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놀이>의 시인 주요한
조선총독부가 ‘조선민사령’을 개정한 것은 1939년이었고, 이에 따라 조선에서도 일본식 씨명제(氏名制)를 따르도록 명령한 것은 1940년이었다. 이른바 ‘창씨개명’은 거칠게 정리하면 조선 사람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하고 일본인이 되라는 요구였다고 할 수 있다. 대부분의 조선인들이 이 정책에 반대하였지만 이에 적극 호응한 친일파도 적지 않았다.
‘마쓰무라 고이치(松村紘一)와 ‘ ‘팔굉일우(八紘一宇)’[1]
그 가운데 어떤 이들은 갖가지 지혜를 짜내 일제의 요구를 만족시킬 만한 창씨를 ‘실천’했다. 일제의 황민화(皇民化) 요구에 부응한 창씨명은 소설가 이광수와 시인 주요한, 그리고 평론가 김문집의 그것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이었다.
일본의 진무천황이 즉위한 곳의 산 이름 가구야마(香久山)를 씨로 삼아 ‘가야마(香山)’라 하고 ‘광수’의 ‘광(光)’자에다 ‘수(洙)’자는 일본식의 ‘랑(朗)’으로 고쳐 ‘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郞)’가 된 이광수가 단연, 그 선두다.
평론가 김문집은 ‘대구(大邱)에서 태어나 도쿄, 즉 에도(江戶)에서 성장하고 용산(龍山)역에서 전사해 돌아오는 황군 장병을 맞아 운 적’이 있다며 그 각각의 지명에서 한 자씩 따서 ‘오에 류노스케(大江龍之助)’라 하였으니 그 둘째다.
마지막은 우리나라 최초의 자유시 <불놀이>의 시인 주요한(朱曜翰, 1900~1979)이다. 그는 총독부의 내선일체 체제에 적극 호응하여 일본어 시집 <손에 손을(手に手を)>(1943)까지 낼 정도의 극렬 친일파였는데 그의 창씨명은 ‘마쓰무라 고이치(松村紘一)’다. 바꾼 이름 고이치는 일제의 황도(皇道)정신인 ‘팔굉일우(八紘一宇)’를 딴 것이니 그는 확실히 덴노헤이카(天皇陛下)의 적자(嫡子)가 되고도 남음이 있다.
주요한은 평양 출신으로 연극인 주영섭, <사랑 손님과 어머니>의 작가 주요섭의 형이다. 일본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1919년 문예 동인지 <창조> 동인으로 참가하여 그 창간호에 산문시 <불놀이>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불놀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현대 자유시로 알려져 있다.
주요한을 ‘극렬’ 친일파라고 했지만 그가 본격적인 친일의 길로 간 것은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 이후다. 1919년에 그는 상하이로 가 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의 편집을 맡았다. 1924년부터 1936년 까지 문예지 <조선문단> 동인으로 활동했다. 1924년에는 신시집 <아름다운 새벽>을 펴냈다.
1926년 흥사단의 국내 조직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의 실질적 기관지인 <동광(東光)>의 편집인 겸 발행인을 맡았다. 1930년대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서 기자로 근무했으며 1937년경에는 친일 실업인 박흥식이 설립한 화신(和信)사에서 중역으로 일했다.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는 안창호, 이광수, 주요한 등에 의해 결성된 교육, 계몽, 사회운동 단체다. 식민 통치가 길어지면서 수양동우회는 1937년 중일 전쟁 발발 시점에 일본 제국이 일으킨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와해되었다. 이는 본격적인 전쟁 체제를 조성하기 위해 양심적 지식인 및 부르주아 집단을 포섭할 필요가 있던 일제가 수양동우회를 표적 수사한 것이었다.
수양동우회 사건 이후 전향, 친일의 길로
서울, 평안도, 황해도 등의 지역에서 모두 181명의 동우회원들이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었다. 이 가운데 41명이 기소되었다가 1941년에야 무죄 석방되었는데 검거된 회원들은 강제로 전향한 뒤 일제에 협력하게 되었다. 작곡가 홍난파가 그 대표적 인물인데, 중심인물이었던 이광수와 주요한은 이후 적극적인 친일활동을 시작했다.
1937년 종로경찰서에 검거된 주요한은 이듬해 수양동우회 사건 예심 보석 출소 기간 중에 전향을 선언하고 조선신궁을 참배했다. 같은 해 12월 경성 부민관 강당에서 열린 전향자 중심의 좌담회인 시국유지원탁회의에 참석해 “이 비상시에 있어서는 우리는 일본이 승리를 얻어야 하겠다는 입장에서 황군의 필승을 위한 총후의 적성(赤誠)에 전력을 바쳐야 할 것”(<삼천리>1939.1.)이라고 말했다. 같은 달 수양동우회를 대표해 주요한은 종로경찰서에 국방헌금 4천원을 헌납했다.
