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 편차야 있겠지만, 박사 논문을 시작하는 나이가 되니 묻지마 내 나이 나를 스쳐간 많은 연인과 맞이했던 연애의 결말에 관해 고찰하지 않을 수 없다. 박사 생활이 통째로 흔들려 자퇴서를 들고 학과장을 찾아가 찡찡댔을 만큼 고통스러웠던 끝(너무 울어 아토피를 얻었다), 무감각하고 너무나도 자연스러웠던 끝, 나를 좀 더 낫게 만들어주었던 끝 등등…
상대적 결핍이론으로 살펴본 연애의 다른 끝
연애의 결말에 대해 고민하는 과정에서 페이 크로스비(Faye Crosby)의 상대적 결핍(Relative Deprivation)에 관한 논문이 도움이 됐다. 개인적으로 골동품집에서 보물을 찾아낸 것 같은 느낌을 받았는데, 이 글에서 소개하고자 한다.
상대적 결핍이란 용어는 2차 세계대전 이후 ‘객관적 환경이 나아졌음에도 불구하고 주관적으로는 삶을 더 비참하게 받아들이는 군인들의 이해불가한 행동’을 잠정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쓰이기 시작했다.[1] 현재의 상황에 주관적 평가가 객관적 평가와 다른 이유는 ‘주체’가 스스로의 상황을 ‘남’의 상황과 비교하기 때문이라는 설을 시작으로,[2] 비교 당하는 ‘남’ 은 누구인지,[3] 어떤 것을 비교하게 되는지, 언제 결핍을 경험하게 되는지[4]에 대한 이론적, 실험적 연구가 활발히 진행됬다.
상대적 결핍이론은 학문적으로 크게 두 가지의 쓰임새가 있다.
- 주체의 부정적 감정은 단순히 누군가의 절대적인 상황에서 오는 것이 아님을 밝힘.
- 주체가 남과 비교함에 있어 불일치를 느낄 때 느끼는 부정적 감정의 정도를 설명함.
독자들의 학문적 배고픔을 단시간에 다 채우기엔 무리가 있으므로 일단 알맹이만 까서 먹여 드리겠다. 나머지는 알아서…
크로스비의 이론
크로스비의 이론에 따르면 ‘X’를 원하는 상황에서, 우리는 아래 5가지의 조건이 모두 맞아떨어질 때 상대적 결핍을 느끼게 된다고 한다.
- ‘남’ 이 ‘X’ 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 자신이 ‘X’를 원하고
- 자신이 ‘X’를 가질 자격이 있다고 느끼며
- 자신이가 ‘X’를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으며 (조건 4에 대한 반박 논문은 각주에 있다 )
- ‘X’ 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 자신의 책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모든 조건이 일치하여 어떤 사람이 상대적 결핍을 느꼈다면 이제 그는 책임/행동/기회에 대한 생각에 부딪히게 된다.
예를 들어보자. A와 B라는 친구 둘이 있다. 이 둘은 같은 동네에서 자라 같은 학교를 나왔다. 사회적으로 비슷한 조건들을 공유한다. 그런데 각자 다른 회사에 취직한 후 A는 자신의 연봉을 B와 비교한 뒤 자신의 연봉이 작다고 느꼈다. A는 높은 연봉을 받는 B가 자신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여기며, A 본인도 높은 연봉을 원하며 그에 걸맞는 자격을 갖추고 있고 가능성도 있으며, 낮은 연봉을 받는 이유가 본인에게 있다고 느끼지 않는다(상대적 결핍을 느낌).
위 알고리즘을 따라가보자. 만약 A가 ‘남 탓’ 보다는 ‘내 탓’을 하는 성향이고, 평소 본인이 주도하는 삶을 살았으며, 미래에 다시 기회가 있다고 생각하면, 자신을 더 성장시키려고 할 테고, 아니라면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리게 될것이다.
반대로 A가 ‘남 탓’ 하는 성향에, 역시나 본인 주도하는 삶을 살았으며, 미래에 회사가 높은 연봉을 줄 가능성이 있다 사료되면 사회의 (회사의) 건설적인 변화를 위해 앞장설 수 있으며, 아니라면 반사회적·폭력적 행동을 보일수 있다.
이제 연인과 헤어진 상황에 이론을 접목해보자
여기서 가장 중요한 조건은 ‘남’ 이 ‘X’ 를 가지고 있음을 아는 것이다. 일단 ‘남’들이 ‘X’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거나 알아야 만 성사되는 이론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 이론이 헤어진 연인과는 무슨 관계가 있을까? 헤어진 연인 옆에 누군가 있기 때문에?
아니다. 그건 바로 내가 과거에 연인과 함께 보낸 시간을 알기 때문이다. 이 이론에서 말하는 ‘남’이라는 개념에는 ‘과거의 나’도 포함이 되기 때문이다.
