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valuewalk의 「Shelby Davis: An Unknown, Great Value Investor」를 참고한 글입니다.
대다수 위대한 가치 투자자와 마찬가지로 셸비 데이비스(Shelby Cullom Davis)는 가치 투자 사회 이외에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인물이다. 하지만 그의 성과는 그레이엄&도드빌 출신 어느 투자자 못지않게 좋았다.
워런 버핏처럼 셰비 데이비스의 전문 분야는 보험으로 그가 이룬 부의 원천이 되었다. 1950년대 초반, 데이비스는 주가 배수가 낮았던 보험주에 투자해 백만장자 반열에 올랐다. 여기에는 데이비스의 투자 기술뿐 아니라 시장의 힘도 작용했다.
데이비스가 시장에서 처음 관심을 가졌던 보험주들은 주가 배수 한 자릿수 초반대에서 거래되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서서히 상승했다. 데이비스는 이를 ‘데이비스의 더블 플레이’라고 불렀는데, 데이비스만이 가진 종목 선정 능력은 아니었지만, 처음에는 수익이 늘어나고, 이어 투자자가 달라붙어 주가 배수가 상승하는 상황을 표현한 것이다.
1909년에 태어난 데이비스는 투자를 평생의 업으로 삼을 생각은 없었다. 그는 1930년 프린스턴 대학에서 러시아 역사를 공부했고, 1931년 컬럼비아 대학으로 옮겨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 후 1934년 제네바 대학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제네바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많은 직장에서 다양한 일을 경험한 후에야 마침내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을 찾았다. 그는 제네바의 CBS 유럽 특파원으로 일했을 뿐만 아니라, 처남이 있었던 델라웨어 펀드에서도 일했고, 토마스 E. 듀이의 연설문 작성과 경제 고문으로 또 프리랜서 작가와 저자로도 일했다.
데이비스는 자기가 무슨 일을 하는지 깨닫지도 전에 가치 투자자로서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워싱턴의 전시 생산국에 일자리를 얻기 전이었던 1941년, 실제로 데이비스는 뉴욕 증권 거래소 회원권을 샀다. 단지 가격이 쌌다는 이유였다. 일반적으로 50만 달러 이상 호가했던 회원권을 단돈 3만 3,000달러에 샀다.
데이비스는 뉴욕 증권 거래소 회원권을 산후에도 외부 자산 관리 업계에서의 일을 계속했다. 1944년부터 1947년까지 보험 감독관으로 일했다. 하지만 1947년 아내에게 5만 달러를 빌려 투자자로서의 다시 시작했다. 데이비스는 몇 년 동안 보험 업계에서 일한 것을 계기로 보험주에 빠지게 되었다.
보험 시장의 비효율성을 파고들다
보험 업계는 상대적으로 잘못 이해하는 종목군 중 하나다. 오늘날조차 많은 보험 회사가 낮은 주가 배수로 거래된다. 변동성 심한 업계의 특성과 보험 시장의 복잡성 때문이다. 보험 시장을 이해하는 투자자는 드물며, 다양한 보험의 종류와 변동성이 심한 합산 비율(combined ratio)로 인해 기본이 되는 사업의 본질이 흐려질 수 있다. 데이비스는 바로 이러한 시장의 비효율성을 파고들었다.
그는 대다수 보험사가 장부 가치 이하로 거래하지만, 종종 상당한 규모의 연간 배당금을 지급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데이비스는 시장 가격으로 보험사의 주식을 매수하면, 기본적으로 배당금은 공짜로 따라온다는 점을 알았다. 또한 생명 보험이 불티나게 팔려나갔으나 보험 계약자들의 수명이 계속 늘어남을 알았다. 그는 보험사들이 뜻밖의 성장 기업이라는 데 주목했다.