이후 주요한은 친일활동을 그야말로 ‘눈부시게’ 전개했다. 조선문인협회, 황도학회, 임전대책협의회 등 전시체제 시기 전쟁 협력단체에서 주도적으로 활동하면서 이른바 ‘총후(銃後) 봉공(奉公)’에 매진했다. 내선일체 운동단체인 국민훈련후원회가 벌인 일본어 보급운동에 참여하고, ‘채권가두유격대’에서 애국채권을 팔았으며,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으로 참여하는 등의 의용(義勇) 봉공 끝에 그는 1941년 11월, 수양동우회 사건 최종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태평양전쟁이 일어난 것은 주요한이 무죄를 선고 받은 지 한 달 뒤였다. 황은에 감읍했던가, 주요한은 1941년 12월 14일 조선임전보국단 주최의 전선(全鮮)국민대회의 미영타도 대연설회에서 ‘루스벨트여 답하라’라는 제목으로 연설했다. 루스벨트와 처칠을 방화범, 해적, 어릿광대 등에 빗대면서 “그대들의 악운은 이미 다 되었”고, “반도의 2400만은 혼연일체가 되어 대동아 해방성전의 용사되기를 맹서하고 있다.”(<신시대>1942년 1월호)며 불을 뿜었다.
1942년 5월, 일본이 1944년부터 ‘조선인 징병제도’를 실시하기로 결정하자 조선임전보국단의 징병제도 대연설회에서 ‘새로운 각오’라는 제목으로 연설했다. 그는 ‘무적 황군의 일분자’가 됨을 욕되게 아니하려면 “①국체(國體)에 철저하여라. ②팔굉일우(八紘一宇)의 대이상을 깨달아라. ③충절을 다 하라. ④사생(死生) 초월하라. ⑤곤고(困苦)를 견디어라.”(<대동아>1942년 7월호)고 주장했다.
전쟁 찬양, 화려한 총후봉공
이후 대동아전 1주년 기념 국민시 낭독대회에서 시를 낭독하고 <매일신보>의 ‘반도개병가(半島皆兵歌)’ 현상모집 심사위원으로, ‘미귀(米鬼)의 잔학성을 폭로한다’는 주제의 라디오 좌담회 참석으로, 해군지원병제 실시 기념 미영격멸대강연회에서 강연하는 등 그는 일제에 협력하는 데 바빴다.
1944년께 주식회사 화신이 안양에 비행기공장을 짓는 데 관여해 해방될 때까지 이 공장의 운영을 책임졌다. 같은 해 2월 종로경찰서가 주도한 황민화운동 단체에 참여해 ‘총후보국’에 앞장섰다. 3월 기존의 조선문인보국회 기관지에서 보국회 시부회(詩部會) 기관지로 바뀐 <국민시가(國民詩歌)>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했다.
이런 친일활동과 함께 일제에 협력하는 글쓰기도 나날이 무르익었다. 1940년 <조광> 9월호에 시조 ‘여객기’를 발표하면서 시작한 친일 글쓰기는 일제의 침략전쟁이 확대되면서 ‘대동아공영권’을 위한 태평양전쟁 찬양으로 이어졌다.
12월 여드렛날 네 위에 피와 불이 비 오듯 나릴 때
동아 해방의 깃발은 날리고 정의의 칼은 번듯거림을 네 보았으리라
이 날 적국의 군함, 침몰된 자 기함(旗艦) ‘아리조나’를 위시해서
‘오클라호마’와 ‘웨스트버지니아’와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
깨어져서 다시 못 쓰게 된 자도 네 척, 이름 좋은 진주만은 비참한 시체가 되고
횡포한 아메리카 나라의 아세아 함대는 앉은 자리에서
반신불수의 병신이 됨을 네 보았으리라– ‘하와이의 섬들아’(<삼천리> 1942.1)
그는 시를 통해서 일제의 싱가포르 점령을 찬양하고, 일제 침략전쟁의 주요 상대국인 영국과 미국을 비난했다. 또 전력(戰力) 생산을 위한 ‘총후’의 국민 된 자세를 강조하는 글도 적잖게 썼다.
‘총후봉공’을 위해 바삐 뛰는 조선인들의 모습을 묘사했다는 시 ‘정밀(靜謐)’은 부역 시인의 시적 감성이 얼마나 폭력적인가를 보여준다. 그것은 식민지 백성들이 일제의 전시체제의 일부가 되어버린 순응적 질서의 순간을 감각적으로 미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보고, 듣고 또 전신으로 느꼈다.
소집되어 가는 각모(角帽)
몸뻬의 행진
젊은 여성의 땅을 울리는 보조를
흰 수병복(水兵服)의 소년단
애국반상회의 창기대(槍騎隊)
눈 내린 새벽의 요배식(通拜式)을– 시 ‘정밀(靜謐)’(<신시대> 1944. 7)
문인들의 총후봉공 중 가장 중요한 것은 학병, 지원병, 징병, 징용 등을 선전·선동하는 일이었는데 주요한은 이 일에도 적극 나섰다. 그는 지원병 응모 선동에 그치지 않고 천황을 위해 조선 청년들이 지원병이 되어 죽어갈 것을 선동했는데 시 ‘첫 피’는 그 백미다. 지원병 이인석의 입을 빌려서 그는 천황을 위해 죽자고 선동했다.
