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황교익의 글에서 촉발되었을 ‘백종원 논란’은 크게 두 가지 갈래로 나뉘는 것처럼 보인다.
첫 번째는 맞벌이가 일반화되면서 엄마의 집밥을 먹지 못한 젊은 세대가 백종원을 대체 엄마로, 백종원의 요리를 대체 집밥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황교익 칼럼을 거칠게 요약하면 대강 이런 이야기가 될 것이다.
이 칼럼이야 까이고 까였으니 또 깔 필요가 있나 싶다. 집밥을 엄마, 여성의 몫으로 한정지은 것은 황교익 칼럼의 가장 큰 한계다. 칼럼이 ‘진짜 엄마한테 진짜 엄마 손맛을 배우면 어떨까’ 같은 문장으로 마무리되는지라 현상을 설명했을 뿐이라는 뻔한 변호를 펼칠 구석이 없다.
대체 엄마를 찾는 젊은 세대의 수요가 백종원 열풍의 근원이라는 분석도 조악하다. 최소한 연령대별 시청률이 어떻다는 근거라도 있었으면 좋으련만. (물론 그것만으로도 부족하다. 백종원 열풍을 낳은 <마이 리틀 텔레비전>은 애당초 젊은 세대들에게 익숙한 아프리카 TV 개인 방송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본인의 생각을 현상에 끼워 맞춘다는 인상이 다분하다.
한편 두 번째는 좀 더 근원적인 사회 문제에 주목한다. 최저임금이 5천원 대에 불과한지라 경제적으로 빈곤하다. 살인적인 노동시간 때문에 시간도 부족하다. 복지와 사회 안전망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다. 이런 사회적 문제 때문에 제대로 된 음식을 먹지 못하고, 대체 재료와 대체 조리법을 가지고 제대로 된 음식을 흉내라도 내는 데서 만족을 얻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난 이 이야기에 주목하고 싶다.
제대로 된 음식
여기서, 제대로 된 음식이란 무엇인가? 아마 이런 대답이 나올 것이다. “다양한 재료를 이용해 재료 본연의 맛을 살리고, 조미료 대신 좋은 재료와 긴 시간을 들여 우려낸 소스를 이용하고…” 맞다. 그런 음식은 제대로 된 음식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동네 마트에서 산 재료에 대강 고춧가루와 설탕, 미원을 섞어서…” 만든 음식이 제대로 된 음식이 아닌 것은 아니다. 흉내가 아니다. 난 이쪽도 제대로 된 음식이라고 생각한다.
굳이 차이를 두자면, 전자에 더 많은 재료와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을 따름이다. 그런데 더 많은 재료를 쓰고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한다는 것이 정말 ‘집밥의 훌륭함’이나, 더 나아가 ‘현대 사회의 모순’과 연결되어 있는 걸까?
더 많은 재료부터 얘기해보자. 다양한 재료로 다양한 맛을 즐길 수 있다면 식도락의 폭이 넓어지는 건 당연한 얘기다. 하지만 정말 이것이 집밥의 몫이었던가? 이것이야말로 추억 보정이라고 생각한다. 난 아무리 생각해도 한 사람의 엄마가 거리의 수많은 외식업체보다 더 다양한 재료로 더 다양한 맛을 제공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엄마가 베트남 칼국수를 만들 수 있었던가? 타코는? 스테이크는? 파스타는? 손쉽게 선택할 수 있는 외식 메뉴만 따져봐도 집밥 메뉴의 종류에 비해 수 배 이상 많다.
전혀 다른 재료가 필요한 전혀 다른 문화권의 음식들을, 기껏해야 수 명에 불과한 가족을 위해 매일같이 다르게 제공할 수는 없다. 이랬다간 아마 대부분의 재료가 쓰기도 전에 상하고 썩어버릴 것이다. 결국 유통기한이 긴 절임 요리 등이 늘상 밥상에 오른다. 그럼 엄마를 제외한 가족들은 밥상이 늘 똑같다 불평 불만을 털어놓았을 것이고. 사실 추억 보정을 걷어낸 진짜 집밥의 모습 아닐까. 우리는 정말 과거에 비해 맛의 다양성을 잃어가고 있는 것일까?