데이비스는 처음 몇 해 동안 항상 신용 거래로 주식을 매수했으며, 그중 포트폴리오의 트레이딩 수익률이 134%나 되는 해도 있었다. 그럼에도 데이비스의 투자 방법은 그레이엄&도드빌의 원칙에 큰 영향을 받았다. 그는 종목을 선별하기 전에 기업의 펀더멘탈에 초점을 맞췄는데, 대차 대조표의 견고성을 살펴보고, 정크 본드 같은 위험성 자산을 보유하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이어 경영 품질에 중점을 두고, 때로는 경영진을 찾아가 자사 사업의 기본적인 특성에 대해 물어보기도 했다. 데이비스는 포트폴리오 다각화를 추구했으며, 보통 한 번에 30 내지 35개 종목으로 포트폴리오를 구성했다. 그는 충분한 종목을 보유함으로써, 잘못 선별한 종목의 손실을 적절하게 선별한 종목의 이익으로 만회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런 전략은 복리의 힘과 보험 업계 전반의 주가 배수 상승과 합해져 아주 큰 효과를 발휘했다. 데이비스의 38세 당시의 투자 원금 5만 달러는 47년 후 9억 달러로 불어났다. 매년 연평균 23%씩 성장한 것이다. 1994년 데이비스가 세상을 떠났던 당시 뉴욕 증권 거래소 회원권 가격은 83만 달러로, 데이비스의 투자 기간 연평균 복리로 6.3%에 불과했다.
데이비스는 저평가된 보험 회사 주식을 매수 후 보유함으로써 부를 일궜다. 그는 최고의 투자처를 찾아 세계를 돌아다녔고, 미국에서 발판을 구축한 후 일본 내에서 찾을 수 있는 투자 기회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일본에서 큰 성공을 거둔 후, 아프리카, 유럽, 중동 및 러시아 등 다른 국가에도 투자했다.
데이비스는 투자 초기 몇 년 동안에는 업계 대표 종목들을 매수했다. 여기에는 후에 AIG(American International Group Inc.)로 개칭한 AIU(American Insurance Underwriters)와 현재는 AFLAC인 AF(American Family)가 포함되어 있다. 일본에서는 일부 저평가된 종목, 즉 도쿄 해상화재(Tokio Marine & Fire), 스미토모 해상화재(Sumitomo Marine & Fire), 다이쇼 해상화재(Taisho Marine & Fire) 및 야스다 해상화재(Yasuda Marine & Fire)를 찾아냈다.
데이비스는 지난 세기 후반부 동안의 거의 모든 가치 투자자들과 마찬가지로, 상당 규모의 게이코(GEICO) 주식을 보유했다. 그는 게이코가 파산 위기에 처했을 때 그 주식을 매수하기 시작했고, 이사회에서 한자리를 얻기 충분한 규모로까지 규모를 늘렸다. 게이코는 과도한 기업 확장, 인플레이션, 연방정부의 가격 통제, 잘못된 위험 관리 및 회계 문제가 합해져 고전을 면치 못했으며, 1975년 36년 역사상 처음으로 손실을 보고했다. 이즈음부터 데이비스는 게이코의 주식을 매수하기 시작했다.
게이코는 트레블러스 보험 출신의 데이비드 번(David Byrne)을 부사장으로 영입해 구조조정 작업을 시작했다. 7,000명이던 게이코의 임직원을 4,000명으로 줄였다. 규제가 과도한 지역에서 철수했고, 일부 지역에서는 보험료율을 40%까지 올렸고, 보험 기준을 강화했다. 유감스럽게도 이런 과감한 조치로도 게이코의 대차 대조표는 개선되지 않았고, 데이비드 번은 더 과감한 조치를 취해야 했다. 그는 27곳의 경쟁 보험사를 설득해 게이코가 파산을 피할 수 있도록 자본을 빌려왔고, 워런 버핏의 도움으로 7,500만 달러 상당의 전환 우선주를 발행했다.
이 시점에 데이비스는 게이코의 지분을 팔아버렸다. 그는 게이코의 자본 확충에 실망했고, 더 이상 게이코와의 어떤 관계도 원치 않았다. 데이비스가 떠난 후 버핏이 들어왔다. 버핏은 처음 주당 2달러로 총 410만 달러 상당의 게이코 주식을 매수했다. 5년 후 게이코의 주가는 15달러를 기록했다. 버핏은 계속해서 게이코 주식을 매수했다. 마지막으로 1995년 버크셔는 총 주당 70달러로 게이코의 지분 나머지를 인수했다.
