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유키카제(雪風)를 아는가?
당신은 유키카제(雪風)를 아는가?
이 간단한 질문에 어떤 대답이 나오느냐에 따라 당신의 취향(?)과 성향(!)을 확인할 수 있다(이 질문에 ‘모르겠는데요?’라고 대답한 사람들은 논외로 하겠다). 일단 가장 평범한 대답이라 할 수 있는 애니메이션 오타쿠들의 반응을 보자.
아, 전투요정 유키카제(戦闘妖精 雪風) 말이죠? 엄청난 작품이죠. 2002년이었나? OVA(오리지널 비디오 애니메이션)시장이 박살나던 시장에 혜성처럼 등장한 두 작품! <마크로스 제로>랑 <유키카제>였죠. GONZO(애니메이션 제작사) 작품들 중에서 최고의 퀄리티를 보여준 작품이었죠. 일본 항공자위대 애들이 이 작품을 위해서 전면적인 협조를 했던 걸로도 유명하죠. 덕분에 공중전 장면은…이제껏 나온 작품들 중에서도 TOP 3 안에 들어갈 만 하죠.
(※첨언하자면, <전투요정 유키카제>는 칸바야시 쵸헤이의 동명소설 <전투요정 유키카제>를 원작으로 만들어진 5부작 OVA작품이다. 이미 마니아층은 애니메이션이 나오기 전부터 소설 <전투요정 유키카제>에 열광했었다. 일본의 SF잡지인 ‘SF매거진’에서 1979년부터 1983년까지 연재된 연작 단편을 1984년에 동명의 타이틀로 출간한 것이다. 그 이후 부정기적으로 단편을 계속 연재해 총 3권의 소설을 만들어 낸다. 1985년, 2000년에 성운상을 수상한다. 국내에도 3권이 모두 번역되어 출간됐고, 애니메이션도 정식 발매됐다. 단언하는데 SF를 좋아한다면 소설과 애니메이션 모두 추천이다. 명작이다)
만약 이 말들을 얼추 이해한다면, 당신을 애니메이션 오타쿠로 인정하겠다. 그렇다면, 유키카제를 아는 또 다른 ‘취향’의 사람들은 어떤 말을 쏟아낼까?
아, 그 강운함(强運艦)…
꽤 짧다. 물론 더 이야기 할 수 있겠지만, ‘강운함’이라 말한 다음 묘하게 웃음 짓는 그 모습에서, 어떤 아우라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바로 밀덕후(밀리터리 오타쿠)의 향기가 은은하게 퍼져 나올 것이다. 만약 ‘애니메이션+밀리터리’가 결합된 최악의 조합을 갖춘 덕후라면…그 덕력은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긴장들 하시라 ‘유키카제’가 어떤 존재이고, 일본 애니메이션과 문화계, 그리고 일본인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한 번 파고 들어가 보자.
구레의 유키카제와 사세보의 시구레는 반드시 살아 돌아온다!
이게 무슨 말일까? 태평양 전쟁 말기 일본 해군들 사이에서 떠돌던 전설 같은 소문이다. 아니, 소문이 아니라 사실이다. 비록 사세보를 모항으로 했던 시구레는 1945년 말레이 반도 근처에서 잠수함의 어뢰공격으로 격침 되었지만 유키카제는 끝까지 살아남게 된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뒤에도 그 끈질긴 생명력을 이어나가게 된다. 과연 유키카제는 어떤 존재였을까? 2,000톤급의 작은 구축함이 시대를 뛰어넘어 이렇게까지 회자되는 이유가 뭘까? 다음의 약력을 보면, 왜 이렇게 회자되고 추앙(?) 받는지를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1. 1940년 1월 21일 사세보(佐世保) 해군공창에서 카게로급 구축함의 제8번함으로 탐생
2. 1942년 2월 27일 수라바야 해전에서 다른 구축함들과 공동으로 미 순양함 2척, 구축함 1척 격침. 이후 자바 해협에서 연합군 잠수함 소탕작전 시 잠수함 1척 격침…전설의 시작이다!
3. 1942년 6월 4일 그 유명한 미드웨이 해전에 참전. 이때도 무사히 귀환함. 뭐 여기까지는…
4. 1942년 8월 24일 동부솔로몬 해전에서 항공모함 쇼카쿠와 즈이카쿠 호위
5. 1942년 10월 25일 산타크루즈 해전에서 항공모함 즈이카쿠 호위
6. 1942년 11월 과달카날 해전! 본격적인 함포전에서도 살아남고, 다른 함들과 공동으로 중순양함 2척 구축함 4척 격침(이때 어뢰 발사를 위해 미군 함포 사거리 안으로 용감히 들어갔음에도 살아남았음!)
