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 어떤 책을 읽다보니 제1차 세계대전 때 미국이 왜 독일 편이 아니라 영국 편을 들게 되었는지가 색다른 방식으로 설명되더군요. 원래 미국은 영국의 식민지로 시작하긴 했지만, 정작 미국내 최대 민족은 독일계이고, 영국계는 고작 제 3위입니다. 제 2위 민족은 영국과는 원수지간이라고 할 수 있는 아일랜드계라고 하더군요.
언어 때문에 미국이 영국에 좀더 끌리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미국인들은 정서적으로 독일에 대해서도 나쁘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초기에는, 미국의 감정은 ‘유럽놈들, 지들끼리 싸우다 다 죽어버려라’ 정도였다고 합니다. 당연히 미국은 영국과 프랑스는 물론, 독일에게도 많은 물자를 수출하여 돈을 벌었습니다.
그런데 왜 미국이 영국편에 서서 독일에 맞서 싸우게 되었을까요 ? 사실상 독일과는 원수진 일도 전혀 없었는데 말이지요. 원수진 일이 좀 있기는 했습니다. 독일의 유보트가 미국인들이 많이 탄 루시타니아호를 격침한 사건이 있었지요. 게다가 독일이 멕시코에게 미국 침공을 부추겼던 짐머만 사건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이유로 미국이 바다를 건너가 수많은 자국 젊은이들을 희생시켜가며 강대국 독일과 전쟁을 벌인다니, 좀 의아스러운 점이 많습니다.
먼저, 루시타니아호 이전에도 독일 잠수함이 미국인들이 탄 선박을 격침한 경우는 꽤 많았습니다. 논란이 된 루시타니아 호야 영국 선박이지만, 그 이전에도 독일은 영국으로 군수품을 싣고 가던 미국 선적의 화물선을 격침시켜 재산 뿐만 아니라 인명 손실을 낸 경우도 꽤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때만 하더라도 미국은 독일에 대해 전쟁을 벌인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영국 선박인 루시타니아 호가 격침되면서 미국 시민들이 죽었다고 전쟁 참전을 결정한다는 것은 좀 이상하지요.
게다가 짐머만 사건도 생각해볼 부분이 있습니다. 당시 독일은 유럽 전선의 유지에도 힘에 부치는 상황이었습니다. 아무 힘도 없는 멕시코와 동맹한다고 해도, 바다 건너 미국에 선제 공격을 가해 승리를 거둘 확률은 0에 수렴했습니다. 그런데도 왜 독일은 얌전히 있는 미국이라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렸을까요 ?
이 모든 것의 배경에는 영국 해군이 있다는 것이 그 설명의 요지였습니다. 위에서 설명드렸듯이, 미국은 애초에 영국과 독일 양측에 신나게 물자를 팔아댔습니다. 이미 19세기 말에 미국의 공업력은 영국과 독일, 프랑스를 다 합친 것보다도 더 컸습니다. 전쟁이 벌어지면 당연히 밀가루부터 시작하여 구두용 가죽, 화약, 철강, 구리, 나사못 등등 온갖 물자가 무한정 필요했으므로, 영국이나 독일이나 공업 대국이자 농업 대국인 미국으로부터의 물자 수입이 절실했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시작되면서, 영국 해군이 독일의 항구를 봉쇄하기 시작했습니다. 전통적으로, 전쟁이 벌어져도 제3국 선박은 전쟁과는 상관없는 금수품(contraband)이 아닌 상품에 대해서는 자유로운 통상이 허용되는 것이 정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총력전, 장기전이 되면서, 의약품이나 밀가루, 냉동 쇠고기 같은 기본 생필품도 다 차단해버리는 것이 전쟁의 승리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었고, 당연히 영국은 우세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독일의 해외 통상을 막았습니다.
이렇게되자, 미국은 영국을 비롯한 연합국 측에만 물건을 팔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실 미국으로서야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에도 수출을 하면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으므로 좋았겠지만, 영국 해군이 두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으니 그것이 불가능했던 것이지요.
그러다보니, 독일은 코너에 몰리게 되었고, 독일의 입장에서는 어차피 내가 못 먹는 것 남도 못 먹게 하자는 식으로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펼치게 되었던 것입니다. 즉 연합국으로 가는 모든 상선과 여객선을 다 격침시켜버리겠다는 것이었지요. 이는 미국의 이익을 크게 해치는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이제 물건을 팔고 받은 채권은 다 영국이나 프랑스 것이었는데, 영국이나 프랑스가 전쟁에 지기라도 하면 그 채권을 몽땅 떼일 판국이었으니, 어떻게든 연합국이 승전하도록 돕는 것이 미국의 이익에도 일치하는 것이었지요. 그것이 수많은 미국 젊은이들을 사지로 내모는 일이라고 할지라도요.
결국 영국 해군 때문에 결국 영국 편이 될 것이 뻔했던 미국을 조금이라도 발을 묶어두려고 독일이 꾸민 무리수가 바로 짐머만 사건이었고, 이는 미국의 대독전 참전에 좋은 구실 역할만을 할 뿐이었습니다.