조미료를 쓰지 말고 자연의 식자재료 조미를 하자는 얘기라면, 이건 그냥 허황된 이야기다. 엄마 집밥이 조미료를 안 썼다고 여긴다면, 조미료를 안 쓰고도 맛을 낼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부잣집이었거나, 주방 찬장을 한 번도 들여다보지 않은 사람일 것이다. 고급 레스토랑의 정식을 만들 게 아닌 이상, 집밥에서 백종원식 레시피보다 양념과 소스를 딱히 더 제대로 만들 방법이 있나 싶다.
더 많은 시간 얘기도 해 보자. 직장에서의 노동 시간이 줄어들고 여가 시간이 늘어나면, 음식에 투자하는 시간이 길어져서 더 제대로 된 요리를 할 수 있게 될까? 이건 음식을 즐기는 사람에게나 해당하는 얘기다. 하물며 매일같이 집밥을 준비해야 한다면, 이건 여가나 놀이가 아니라 엄연한 가사 노동이다.
집밥, 노동에서 여가로
음식을 하는 시간이 길어진다는 얘기는 사실 일하는 시간이 길어진다는 것이다. 긴 시간을 들여 집밥을 해야 한다는 것은 누군가의 노동시간, 옛날 집밥으로 따지자면 엄마의 노동시간이 더 길어진다는 것이다.
집밥을 한다는 것 또한 노동이라는 당연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왜 더 긴 시간을 들여 집밥을 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처럼 묘사된 것일까? 더 간소하고 편리한 방식으로 충분히 ‘흉내’내고 그만큼의 효용을 제공받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런 생각이 든다. 혹, 집밥을 늘상 의무적으로 차릴 의무가 없기에 비로소 집밥이 노동이 아니라 여가의 영역에 발을 들이게 된 것은 아닐까?
모든 것이 톱니바퀴처럼 이어져 있다는 것이다. 집밥은 과거 전업주부 엄마들이 전담하는 노동이었다. 그러나, ‘아빠가 일 나가고 엄마가 집안일하는’ 전통적 의미의 가정은 점점 해체되고 있다. 젊은 사람들은 밖으로 나간다. 외식을 통해 다양한 식문화를 즐긴다. 그러다 보면 외식이 지겹다. 종종 간단한 조리법으로 짧은 시간에 집밥을 완성해 소소한 즐거움을 즐긴다.
이건 흉내가 아니라 변화다. 백종원의 집밥이 엄마들의 집밥을 흉내낸 것이 아니라, 과거 엄마들의 가사노동으로 만들어졌던 집밥이 사회가 변하면서 때때로 즐기는 여가가 된 것이다.
나는 작금의 현상을 굳이 부정적으로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늘 단군 이래 최대 불황이라 하지만, 정말 과거보다 경제적으로 빈곤해지고 더 적은 효용을 누리고 산다는 얘긴 아니다. 외식 문화는 훨씬 풍요로워졌고, 여가를 즐길 시간도 늘어났다. 엄마의 가사 부담도 줄어들었다. 지금에 만족하고 살자는 얘기가 아니다. 여전히 문제 많고 모순적인 세상이지만, 적어도 옛날식 집밥이 사라진 것이 현대 사회가 더 각박해졌기 때문은 아니라는 얘기다.
어제는 고추장에 고춧가루를 풀고 간장과 다시다를 넣어 해물 잡탕 찌개를 끓였다. 밖에서 사 먹는 해물탕보다 당연히 맛이 없다. 아직 간을 조절하는 감이 없어 시행착오의 연속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즐겁다.
나는 주방은 남자가 발을 들이는 게 아니라 배우며 자랐다. 대신 그 노동은 온전히 엄마의 몫이었다. 이젠 아니다. 난 음식의 값을 치르고 밥을 사먹고, 온갖 문화권의 음식을 단돈 만 원에 즐긴다. 때때로 외식이 지겹거나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않다 싶으면 직접 주방에 들어가 요리를 즐기기도 한다. 엄마가 밥상을 내오길 기다리는 대신 말이다. 충분하지 않은가? 난 옛날식 집밥이 그립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