7. 1943년 2월 과달카날 철수작전에 참가 3번의 철수작전에 모두 투입! 생존확률이 지극히 낮았던 과달카날 철수작전에 3번 모두 투입되어 무사히 살아남음!
8. 1943년 3월 2일 비스마르크 해전! 미국, 호주 공군의 공습으로 구축함 4척, 수송선 8척이 격침되는 상황에서도 표류하던 일본군 1개 대대병력을 구출한 다음 퇴각!
9. 1943년 7월 13일 콜롬방가로 해전. 기함 진쓰의 호위 임무를 맡았는데, 미군 함대의 공격으로 진쓰 격침.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대 지휘권을 인수 받아 반격. 미군 함대를 퇴각시킴!
10. 1944년 6월 19일 필리핀(마리아나 해전)…이때는 정말 ‘운빨’의 최고봉. 필리핀 해전 때문에 추진기가 고장남. 원래 임무였던 항공모함 호위 대신 유조선단 호위로 임무가 바뀌게 됐고, 8척의 유조선을 호위해 도쿄로 돌아가게 된다(가다가 잠수함에 의해 1척이 격침됐지만, 이 정도면 선방 중에 선방!). 그러나 애초에 같이 있었던 함대들은 ‘마리아나의 칠면조 사냥’에 의해 떡실신 됨. 정말…운빨하는 최강임!
11. 1944년 10월 23일 레이테만 해전. 이때 세계에서 가장 큰 전함인 야마토급의 2번함 무사시를 호위. 미 제3함대의 대규모 공습에 걸림. 무사시…격침 됨. 그 옆에 있던 유키카제 무사히 살아남아서 전함 나가토를 호위해 구레항으로 퇴각. 함대가 거의 다 격멸됐음에도 무사히 빠져나옴.
12. 1944년 11월 29일 항공모함 시나노 호위 임무. 야마토 급의 3번함으로 건조됐다. 항공모함 부족으로 고민하던 일본해군이 전함을 급히 항공모함으로 설계 변경해 만들어진 항공모함으로 당시 7만 2천 톤의 어마어마한 배수량을 자랑했다. 그러나…미 해군의 잠수함 아처피쉬에 걸림. 어뢰 6발을 맞고 격침 됨. 이때도 유키카제는 살아서 돌아옴.
13. 1945년 4월 7일…그 유명한 오키나와 해전. 영화 <남자들의 야마토>에 잘 표현돼 있음. 미 해군 제58 기동부대 소속의 10척의 항공모함. 9척의 전함, 500대의 미해군 함재기를 향해 걸어들어감(말 그대로 자살공격이었음). 야마토 격침, 같이 갔던 호위 구축함 5척도 다 격침. 유키카제는 혼자 살아 돌아옴. 당시 미해군 함재기가 발사한 로켓탄을 맞았으나, 식량창고에 맞았고, 그나마도 불발탄이었음. 사망자 없었음(당시 유키카제는 야마토에서 불과 1.5킬로미터 떨어진 거리에 있었음).
14. 이후 구레항 공습을 피해 동료 함정들과 함께 동해로 대피 하던 중 미군 함재기의 공습을 받음. 유키카제에는 단 한발의 명중탄도 맞지 않았음. 그러나 돌아오는 길에 기뢰를 건드리게 됨. 그러나 기뢰는 터지지 않았고, 유키카제의 뒤를 따라오던 히스카리가 건드리자 폭발하게 됨.
15. 종전 후 라바울, 사이공, 방콕, 타이완을 왕복하며 귀환병 15,000명 수송
16. 1947년 7월 6일 일본을 떠나 중국 상하이로. 전쟁배상금 명목으로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로 소유권 이전. 함명을 단양(丹陽 : 붉은태양)으로 개명. 국민당 정부의 기함으로 사용. 대만 철수 작전에서 맹활약.
17. 1966년 태풍에 의해 좌초. 대파됨(함 이름에 바람이 들어갔는데, 바람 때문에 박살나다니…아이러니다). 1970년 고철로 해체. 대만은 닻과 타륜을 일본으로 보냄. 현재 일본 박물관에 전시 중.
