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북 정릉에 사는 승민(이제훈 분)은 갓 스무 살 대학 건축학과 신입생이다.
승민은 학기 초 ‘건축학개론’ 수업에서 처음 만난 음대생 서연(수지 분)에게 반한다.
그러한 승민의 마음을 사로잡은 서연은 무지 예쁠 뿐만 아니라 느낌 있는 음대 피아노 전공생이다.
그에 반해 승민은 평범한 더벅머리 신입생.
둘은 함께 숙제를 하고, 이삿짐도 같이 나르고,
빈 철도 길에서 데이트를 하고, 첫눈 오는 날에 다시 만나자고 약속을 하는 등 아직 ‘썸’이란 단어가 정착되지도 않은 시기에 서툴지만 풋풋하게 서로에게 접근한다.
하지만 능숙한 ‘밀당’ 기술을 갖춘 서연과 달리 서툰 승민은 서연이 자신을 진짜 좋아하는 건지, 그저 자신을 친구로 생각하는 건지 점점 헷갈려 한다.
그리고 건축학개론 종강 날, 승민은 서연이 평소 자신이 동경한다고 말했던 강남 선배에게 업혀 술에 취한 채 집에 들어가는 장면을 보고 큰 충격을 받는다.
서연 집 문 앞에다 귀를 대 봤지만 아무 소리도 안 들릴 뿐이다. 정식 남자친구도 아니기에 아무것도 못한 채 쓸쓸히 돌아선다.
그 후 승민은 서연을 피해 다녔고, 서연은 자신을 피하는 승민을 찾아오지만 차가운 한 마디만 듣는다.
“꺼져줄래?”
그 후 시간은 15년이 흘렀고, 건축가가 된 승민(엄태웅 분)에겐 곧 결혼을 앞두고 있는 여자친구 은채(고준희 분)가 있다.
오빠의 첫사랑은 어떤 여자냐고 묻는 은채에게
승민은 의미심장한 한 마디 답을 던진다.
“썅년.”
그리고 15년 만에 다시 불쑥 나타난 첫사랑 서연(한가인 분)은 어느 날 승민에게 말한다.
“그 썅년이 나야?”
영화 <건축학개론>은 가슴 아린 첫사랑이란 소재로 2012년 400만 명의 누적 관객을 동원했다.
하지만 대부분 첫사랑이 그렇듯이 이들의 사랑도 실패로 돌아갔는데, 그 원인은 종강 날에 있었던 작은 오해로부터 비롯됐었다.
사랑과 증오는 종이 한 장 차이라고 했던가. 그 뒤로 서연에 대해 분노를 품는 승민의 모습이 압권이다.
왜 15년 동안 승민은 서연을 ‘썅년’이라고 생각했을까.
귀인이론에 비춰본 우리들
승민처럼 인간은 자신과 타인의 행동에 대해 그 원인을 알아내려고 하는 성향이 있다. 그리고 보통 그 원인의 결론은 두 가지 방향이다.
내 탓이거나 환경 탓이거나.
예컨대 내가 누군가에게 고백을 했는데 단호히 차였다면, 그 원인에 대해 분석할 때
내가 못났는지(내부)
이미 애인이 있었던지(외부)
로 나눠 생각할 것이다. 그냥 싫을 수도…
경영학에서는 이러한 과정을 ‘귀인(attribution)’이라고 부른다.[1] 그리고 이러한 귀인이론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켈리(H.Kelly)의 이론이다. 그는 어떤 사람이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을 해석할 때 그 원인을 내부로 돌리느냐 외부로 돌리느냐에 대한 요인으로
- 특이성
- 합의성
- 일관성
이라는 기준을 제시했다. 표로 확인해보자
이 요인이 높고 낮음에 따라 외부귀인과 내부귀인을 판별해서 행위의 원인을 추론한다는 것이다.
서연을 썅년이라고 단정 지은 승민의 마음속을 귀인이론으로 분석해보자.
특이성, 합의성, 일관성
특이성(Distinctiveness)은 자신이 상황에 따라 얼마나 다른 방식으로 행동하는 성향이 있는가를 뜻한다. 즉 원인을 찾으려는 행동이 얼마나 예외적인지 아닌지를 찾는 것이다.
만약 어떤 행동이 예외적인 행동이라면(특이성이 높다면) 외부적인 것으로 귀인하겠지만, 예외적인 행동이 아니라면(특이성이 낮다면) 내부적으로 귀인하게 될 것이다.
영화에서 서연을 두고 경쟁을 벌여야 하는 강남 선배의 조건은 너무나도 월등하게 나온다.
