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트업 업계에 종사하시는 분들을 만나 보면 대기업에 대해 양면적인 말을 하십니다.
- 대기업 다녀서 좋겠다.
- 대기업 안 무섭다.
이 말을 하나로 합쳐 보면 “개인에겐 복지, 급여 등에 있어서 안정적이고 좋은 환경인데 회사 자체는 경직된 구조와 비효율로 인해 일을 잘하지는 못 한다”는 말로 종합됩니다. 제가 잠깐이나마 스타트업 업계에 나와 본 소감은 이렇습니다. 일하는 목적이 다를 뿐 효율이나 성취도 면에서 본질적인 역량의 차이는 없습니다.
대기업과 스타트업의 차이점과 공통점
스타트업 업계(다음에 별도로 글을 쓰겠지만 스타트업 업계가 하나의 대기업입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하나의 회사처럼 이야기하려 합니다.)의 임무는 새로운 시장을 정복하는 것입니다. 항상 새로운 일을 할 조직을 육성하고 진화시키며 가망 없을 경우 빠르게 해체해 재조직하는 구조입니다. 반면 대기업은 이미 구축된 캐시 카우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것이 임무입니다.
이런 역할의 차이만 인정하고 본다면 사실 대기업에서 일하는 사람의 역량이 한 수 위인 경우가 많습니다. 학벌과 경력이 좋은 사람을 뽑아 놓으면 90%는 놀고, 나머지 10%가 치열한 경쟁에 참여합니다. 그리고 그 10% 중 다시 10% 이하의 사람만이 임원으로 생존할 수 있는 환경이기 때문이죠.
그들이 가진 최고의 역량은 조직의 임무를 명확히 파악하고 정교한 계산을 통해 전체 조직에 무리가 가지 않으면서 최적의 결과를 내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런 인재들이 운영하는 회사의 생산성과 매출액이 스타트업에 비해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스타트업 업계에서도 상위 10%의 조직만이 그나마 경쟁할 수 있는 수준이라는 점을 본다면 비슷한 상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이곳에서 인정해 주는 역량은 전체 스타트업 조직에 대한 조화보다는 자기확신과 독자적 추진력을 통해 도태되지 않고 살아남는 것입니다. 업무의 강도로 봐도 대표나 창업자급으로 치열한 사람이 있는 반면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더군요.
스타트업이 변이가 필수적인 약육강식의 진화 생태계라면, 대기업은 질서가 우선인 종교적 관점의 설계된 생태계라고 볼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역할이 다른 조직일 뿐, 노력과 필요한 역량의 수준은 비슷합니다. 그런 점에서 제가 LG라는 대기업에서 얻을 수 있었던 게 있습니다.
대기업에서 배울 수 있는 것들
첫째, 내가 하고 싶은 것에서 벗어나 일이 되게 하려면 필요한 것에 집중하는 습관입니다. 아무리 좋은 사업이라도 최소한 수십 가지의 안 되는 이유가 있습니다. 조직의 부정적 자세 때문이라기보다는 그만큼 얽히고설킨 엄청난 조직 구조, 기업 총수가 생각하는 업의 본질과 미시적 전략의 괴리, 하나가 성공하려면 다른 것이 희생되어야 하는 풍선효과 등을 경험하면서 알게 됩니다.
둘째, 정량적 분석 및 보고 역량입니다. 대기업은 끊임없이 “돈 돼?”를 묻습니다. 그에 대한 논거 제시를 위해서 정량적 근거를 만들어 내야 하죠. 그리고 내 위로 난 하나의 라인을 뚫고 올라가기 위해 논리 싸움을 하면서 결재선을 탑니다.
스타트업 업계에서 묻는 것은 조금 다릅니다. “잘할 수 있어?”를 묻죠. 대기업의 단일 결재 라인 대신 여러 임원(투자자)에게 보고합니다. 그중 하나의 임원만 OK를 하면 되는 일종의 퍼포먼스이자 오디션 프로그램입니다. 저는 후자의 성향이 강했지만 살아남으려다 보니 전자의 역량을 키울 수 있었습니다.
셋째, 관리 역량입니다. 이거야말로 대기업에서 얻을 수 있는 특전입니다. 물론 그곳의 90% 사람들은 그런 걸 깨닫지도 못하고 적당히 일하지만 자신의 노력에 따라 조직을 맡아 운영해 볼 수도, 그게 아니라도 ‘갑’의 지위를 이용해 수많은 ‘을’ 업체들을 컨트롤하며 관리 역량을 키워나갈 수 있습니다. 회사 돈을 가지고 수십 번의 사업을 실패하면서도 말이죠. 관리 역량은 배우는 것도 있지만 이렇게 반복적인 경험으로 몸에 배는 것이 더 많습니다.
그 밖에도 안정적인 연봉, 인센티브, 복지혜택 등이 있지만, 과연 그걸 대기업 혜택의 에센스라고 한다면… 막상 들어가 보세요, 얼마나 허망하고 허울 좋은 것인지 거기에 있는 사람들이 더 잘 압니다. 물론 그만두고 스타트업 업계에 나올 생각을 하는 순간, 그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재면서 손을 부들부들 떨게 되긴 합니다.
제가 몸담은 딜리버리 손세차 서비스 ‘와이퍼(Yper)’가 성공할지 실패할지는 아직 모릅니다. 중요한 건 그게 결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대기업이건 스타트업이건 모두 사람들이 치열하게 일하는 곳입니다. 저마다의 능력으로 최선을 다하면서 살다 보면 대기업에선 임원으로, 스타트업 업계에선 성공적인 사업의 창업자로 보람을 느끼리라 봅니다. 실패하면 또 다른 일을 찾아 나서면 되겠죠.
다만 사회의 혜택이라고도 볼 수 있는 대기업 경험을 기반으로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스타트업에 도전하는 사람이 많아지고, 대기업은 스타트업에서 굴러먹던 야생마를 적극적으로 채용해서 다양성을 적절하게 유지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졌으면 하는 바람은 있습니다. 한국의 스타트업과 대기업 모두가 글로벌 경쟁에서 커다란 위협에 직면해 있다고 보거든요.
대기업과 스타트업 인재의 이질성에 대한 편견은 깨져야 합니다. 저는 저대로, 대기업 출신 스타트업 CEO답게 ‘와이퍼’를 보다 정교한 전략과 체계적인 운영으로 성공시키는 데 헌신을 다하겠습니다.
원문: Yper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