어떤가? 말 그대로 전설이지 않은가? 유키카제는 태평양 전쟁 내내 12만 8천 마일을 달렸다(지구를 5.15번 돌 수 있는 거리다)). 그 동안 260명의 승조원 중 단 2명의 전사자만 기록됐다. 이 정도면 강운함(强運艦)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지 않을까? 전쟁 당시 유키카제는 일본 함대 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강운함이었다. 이렇게 되자 유키카제의 승조원들은 자신의 가족 이름에 유키(雪)라는 글자를 넣게 된다. 여기서 드는 의문…유키카제는 단순히 운이 좋아서 살아남았던 걸까? 그건 아니다. 당시 유키카제의 분위기는 여타 다른 함대의 분위기와는 좀 달랐다.
훈련은 실전처럼! 실전은 훈련처럼!
훈련 하나만은 똑 부러지게 하는 건 기본이었지만, 그 나머지가 문제였다. 이들은 함 내에서 아무렇지 않게 마작을 하고, 상급자와 하급자가 아무 거리낌 없이 반말을 하고, 술판을 벌이는…말 그대로 개판 5분전의 분위기를 연출했던 것이다. 덕분에 해군 지휘부에 단단히 찍힌 상황이었지만, 이들은 그런 자유로운 분위기를 계속 즐겼다. 그러나 엄청난 전과 덕분인지 최식식 장비들(레이더, 소너)을 우선적으로 장비하게 해 준다. 결정적으로 유키카제가 다른 함들과 다른 점은 ‘살겠다는 의지’다. 다른 전함은 옥쇄와 자살돌격을 말할 때 ‘꼭 살아서 귀환한다.’를 함의 구호로 외칠 정도로 생존에 대한 남다른 집착(?)을 보여준다.
이런 재미있는 역사 덕분인지, 일본 애니메이션이나 영화를 보다 보면 유키카제란 이름, 혹은 유키카제의 분위기를 연출한 장면들을 찾아 볼 수가 있다.
우주전함을 소재로 한 작품들을 챙겨보다 보면 이런 장면들을 쏠쏠하게 찾을 수 있는데, 지금의 30대라면 기억할 만한 마쓰모토 레이지의 <하록선장>을 보면, 해적들이 자유롭게 자신들의 취미생활과 음주를 즐기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우주전함 나데시코>와 <무책임함장 테일러>의 분위기 역시 유키카제를 연상케 한다.
얼마 전 개봉했던 <우주전함 야마토>의 실사판에서는 초반부터 <유키카제>의 이름이 들린다. 지구함대와 가미라스 함대간의 초반 함대결전에서 지구함대의 퇴로를 열기 위해 싸우다 격침당한 전함의 이름이 바로 <유키카제>이다(실제의 역사와는 정반대라 아쉽지만…).
일본인들에게 있어서 유키카제는 말 그대로 특별한 뜻이 담긴 전함의 이름이다. 일본의 전함 하면,
일본하면 야마토 아냐? 만화로도 만들어진…그런데 알고 보면 그게 일본 군국주의의 화신이라니까.
뭐, 틀린 말은 아니다. 2차 대전 당시 힘 한번 써보지 못하고 격침당 한 그 한을 돌려주겠다고 <우주전함 야마토>를 만들어서 서양인…콕 찍어 미국인을 패러디(?) 한 가미러스 성인과의 전투를 통해 자위했던 것이 일본이지만, 야마토 1.5킬로미터 옆에서 포화를 피해가며 무사히 살아 돌아온 유키카제도 일본인들은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야마토 만큼은 아니지만, 나름 여러 매체에 그 이름을 팔며 끈끈한 생명력을 보여주고 있다. 드라마성이나 이야기 자체만 놓고 본다면, 덮어놓고 돌격하고 싸우는 야마토 보다는 유키카제의 스토리가 훨씬 더 재미있고, 흥미진진하지 않은가? 그렇기에 아직까지 회자되고, 차용되고, 활용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일본 애니메이션이나, 영화, 만화를 보다가 간혹 유키카제란 이름을 보게 된다면 강운함(强運艦) 유키카제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슬며시 미소를 짓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한국과 일본이라는 국적을 다 떠나서 유키카제가 보여준 그 전설적인 이야기를 생각한다면, 60여년이 훨씬 지난 지금까지도 그 이름이 회자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