데이비스는 게이코 주식을 팔아버린 후, AIG의 지분을 늘렸고, 곧 보험업계에 대한 관심을 잃기 시작했다. 데이비스는 장기적인 관점의 가치 투자자에서 데이트레이딩으로 전략을 바꿨다. 그는 밸류 라인(Value Line)을 이용해 저평가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수백 종목의 주식으로 커다란 포트폴리오를 구축했다. 그 후 이들 종목을 작은 이익을 보면서 거래했으며, 횡보장에서 수익을 짜냈다.
데이비스가 투자 후반기 동안 보험업계에 투자하지 않았지만, 데이비스의 가장 성공한 투자처 중 11곳이 보험사였다. 이들 중 일부는 세상을 뜨기 전까지 포트폴리오에 남아 있었다. 여기에는 버크셔 해서웨이(Berkshire Hathaway), AON, 토치마크(Torchmark), 처브(Chubb), 캐피탈 홀딩스(Capital Holdings), 도쿄 해상화재, 스미토모 해상화재, 다이쇼 해상화재 및 야스다 해상화재가 포함되어 있다.
정리
데이비스의 투자 전략에서 배울 수 있는 한 가지가 있다면, 바로 몇 가지 크게 성공적인 투자로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훌륭한 포트폴리오 수익률을 올릴 수 있다는 사실이다. 데이비스의 삶과 투자 스타일에 대해 더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다면, 존 로스차일드가 펴낸 『전설의 투자가문 데이비스(The Davis Dynasty)』를 보기 바란다. 데이비스의 삶과 그의 자세한 투자 전략에 대한 좋은 평전이다.
이 책에는 데이비스의 4가지 핵심 투자 스타일이 잘 요약되어 있다. 데이비스 본인이 직접 밝힌 자신의 투자 스타일은 없다. 아래 목록은 이 책의 저자가 오랜 기간에 걸쳐 데이비스의 투자 스타일을 관찰해 모아 놓은 것이다.
- 소형이며, 비유동성이고, 인기가 없는 기업에 초점을 맞춘다. 데이비스는 시장의 한 부문에서 주가가 낮고, 인기가 없기 때문에 시가총액이 아주 작은 종목에 초점을 맞췄다. 그는 투자 초기에 자기가 알고 이해하는, 보험 업계에서 소외되어 있던 보험 회사에 투자했다.
- 자기 능력 내에서 투자한다. 데이비스는 보험 업계를 잘 알고, 이해했다. 그 당시 가치 투자 측면에서 보험 업계의 가치를 이해하는 투자자는 아주 드물었다. 소형이며, 비유동성이고, 인기가 없는 기업에 투자하는 경우, 자신이 어떤 기업에 투자하는지 아는 게 중요하다. 데이비스는 이런 접근 방식을 통해 자신의 능력에 대해 어느 정도 신뢰를 가지고 자기 포트폴리오에 집중할 수 있었다.
- 장기적인 투자 관점을 갖는다. 위에 언급한 바와 같이, 데이비스가 가장 좋은 수익을 올려 투자 성공에 기여했던 투자처 중 11곳이 투자 초기 몇 년 동안 매수한 것이었다. 너무 빨리 팔아버렸던 게이코 말고는, 데이비스의 포트폴리오 중 다른 최상위 투자처 모두는 다년간의 투자 기간을 염두에 두고 매수했던 것이었다.
- 장기적인 투자 관점은 데이비스가 약세장에서 냉정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1973년에서 1975년 사이, 5,000만 달러에 달했던 데이비스의 포트폴리오는 60%의 손실을 입어 2,000만 달러까지 줄어들었다. 하지만 시장이 반등했을 때 데이비스의 포트폴리오도 반등했고, 반등 내내 주식을 매수했다. 그는 “하락장에서는 위대한 기업들의 주식을 유리한 가격으로 더 많이 살 수 있게 해준다. 여러분이 그 사실을 알았다면, 그런 시기에 많은 돈을 벌었을 것이다. 단지 그런 사실을 한참 나중에서야 알게 될 뿐이지만 말이다.”라고 지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