승민처럼 티 나는 짝퉁 티셔츠를 입는 것도 아니고,
서연의 자취방 근처에 작업용 공간도 있으며, 94년 당시에는 상상도 어려운 자가용까지 갖출 정도로 재력도 있다. 또 얼굴도 잘생겼고 언변까지 좋다.
그런 강남선 배가 술에 취한 서연을 업고 서연의 집으로 들어갔다? 승민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예외적인 상황이 아니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는 승민이 내부적으로 귀인하게 되는 요소다.
합의성(consensus)은 유사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을 비교하면서 나오는 기준이다. 만약 유사한 상황에 처한 모든 사람들이 모두 비슷한 방식으로 행동한다면(합의성이 높다면) 외부적으로 귀인하게 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합의성이 낮다면) 내부적으로 귀인하게 될 것이다.
예컨대 내가 수업에 지각했을 때 남들은 다 왔는데 혼자만 지각했다면 합의성이 낮은 것이므로 행위자의 내부(내 잘못)에 귀인하게 된다.
건축학개론에서 승민의 마음을 통해 합의성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다. 앞서 말했듯이 승민은 갓 이제 학교에 들어간 신입생이다. 숫기라고는 하나도 없다.
친구 납뜩이에게 키스상담을 받을 때도 부끄러워하는 영락없는 연애 초보다.[2]
서연과 승민의 ‘썸타는’ 관계를 이끌어나갔던 것도 승민이 아닌 서연이었다. 강남 선배가 술에 취한 서연을 집으로 부축해서 들어갔을 때, 주위서 숨어서 보던 승민의 마음에는 엄청난 회오리가 휘몰아쳤을 것이다.
승민의 머릿속에는
‘같이 술 마신 학생들은 집에 잘 들어갔을 텐데, 유독 서연만 강남 선배와 같이 자신의 집에 들어가고 있다.’
고 생각했을 것이다.
더구나 앞서 서연은 강남 선배를 동경해서 음대생인 자신이 공대 건축학개론 수업을 듣게 됐다고 말한 바 있다.
이는 승민이 보기에 서연의 합의성이 낮다고 판별하는 기준이 되므로, 이것은 행위자(서연)의 내부에 귀인하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일관성(consistency)은 특정 행동이 시간을 두고 반복되는지 그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
만약 한 사람의 특정 행동이 예전부터 원래 그래왔던 행위라면(일관성이 높다면) 내부적으로 귀인하게 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일관성이 낮다면) 외부적으로 귀인할 것이다.
일관성 측면에서 서연과 승민을 둘러싼 환경을 보자.
먼저 둘의 정신세계를 이해해야 한다. 서연은 승민에게 계속해서 호의적인 신호를 많이 보낸다. 따지고 보면 처음 승민에게 숙제 같이 하자고 먼저 따라온 것도 서연,
생일파티 해달라고 먼저 청한 것도 서연, 첫눈 오는 날 만나자고 했을 때 적극적으로 약속을 잡았던 것도 서연이다.
동시에
“난 아나운서가 돼서 돈 많은 남자와 결혼할 거야!”
라고 말한 것도 서연,
기차길 데이트에서
“(아나운서가 되면) 돈 많은 남자랑 결혼할걸. 그래서 나도 나중에 이런 데다 집 짓고 살아야겠다. 그때 니가 공짜로 지어줘”
라고 말한 것도 서연이었다.
이렇듯 (승민이 보기에) 알쏭달쏭한 화법으로 그의 혼을 쏙 빼놓고 승민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는다.
또 서연은 승민이 오해할 만한 단초도 준다. 승민이 빈집에서 “너도 재욱이 형(강남 선배) 좋아해?”이라고 물어보자
서연은 이렇게 답한다
“뭐 그래 봤자… 재욱이 오빠 나한테 관심도 없고 나 혼자 삽질하는 거지뭐.”
이를 여자언어로 해석하면
“내가 강남 선배를 좋아하는건 무의미한 동경일 뿐 요즘 관심이 가는 남자는 승민이 바로 너.”
라고 볼 수 있겠다만, 여자를 처음 만난 ‘동정남’ 승민이 어찌 알겠나.
이는 ‘직접화법을 사용하지 않으면 못 알아먹는’ 승민에게 너무 가혹한 처사였던 것이다.
그 후로 승민은 꾸준히 강남 선배에 대해 열등감을 갖게 된다. 돈 많은 남자가 좋다고 하는 서연에 비해 자신은 돈도 없고, 키도 안 크고, 재력도 없고 매력도 없지 않나.
