫에 빠질 뿐이라고 지적하겠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기존에 존재하는 이사쿠 개혁 실천에 대한 제 비판들은 부분적으로 불완전하며 정치적으로도 자신의 욕망을 반영한 불완전한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본유의 가치와 실질적 고민을 강화하기 위해 지금 여러분께 이미 실천적 사회개혁안의 고전인 ‘유작’과 그 이면의 기록인 ‘유작 리스펙트’의 두 영상 문헌을 다시 독해해 보실 것을 권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