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건웅의 2010년도 만화 『나는 공산주의자다』(보리)가 초중고 도서관에서 퇴출되게 되었다. (참조: “청소년 도서 부적절 논란 ‘나는 공산주의자다’“) 『나는 공산주의자다』는 허영철의 에세이 『역사는 한 번도 나를 비껴가지 않았다』(2006)를 만화로 옮긴 책으로, 2010년 2권으로 출간되었다. 도대체 왜 『나는 공산주의자다』가 초중고 도서관에서 퇴출되게 되었을까? 사정은 이렇다.
먼저, (<조선일보>의 표현을 빌리면) 우파 성향 청년지식인포럼 ‘스토리K’가 5월 19일 정부와 교육청 산하 전국 460여 개 도서관의 청소년 추천 도서 가운데 근·현대사를 주제로 한 42권을 모니터링한 결과 12권(28.5%)의 책에서 사실 오류와 좌(左)편향 내용이 포함된 것으로 나타났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를 <조선일보>가 5월 20일 기사에서 소개한다.
5월 20일 자 기사의 제목은 “근·현대사 다룬 청소년 추천도서에 ‘제대로 된 민주주의는 北朝鮮’ 표현”이라고 되어있다.
한 광역교육청 산하 A 센터의 2014년 추천 도서인 만화 ‘나는 공산주의자다’엔 ‘제대로 된 민주주의는 북조선에서 이뤄진 것 같아요’ ‘민주주의의 기본이 백성을 하늘처럼 떠받드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건 바로 저쪽(북한)에서 그렇게 했거든요’라는 등의 내용이 담겨 있다. 이 만화의 원작자는 남파 간첩 출신의 비전향 장기수로 1991년 석방된 인물이다. ‘나는 공산주의자다’는 이 교육청 관할 초·중·고교 중 70여 곳에 비치된 것으로 알려졌다.
기사만 읽으면, 『나는 공산주의자다』의 원작자(정확하게는 구술자)인 허영철이 2015년 시점에서 “제대로 된 민주주의는 북조선”이라고 말 한 것처럼 표현했다. 하지만 맥락을 봐야 한다.
남파 간첩 허영철의 일생
허영철은 보통학교(지금의 초등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한 평범하기 그지없는 빈농의 자식이었다. 식민지 조선에서 빈농의 자식은 먹고살기 위해 노동현장으로 가야 했다. 허영철은 열일곱의 나이에 함경도의 기차 공사현장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현장에서 노동과 함께 성장하던 중 일본에 건너가 홋카이도 유바리 탄광에서 노동을 하며 처음으로 사회주의를 접하게 된다.
노동현장에서 사회주의자가 된 청년 허영철은 해방 후 고향으로 돌아와 남로당에 가입하고 조직활동을 시작한다. 1948년 경찰에 붙잡혀 고문을 당한 뒤, 벌금을 내고 풀려나지만, 남한의 단독선거와 정부수립(8월 15일)에 맞춰 북은 1948년 8월 25일 해주에서 (그들의 주장을 빌리면) 남북한 총선거를 실시해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선포한다. 허영철은 이후 지명수배를 받아 숨어있다가 도피생활을 시작한다. 그러던 중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난다.
인민군이 전북 부안 지역을 점령하자(허영철의 표현을 빌리면 해방되자) 허영철은 부안군 인민위원장이 된다. 이렇게 간부가 된 후 중앙당 학교에 들어가 공부를 한 뒤 황해도 장푼군에서 간부생활을 한다. 이후 대남 공작원을 양성하는 금강학원에 들어가 교육을 받은 후 평안북도로 옮겨 학교를 다시 짓는다.
남한 출신 당원들을 금강학원에서 다시 평안북도로 옮겨 별도로 교육을 받게 한 것은 당시 남로당 출신인 박헌영, 이승엽이 간첩사건으로 숙청되었기 때문. 이들은 평안북도에서 사상검토를 받는다. 1953년 여름, 휴전으로 전쟁이 끝나자 허영철은 평양에서 대남사업을 준비한 뒤 1954년 8월 배를 타고 서해를 거쳐 남으로 들어온다.
그러나 대남사업을 해 보지도 못하고 경찰에 붙잡혀 1955년 11월 9일 국가보안법 위반 및 간첩 미수죄로 서울 교도소에 입소, 그해 11월 25일 무기징역이 확정된다. 그리고 길고 긴 장기수 생활에 들어가 무려 36년 동안 감옥에서 근 반생을 보낸다. 출소한 뒤 북한보다 남한을 선택해 머무르다 2010년 세상을 떠난다.
『나는 공산주의자다』는 허영철이 구술한 자서전을 만화로 옮긴 책이다. ‘스토리K’와 <조선일보>가 고발/보도한 “제대로 된 민주주의는 북조선에서 이뤄진 것 같아요”라는 증언은 55년 붙잡혀 전향하지 않고 36년 동안 감옥에서 생활한 장기수의 회고다. 그때 자신이 그렇게 생각했다고 표현한 것이다. 그걸 마치 2015년에 “제대로 된 민주주의가 북한”이라 주장한 것처럼 풀어놓았다.
정답 강박과 정답 주입
<조선일보>는 5월 22일 자 지면에 이옥진 사회부 기자는 “北맹신한 삶이 아이들에게 교훈 준다니…“라는 제목의 칼럼을 수록한다. 인용보도를 통한 스트레이트 보도, 이어진 기자의 칼럼으로 『나는 공산주의자다』를 호명한다.