영국이나 독일이나 똑같이 해양 통상을 방해했지만, 영국 해군은 뭔가 좋은 인상을 남겼고 반대로 독일 해군은 악당 역할을 하게 된 점은 달랐습니다. 그 차이는 영국 해군은 수상 함대 전력이 막강했지만, 독일 해군은 그렇지 못하여 부득이 잠수함에 의존해야 했다는 점에서 왔습니다.
독일로 향하는 선박이 있을 경우, 영국 해군은 구축함이나 순양함으로 그 상선을 정선시키고 거기에 탑승하여 그 선박의 화물을 뒤져 금수품이 있는지 확인하고, 만약 있을 경우 선박을 나포하는 형태의 비교적 얌전한 전통적 봉쇄 활동을 펼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무장이 빈약한 잠수함으로나 대양에 나갈 수 있었던 독일 해군은 그럴 여력이 없었던지라 그냥 다짜고짜 어뢰를 발사하여 격침시켜버리는, 인명 살상까지 동반한 과격한 봉쇄 활동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전쟁 초기에는 독일 잠수함들도 중립국 상선을 위협하여 정지시킨 뒤, 금수품이 발견되면 (어차피 영국 해군이 득실거리는 바다에서 나포란 상상도 할 수 없었으므로) 선원들을 보트에 내리게 한 뒤 어뢰로 격침하는 방법을 썼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방식은 너무나 시간도 많이 걸렸고, 또 잠수함이 상선보다 그다지 빠른 편도 아니라서 상선을 협박하여 정지시키는 것도 어려웠던데다, 망망대해에 선원들을 조각 보트에 태운채 내버려두는 것도 몹쓸 짓이라는 비난도 많았기 때문에, 결국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펼치게 되었다고 하는군요.
이래서 ‘수도를 함락당하고도 전쟁에 이긴 사례는 많지만, 바다를 잃고서도 전쟁에 이긴 사례는 없다’라는 말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전쟁이 벌어졌을 때 상대 국가에 대해 해양 봉쇄를 실시했던 사례는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요 ?
그것까지는 모르겠고, 이미 미국 독립 전쟁 당시 영국은 그런 해상 봉쇄를 시도했습니다. 다만 당시 봉쇄 지역이 긴 북아메리카 해안선이었고, 지중해 등에서도 작전이 벌어졌던 관계로 영국 해군은 대서양 동서부에 너무 넓게 분산되어 별다른 효과를 보지는 못했습니다. 덕택에 미국은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각국과 교역을 계속할 수 있었지요. 그 결과 미국은 무사히 독립을 쟁취할 수 있었고, 영국 해군은 크게 체면을 구겼습니다.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고 제1차, 곧이어 제2차 대불 동맹전쟁이 벌어지면서, 영국 해군은 다시 해양 봉쇄에 나섰습니다. 이렇게 되자 가장 기뻐한 것은 영국 해군 함장들이었고, 가장 슬퍼한 것은 당연히 프랑스 무역업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 무역업자들 외에도, 스웨덴이나 덴마크 등의 기타 중립국이었던 북유럽 국가들도 무척 큰 피해를 입어야 했습니다. 프랑스는 대단한 덩어리를 보유한 당대 유럽 최대 경제국이었으므로, 당연히 북유럽 국가들도 프랑스와 이런저런 무역을 많이 했는데, 그 활동이 당장 방해를 받게 된 것입니다. 영국 해군 함장들이 좋아라했던 이유는 간단합니다. 나포 포상금 (prize money, 1804년, 스페인 보물선 함대를 둘러싼 모험 참조) 때문이었지요. 나포 포상금은 그저 적국의 군함 뿐만 아니라, 적국의 상선을 나포한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하나 생깁니다. 요즘도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만, 가령 소유권은 어느 미국의 자본가에게 있는 화물선의 선적(배의 주소지)이 파나마이고, 정작 운항은 영국 선장 지휘 하에 말레이지아 선원들이 수행하고 있다면 이 배는 대체 어느 나라의 배라고 생각해야 할까요 ? 특히 그 화물선이 수송 중인 화물이 스페인산 포도주인데 그 화물 소유권은 독일인이라고 하면 더욱 골치가 아파집니다.
당시 유럽은 보호 무역이 성행하고 있었으므로 평상시라면 프랑스 화물은 반드시 프랑스 선적의 배를 이용하는 것이 원칙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런 제약은 1651년 크롬웰이 항해조례를 발표하여 네덜란드의 세력을 꺾는데 크게 재미를 본 이후 유럽에서 널리 사용되었지요. 그러나 전쟁이 벌어지면서 프랑스 선적의 배들이 항구에 발이 묶이게 되자, 프랑스로 가는 화물을 스웨덴이나 덴마크, 나폴리, 심지어 한때 적국이었던 프러시아 선박까지도 앞다투어 실어나르게 되면서 이들 국가의 해운업이 반짝 번영하게 되었지요.