종강 날 승민은 서연과 강남 선배가 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자,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너는 날 가지고 놀았구나. 처음부터 넌 강남 선배를 좋아했고 나는 거기에 놀아났을 뿐’
이라고.
이는 서연의 일관성이 높다고 오해하는 계기가 됐다.
다르게 표현하면 ‘나는 너의 심심풀이 땅콩 혹은 어장관리남’.
고로 이것도 내부로 귀인하게 되는 요소였다.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x년이었나
이제 왜 그가 서연을 ‘x년’이라고 칭했는지 이해가 간다.
경영학 표현을 빌리자면 승민이는 종강 날 술에 취해 강남 선배와 함께 있는 서연의 모습을 보고
- 특이성이 낮고,
- 합의성도 낮으며,
- 일관성은 높다고 생각한 나머지
지극히 내부귀인을 시켰고, 그녀 자신에게 모든 행동의 원인을 돌려버린 것이다.
쉽게 말해,
‘다 네가 의도한 것이야. 넌 날 가지고 놀았어. 이 썅년아.’
이렇게 말이다.
이것이 바로 15년 뒤 자신의 약혼녀에게 서연을 두고 “썅년”이라고 말하게 된 계기였던 것이다. 서연이 진짜 그랬다는 게 아니라 승민이 그렇게 생각했다는 것이 중요 포인트다.
왜 강남 선배가 진짜 호의로 서연을 집에 데려다 줄 수도 있었던 것이고,
서연이 평소에는 술을 잘 못하는데 그날만 컨디션이 좋지 않았던 것일 수도 있고, 무엇보다 서연과 강남 선배가 집 안에서 ‘과도한 애정행각’을 했다는 물증도 없지 않은가.[3]
전체적으로 볼 때 승민이 한 행동은 ‘기본적 귀인 오류(Fundermetal arrtibution error·FAE)’를 저지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FAE는 관찰자가 다른 이의 행동을 설명할 때 상황 요인들의 영향을 과소평가하고 행위자의 내적 요인의 영향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을 뜻한다.
곧 다른 사람의 행동 원인을 그 사람이 처한 상황의 조건보다는 그 사람의 성격이나 능력, 동기, 태도 등에 돌린다는 것이다.
일상 생활에서의 FAE 예를 들어보자. 한 운전자가 빨간불에서 그냥 달리는 다른 운전자를 보았을 때 ‘성격이 더럽거나 초보운전이라서 그렇다’고 추론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운전자가 곧 양수가 터지기 직전의 산모를 뒤에 싣고 달리는 중일 수도 있는 것이기 때문에 쉽게 예단하지 말아야 한다는 게 FAE의 교훈이다. 어찌 됐든 승민의 첫사랑은 그렇게 “꺼져줄래”와 함께 끝나고
15년간 서연은 그의 마음 속에서 ‘썅년’으로 계속 살아왔다.
혹자는 이렇듯 자기 맘대로 오해하고 상대방한테 화풀이하고 용기도 지지리 없는 승민을 보면서 욕을 하겠지만,
그 자체가 평범한 우리인 것을 어찌하랴. 우리네 남자들 살아온 모습 그 자체라 더 짠할 뿐이고 인생은 그렇다는 진리만 재확인할 뿐이다.
그래서 이 말이 더 아프게 들릴는지도 모르겠다.
“될 사람은 뭘 해도 되고, 안 될 사람은 뭘 해도 안 된다.”
덧.
서연과 승민이 철도길에서 데이트하는 장면은 사실 불법이다.
철도 선로에 무단침입하는 행위로 엄연한 철도안전법 위반이다. 아름답게 그려졌으나 영화는 영화일뿐 따라하진 말자.
- 귀인이론(attribution theory)은 원래 사회심리학에서 유래됐으나 현재는 경영학 조직행동론에서도 폭넓게 쓰인다. ↩
- 그런 승민에게 납뜩이는 말한다. “니가 한 건 키스가 아니라 뽀뽀야, 그것도 자는 애한테. 범죄야 범죄!” ↩
- 승민은 강남 선배와 서연이 집안에 들어가고 나서 집 앞 대문에 귀를 갖다 댄다. 하지만 거의 아무 소리도 안 들리자 터벅터벅 집으로 돌아간다. 승민은 여기서 강남 선배의 ‘작업질’이 성공적으로 되고 있으며, 그저 자신은 서연의 노리개에 불과했다며 절망했을 가능성이 높다. 차라리 문 안에서 서연의 비명소리나 술주정 소리가 들렸다면 문을 부숴서라도 들어갔을 테지만, 그런 건 아녔으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