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적요(박해일 분)는 ‘적요(寂寥)’라는 필명처럼 세상과 거리를 두고 살고 있는 시인이다.
그는 유명하지만 돈을 좇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집에서 시를 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의 동경을 받고 있다.
그런 그의 곁에는 제자 서지우(김무열 분)가 있다. 그는 문학과는 거리가 먼 이공계생이었지만, 문학에 불꽃이 타올라 이적요에게 자신을 수발로 써달라고 애원해 그의 제자로 들어가게 된다.
늙음과 후회되는 행동들
늙는다는 것. 이것은 우리 사회에서 금기어나 마찬가지다. 현대사회에서 늙는 것은 개인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대표적인 손실로 보고 있다.
젊을 때와 달리 신체에도 점점 무리가 가기 마련이고, 젊었을 때는 하지 않던 잔실수도 많이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과거에 대한 그리움으로 이어지게 된다.
“아 내가 젊었을 때는 이러지 않았는데!”
어느 날 이적요는 자신의 집에 무단 침입해 잠들어 있는 17세 한은교(김고은 분)를 보고 한눈에 반하게 된다.
원래 같았으면 깨워서 혼을 내거나 했어야 했지만, 은교의 하얗고 생기 있는 모습에 이적요는 저도 모르게 그저 옆에 앉아 쳐다보기만 하며 점점 빠져든다.
그렇지만 그는 은교를 만나면 만날수록 자신의 늙음을 깨닫게 된다. ‘늙음’에 저항하며 몸부림치고, 이 때문에 자기궤멸 속에 허우적거린다.
자신은 생생한 젊음을 소유하고 있는 은교를 사랑하지만, 신체로는 서지우를 이길 수 없다.
이런 열등감이 이적요를 휘감고, 서지우와 은교가 관계를 갖는 모습을 우연찮게 목격하게 된 어느 날.
충격을 받은 이적요는 서지우의 자동차 타이어를 망가뜨리고 사고가 나도록 조작한다.[1] 다행히 서지우는 차의 이상을 알아차려 정비소로 들어가 상태를 확인한다.
누군가 고의적으로 만진 것 같다는 정비공의 말에 서지우는 스승의 짓이란 걸 바로 알아차리고, 배신감에 매우 괴로워한다.
서지우는 매우 분노한 상태로 거칠게 운전하며 이적요의 자택으로 돌진하나, 사고가 나 그 자리에서 죽는다.
그리고 그 이후부터 이적요는 아무것도 먹지 않고 오로지 술만 먹는다.
소설에서는 그가 병원에서 건강이 매우 좋지 않다는 진단을 받고 자택에 굴을 판다. 그리고 그 굴에서 은교가 준 토끼인형[2]을 머리맡에 두고 숨을 거둔다.
사람은 과거를 추억한다
흘러간 젊음에 대한 그리움은 나이를 먹을수록 실제 불편함 이상으로 간절하기 마련이다.
하루가 24시간이듯이 이미 지나간 시간과 앞으로 다가올 시간의 차이는 없다. 살면 살수록 뭔가 더 멋진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불확실한 미래에 얻을 수익보다는 당장 지금 얻을 수 있는 것을 갈구하고 이미 지나간 과거를 추억한다.
항상 아쉬워하고 과거를 회상하는 우리를 향해 경제학은 ‘손실회피성향(loss aversion) 때문에 그래’라고 진단한다. 쉽게 말해 인간은 이득보다는 손실에 더 민감하게 대처한다는 것이다.
손실회피성은 행동경제학에 대한 연구로 2002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대니얼 카너먼의 ‘프로스펙트 이론’의 핵심 중 하나다.[3]
어떤 사람이 1만 원을 손에 쥐여준 다음 이런 제안을 해왔다고 하자. 동전을 던져 앞면이 나오면 지금 받은 1만 원을 돌려줘야 하고, 뒷면이 나오면 1만 원을 추가로 내게 준다.
실제 대니얼 카너먼이 실험을 하자 90% 이상의 사람이 게임하기를 거부했다고 한다.[4]
즉, 액수가 같은 손실과 이익이 있다면, 손실로 인한 고통(불만족)을 이익으로 인한 행복(만족)보다 더 크게 느낀다(평가한다)는 것이 손실회피성 원리의 골자다. 솔까 돈을 더 줘도 안 할 듯.
사람들이 불확실성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공포를 느끼는 이유는 그것이 자신에게 이득을 주기보다는 손해를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불확실성이라는 것이 기회와 희망을 안겨줄 수도 있겠지만, 사람들은 이득보다는 손해를 우선적으로 떠올린다.