책을 덮을 때쯤 북한을 그토록 믿었던 허씨의 삶이 차라리 애달프게 느껴졌다. 그가 ‘민주주의의 이상향’이라 믿었던 북한에서 왕조 시대에나 가능했던 3대 세습이 이뤄지고, ‘3대 세습왕’ 김정은이 인민은 물론 고모부와 측근까지도 짐승처럼 무자비하게 도륙하는 모습을 그가 살아서 봤다면 얼마나 허망할까 해서다.
맞다. 이렇게 느끼면 된다. 독자에 따라 전혀 다르게 느낄 수 있다. 『나는 공산주의자다』는 빈농의 자식으로 태어나 처절한 노동의 현장에서 공산주의자가 되고, 한반도 격변의 근현대사 공간에서 자신의 신념을 지키려고 무려 36년 동안 감옥살이를 해야 했던 노인의 회고를 옮긴 책이다. 누군가가 보기에는 감동의 세월일 수 있고, 누군가가 보기에는 불쌍한 세월일 수 있다. 감상은 독자의 몫이다. 난 위에서 인용한 이옥진 기자의 “허씨의 삶이 차라리 애달프게 느껴졌다”는 감상을 존중한다. 그렇게 느끼면 될 일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옥진 기자의 결론이다.
신념은 자유다. 하지만 남에게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신념, 나아가 어린이들이 배우고 따를 만한 신념이 되려면 진실에 기반을 두고 추구할 만한 가치를 담아야 한다. 공산주의도 뭐도 아닌 엉망진창이 된 ‘북조선’에 대한 무오류적 믿음에 사로잡힌 허씨의 삶에서 초등학생들이 무엇을 배우고 느끼란 것인가.
이옥진 기자는 『나는 공산주의자다』를 읽고 허씨의 삶이 애달프게 느껴졌다면서, 왜 결론에서는 “허씨의 삶에서 초등학생들이 무엇을 배우고 느끼란 것인가”라고 끝맺을까. 이옥진 기자처럼 똑같이 느끼면 된다. 허씨의 삶이 애달프게 느껴진다면, 애달프게 느껴지는 것이 배움이다. 이 책의 추천이유처럼 36년간 감옥생활을 하며 자신의 사상이나 신념을 바꾸지 않은 삶을 보고 어떤 숭고함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어느 독자도 『나는 공산주의자다』를 보고 “북한이 인민의 낙원이며, 제대로 된 민주주의 국가”라고 느끼지 않을 것이다.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2015년 북한’에 대한 소식들을 잘 알고 있다. 말도 안 되는 3대 세습과 잔인한 숙청이 벌어지는 북한을 정상적인 이들이라면 긍정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도대체 왜 2010년에 세상을 떠난 늙은 공산주의자의 회고를 현재의 모습으로 끌어내는지 잘 모르겠다. 왜 <조선일보>는 그렇게 대한민국에 대해 자신감이 없는 것일까? 『나는 공산주의자다』가 초등학교 고학년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만화라 생각한다. 하지만 읽지 못할 만화는 아니라고 본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이 만화를 보면, 두 가지 반응이 나온다. 재미없거나, 아니면 더 궁금해지거나. 초등학생들이 역사에 대해, 북한에 대해 더 궁금해한다면 근현대사에 대해 공부하도록 다른 책들을 추천해 주면 된다. 그리고 함께 토론하면 된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신념을 지닌 늙은 공산주의자가 지키려 했던 북한이 왜 왕조국가처럼 3대가 세습을 하는 국가가 되었는지 토론을 한다면, 이옥진 기자의 바람대로 우리 초등학생들이 더 많은 걸 배우고 느낄 것이다. 내 생각에는 그게 제대로 된 교육이다.
난 정말 궁금하다. 2010년에 세상을 떠난 늙은 공산주의자의 회고가 그렇게 두렵나? 북한에서 남한 가요를 듣거나, 드라마를 보면 숙청을 한다고 하는데, 왜 그리 북한을 못 닮아 안달일까. 『나는 공산주의자다』를 보고 우리 학생들이 공산주의가가 될 것 같은가? 왜 그리 대한민국에 대해 자신감이 없을까. 혹시 종북 아닐까?
2010년 블로그에 올린 글의 결론을 옮긴다.
이념의 차이를 떠나, 자신이 선택한 이념에 대해 헌신하는 자세는 존경스럽다. 그의 모습은 사실 우리가 생각했던 ‘간첩’의 모습은 아니다. 늘 반대편에서 바라보는 간첩의 모습이 아니라 간첩(미수였지만)이었던 이가 담담하게 증언하는 모습은 우리가 보지 못했던 다른 일면을 보게 한다.
나와 다른 삶을 살아왔던 이, 그것도 격랑의 한국 현대사를 온 몸으로 살아온 이의 삶을 그의 시선에서 솔직하게 옮겨놓았기 때문이다. 『나는 공산주의자다』는 허영철 개인의 삶이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온 삶이 모이면 결국 역사가 되지 않던가. 허영철의 삶은 그대로 한국 현대사다. 그는 북쪽으로 돌아가 영웅이 될 수 있었지만, 아내와 자식이 있는 고향 남쪽을 선택했다. 그의 삶은 궁핍하지만, 한홍구 교수의 말대로 “그는 이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여기 남은 것”이다.
『나는 공산주의자다』는 2015년 다시 『어느 혁명가의 삶 1910~2010』이란 제목으로 합본되어 출간되었다.
원문: 코믹스팍닷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