이제 핵심적인 질문으로 돌아와 보자.
박사생활을 통째로 흔든 그 끝을 다시 생각하려니 마음이 아려오지만 어쨌든, 연애로 인해 ‘사랑받는다는 느낌에서 오는 안정감(X)’을 원했던 나와 그는, 박사 1년차 봄방학을 기점으로 ‘장거리 연애에 대한 한계인식’과 맞닥뜨리게 된다(Determinant).
- 그때 나는 나의 유학생활로 인해 그가 있던 곳을 떠나 장거리를 해야했던상황을 ‘내 탓’으로 돌렸다(Intro-punitive).
- 스스로 결정하고 행동하는 삶을 살아온 나였지만(High control),
- 약 3년 동안 수없이 이별과 재결합을 반복하고 나서 미래에 내가 원하는 것을 그에게 기대하기 어렵겠다고 결정내렸다(Blocked opportunities).
- 마지막 결정조차 나의 일방적인 결정이었지만 그의 부재는 나를 굉장히 흔들었던거 같다(Stress symptoms).
- 비슷하지만 다른 인연과 겪은 굉장히 다른 경험은 내가 좀 더 멋진 나로 성장하고 싶다고 생각하게 한 끝이다(Self-improvement).
나의 상황을 이렇게 분석했지만 이 분석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헤어진 그 연인의 태도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서였다. 그는 어떻게든 매듭을 짓고 싶어하는 나와 달리 너무나 차분하게 좋은 인연을 이어가자고 했었다. 서로 좋아하는 감정이 같고, 똑같은 상황에 놓였다고 가정할 때 왜, 어째서 그는 다르게 행동할 수 있었을까?
크로스비의 이론으로 돌아가보자. 위에서 살펴본 5가지의 조건 중 하나라도 만족시키지 못하면 상대적 결핍을 느끼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가 나에게 했던 말들을 돌이켜 봤을 때 조건 3과 (자신이 X를 가질 자격이 있다고 느낌) 조건 4(자신이 X를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믿음)가 만족되지 않았다고 추측해본다.
- 과거에 나와 꼼냥꼼냥하던 스스로의 모습을 알고 (조건 1), 나를 원하고 (조건 2), 관계가 발전될 수 없는 이유가 우리 스스로에게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조건 5),
- 현재에 본인의 상황에 비추어 나를 만나기에는 자격이 충분치 않아 보이고(조건 3: “나는 부족한 사람이야”가 입에 붙은 사람이었다), 또 장거리 연애로 멀리 있는 연인에게는 실질적인 도움(그가 생각하는 X)을 줄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했다(조건 4).
그래서 현재 관계에 대한 입장정리시 그는 상대적 결핍에 의한 조급함이나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지 않았는지도.
무튼 그랬다. 혹여 그 사람이 이 글을 보게 된다면 화내지 말고 토닥토닥해주었으면 좋겠다.
- Mainly inspired by: Crosby, Faye. “A model of egoistical relative deprivation.” Psychological review 83.2 (1976): 85.
- Stouffer, Samuel A., et al. “The American soldier: adjustment during army life.(Studies in social psychology in World War II, Vol. 1.).” (1949). ↩
- Hyman, Herbert Hiram. “The psychology of status.” Archives of Psychology (Columbia University) (1942);Marwell, Gerald, Kathryn Ratcliff, and David R. Schmitt. “Minimizing differences in a maximizing difference game.” Journal of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12.2 (1969): 158;
Messick, David M., and Warren B. Thorngate. “Relative gain maximization in experimental games.” Journal of Experimental Social Psychology 3.1 (1967): 85-101.↩ - Lieberson, Stanley, and Arnold R. Silverman. “The precipitants and underlying conditions of race riots.” American Sociological Review (1965): 887-898.Bwy, Douglas. “Dimensions of social conflict in Latin America.” American Behavioral Scientist 11.4 (1968): 39-50;
Abeles, Ronald P. “Relative deprivation, rising expectations, and black militancy.” Journal of Social Issues 32.2 (1976): 119-137;
Caplan, Nathan. “The New Ghetto Man: A Review of Recent Empirical Studies1.” Journal of Social Issues 26.1 (1970): 59-73. Gurr 은 Value expectations(주체에 의한 X의 가치)가 일정할 때 Value capabilities(X를 얻을 수 있는 능력이나 수단)가 줄어들수록 상대적 결핍이 증가한다고 주장했다. Gurr, Ted. “A causal model of civil strife: A comparative analysis using new indices.” American political science review 62.04 (1968): 1104-1124.Sorokin, Pitirim Aleksandrovich. The sociology of revolution. New York, NY: H. Fertig, 19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