손실회피성향은 남녀 간의 사랑에도 적용할 수 있다. 이미 사랑이 식어버린 애인과의 관계를 질질 끌던 한 사람이 어떤 계기로 이별을 하고 새로운 사랑을 찾았다고 하자.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 사람은 다시 옛 연인을 그리워한다.
옛 애인과의 관계를 질질 끌었던 시간이 길면 길수록 그럴 가능성은 더욱 높아진다. 헤어짐으로 인해 앞으로 얻을 수 있을 자유보다 그 연인과 헤어지면서 잃은 것들을 더 크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노욕의 손실회피성향
물론 누구나 자신이 가진 것을 잃게 되면 크게 상심하게 된다. 특히 우리네 젊음이라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이적요는 지나간 자신의 젊음을 그리워하는 데 그치지 않고 ‘늙음’을 끝내 배척하려다
결국 아끼는 제자도 죽게 하고 사랑하는 은교도 떠나보내게 된다.
손실회피성향이 지나치면 하나의 집착이 되고 결국 자신을 파멸로 이끄는 법이다.
연 매출 83조 원에 우리나라 재계 5위에 빛나는 롯데그룹이 ‘형제의 난’으로 만신창이다. 명목상 동생 신동빈 회장과 형 신동주 전 부회장의 싸움이지만,
신동주 전 부회장 뒤에 롯데그룹의 창업주이자 이들의 아버지인 신격호 총괄회장이 있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다.
100세 가까운 나이에도 아직 정정함을 유지하는 것은 장수시대에 축하를 받아 마땅한 일이다.
하지만 적절한 시기에 지분정리를 하지 않고 후계작업도 하지 않아 결국 자식들의 불화를 자초하고, 상법상 주주총회와 이사회를 무시한 채 본인이 아직까지도 전권을 가지고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모습에서는 자기궤멸에 허우적거린 이적요 시인이 그려진다.
자신이 기업 전체를 좌지우지하기엔 이미 롯데의 덩치가 너무 커졌을뿐더러, 100세의 고령이란 점을 볼 때 위신도 서지 않는 일이지 않나.
노인의 욕심을 ‘노욕(老慾)‘이라 부른다.
청욕(靑慾·청년의 욕심)이란 단어가 없는 것을 보면 옛 선조들도 어린이·청년보다 노인의 욕심을 더 추하게 느꼈나 보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세상 욕심에서 점점 멀어지고 경제학적으로 손실회피성향이 약해지는 과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친자식이라 할지라도 마음에 들지 않자 “널 후계자로 임명한 적 없다”고 가차 없이 말하는 그의 모습에서는 욕심과 함께 권력의 비정함마저 느껴진다.
그렇다고 나이를 먹는다는 것이 나쁜 점만 있을까.
시간만큼 쌓이는 경험과 사물을 종합적으로 관망하는 자세는 생태계에 있어 꼭 필요한 역할이다. 이미 세상 풍파를 모두 겪은 인생 선배의 적절한 ‘훈수질’은 우리 사회가 올바른 방향으로 나가게 하는 ‘죽비소리’와 같은 것이다.
노욕이 지나치면 ‘노추(老醜)‘가 된다고 한다. 그 자체로 이미 충분히 위대한 멘토요 훌륭한 경영자의 표본으로 충분히 남을 수 있는 신격호 씨의 아름다운 뒷모습을 기대해본다.
- 영화에선 안 나오지만, 소설에서는 지하실에서의 모습을 목격하기 전부터 이적요는 서지우가 은교에게 키스하거나 억지로 만지는 모습을 몇 번 목격하는데 그때마다 전부 서지우가 자신의 고결한 은교를 ‘강제로’ 탐하고 은교는 ‘약해서’ 반항하지 못하는 걸로 합리화를 한다. ↩
- 이적요가 은교에게 토끼를 닮았다고 말하자 자신이 없을 때 이 토끼인형을 보라면서 은교가 선물한 인형이다. 영화에서 이적요의 죽음은 나오지 않는다. ↩
- 카너먼은 트버스키와 함께 이 이론을 창시했지만, 트버스키는 일찍 세상을 떠난 관계로 노벨상을 받지 못했다. 노벨상을 받으려면 꼭 장수하도록 하자 (…) ↩
- 실제로는 좀 더 복잡한 실험이었고, 여기서는 이해를 돕기 위해 최대한 간단하게 각색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