나는 간다,
만세를 부르고
천황폐하 만세를
목껏 부르고
대륙의 풀밭에
피를 뿌리고
너보다 앞서서
나는 간다.(…)
역사가 생긴 이래
처음으로
뿌려지는 피다.
반도의 무리가
님께 바친
처음의 피다.(…)
형아 아우야, 나는 간다.
너보다 앞서
피를 뿌린다.
앞으로 너들의 피가
백으로 천으로
만으로 십만으로
뿌려질 줄을
나는 안다.
대륙에서
대양에서
넘쳐흐르게 될 줄을
나는 안다.”– 시 ‘첫 피-지원병 이인석(李仁錫)에게 줌’(<신시대> 1941. 3) 중에서
천황을 위해 죽으라! ‘야스쿠니의 신’이 되도록?
선동은 여성들에게도 이어졌다. 그는 시 ‘댕기’(<국민문학>1941년 11월호)에서 “까만 댕기에 하이얀 간호복 입고 / 저도 나라를 위해 있는 힘 다 바치겠어요”라며 젊은 여성들도 간호부로서 전쟁에 참여하도록 독려했던 것이다.
주요한은 ‘가미카제(神風)’로 출전하는 조선 청년을 숭고하게 묘사함으로써 천황을 위해 조선 청년들이 목숨을 바치길 요구했다. 그는 1944년 5월호 <방송지우>에 발표한 산문 ‘구단(九段)의 꽃’에서 조선의 지원병, 학병, 여자 정신대 등을 ‘구단’에 만발한 ‘젊은 사쿠라꽃’에 비유한 것이다.
‘구단’이란 도쿄의 ‘야스쿠니(靖國) 신사’가 있는 곳이니 ‘천황 폐하’를 위해 죽은 이들은 ‘신(神)’으로 모셔지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들자 주요한은 마침내 폭뢰로 자살공격을 감행한 조선인 병사를 기리며 이를 따르자고 선동하기에 이른다. 1945년 1월 30일자 <매일신보>에 발표한 시 ‘파갑폭뢰(破甲爆雷)-박촌(朴村) 상등병에게 드림’에서다.
전쟁 말기의 이들 친일 부역문인들의 정신 상태는 온전했다고 보기 어렵지 않을까 싶은데, 글쎄다. 워낙 자기 정당화나 합리화에 능숙한 이들이 문인이고, 그걸 통해 자기 최면에 가까운 확신에 이르기도 하니 그건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을지 모른다.
최후의 항전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패전했고 조선은 해방되었다. 그 화려한 배덕의 시대를 건넌 이들로서 마땅히 그에 상응하는 모습을 보이는 게 마땅했다. 천황과 전쟁을 찬양하다 그것이 좌절되었으니 흠모해 마지 않는 일본식으로 할복하던가, 아니면 민족을 향해 석고대죄라도 해야 옳건만 아무도 그러지 않았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정부가 수립되었고 친일파들은 다시 정국의 전면에 등장했다.
해방,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
주요한은 1949년 4월 28일 반민법 제4조 제10, 11항 위반 혐의로 반민특위 산하 특경대에 체포되었다가 풀려난 것으로 친일의 단죄에서 벗어났다. 그는 주로 기업에서 활동 하다가 1948년 <국민신문> 편집국장을 지냈고, 한국전쟁 당시에는 조만식의 조선민주당에 참여했다. 흥사단 기관지 <새벽>을 창간하기도 했다.
이후 주요한은 대부분의 친일 문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이 나라 주류로 살아갔다. 1958년 민의원으로 당선했고, 1960년 민주당 장면 내각에서 부흥부·상공부 장관을 지냈다. 1970년에는 공기업 대한해운공사 사장을 지내면서 동탑산업훈장을 받았다.
1970년대 들어서는 세종대왕, 도산 안창호, 안중근 선생 등의 각종 기념사업회 일에 관여했다. 도산과 안중근 의사 같은 분들의 기념사업이 이러한 극렬 친일 인사들에 의해서 추진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해방 후 식민지 역사에 대한 청산이 이루어지지 못했기 때문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는 만년에도 전경련 부회장 등 주요 경제단체의 간부를 역임했다. 주요한은 1979년 11월 17일에 사망, 전국실업인장으로 서울 새문안교회에서 장례가 치러졌다. 정부는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했다.
이 훈장의 훈격은 1등급이다. 일제의 감옥에서 순국한 시인 이육사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된 것은 해방 45년 만인 1990년이었다. 육사에게 추서된 애국장의 훈격은 4등급이었다.
단순 비교가 어렵긴 하다. 그러나 이 엄청난 전도, 이율배반이 환기하는 것은 한국 현대사다. 청산하지 못한 식민지 역사가 빚어내는 슬픈 자화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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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 이 풍진 세상에
- 팔굉일우 : 일본 천황제 파시즘의 핵심 사상으로, 태평양 전쟁 시기에 일본 제국이 세계 정복을 위한 제국주의 침략 전쟁을 합리화하기 위해 내세운 구호. “전 세계가 하나의 집”이라는 뜻.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