이와는 반대로, 영국 해군 함장들은 골치가 아파지게 되었습니다. 겉으로 볼 때 덴마크 국기를 휘날리며 프랑스 영해 바로 바깥 쪽을 항해 중인 화물선을 어떻게 처리해야 했을까요 ? 당시 관행상, 군함조차도 엉뚱한 나라의 깃발을 게양하는 것을 ruse de guerre (위장 전술, 나폴레옹 당시의 해전 참조) 라고 하여 수시로 사용했기 때문에, 단순히 깃발만 보고서는 저것이 덴마크 화물선인지 프랑스 화물선인지 구분하기 어려웠습니다. 특히 해운업의 특성상 프랑스 선박에도 덴마크인이나 나폴리인, 미국인 등 다양한 국적의 승무원들이 타고 있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배 근처에 접근하여 말을 붙여 보아도 명확히 알기는 어려웠습니다.
결국 영국 해군이 채택한 방법은 공해상에서도 선적에 상관없이 중립국 선박이라고 할지라도 무조건 정선시켜 그 배에 강제로 승선, 그 선장을 취조하고 관련 서류를 점검하고 또 선창에 적재한 화물을 마음대로 뒤져보는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 이 배가 독일 함부르크에서 화약의 원료가 되는 초석을 잔뜩 싣고 출항했는데 목적지가 포르투갈의 리스본이라고 되어있지만 의심스럽게도 지중해 안쪽인 프랑스 툴롱 인근 해역에서 얼쩡거리고 있다면, 이건 프랑스로 가는 금수품(contraband)을 싣고 가는 것이라고 판단하여 나포하는 조치를 취했습니다.
가령 1800년 7월, 덴마크 군함이 호송하는 화물 선단 하나가 당시 프랑스의 속국이나 다름없던 네덜란드 오스탕드(Ostend) 앞바다를 항해하다가 영국 해군의 정지 명령 및 검색에 응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덴마크 군함은 이를 거부했고, 만약 검색을 강행하려 할 경우 발포하겠다는 입장을 명확히 했습니다. 영국 해군의 규모가 압도적이었으므로 영국 해군은 덴마크 군함의 거부 표시를 개무시하고 강제 검색에 들어갔는데, 덴마크 군함은 정말 영국 군함에 발포했고, 이는 곧 영국의 응사로 이어졌습니다. 결과는 당연히 영국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고 전체 화물 선단이 모조리 영국에 나포되어 버렸습니다.
당연히 이런 조치는 중립국들의 강력한 반발을 초래했습니다. 실제로 뭔가 불가피한 사정이 있어서 프랑스 인근 해역을 항해하게 된 것일 수도 있고, 또 뭔가 사정이 있든없든 엄연한 공해인데 프랑스 인근 바다를 항해한다고 선박과 화물을 빼앗아간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었지요. 당연히 모든 나포 선박들은 실제로 프랑스에 금수품을 수송할 의사가 있었건 없었건 영국 정부에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재판을 거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종종 그 재판에서 이기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럴 경우 영국 정부가 아닌, 그 화물선을 나포했던 영국 해군 함장이 그 피해액을 보상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해당 함장이 원래 돈많은 집안 출신이 아니라면 파산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지요. 그러니까 영국 해군의 나포 포상금은 달콤한 만큼 잠재적인 독이 든 사과였던 것이지요. (Patrick O’Biran의 명작 Aubrey-Maturin 시리즈의 주인공 잭 오브리도 이런 식으로 파산을 당하는 비극을 Post Captain 편에서 겪게 됩니다. 국내에서는 황금가지사에서 이원경씨의 번역으로 출간되었는데, 번역 괜찮습니다. 재미있으니 꼭 읽어보십시요.)
당시 유럽 중립국들이 영국 해군의 공해상에서 저지르는 이런 횡포에 대해 가만히 당하고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특히 신생국인 미국과의 관계는 점점 험악해져서 1812년 결국 전쟁까지 치르게 되지요. 특히 미국과의 사이가 크게 벌어졌던 것은 같은 언어를 쓴다는 특성상 영국 해군 탈주병들이 미국 선박의 승무원으로 꽤 많이 복무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영국 해군이 공해상에서 금수품 조사를 한다면서 무단으로 미국 선박을 정지시키고 화물 뿐만 아니라 선원들도 조사하여, 영국 억양이 있거나 하면 영국 해군 탈영병이 틀림없다며 마구 체포하는 만행을 저질렀던 것이지요.
미국과 영국의 전쟁은 10년 뒤 이야기이고, 1800년 즈음 당시의 제2차 대불 동맹전쟁 때도 이런 영국 해군의 만행에 반발하는 군사 조치가 있기는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제2차 무장 중립 동맹 (the 2nd League of Armed Neutrality)입니다. 제2차 ? 그럼 제1차도 있다는 이야기인가요 ? 예, 있었습니다. 바로 미국 독립전쟁 당시인 1780년에 러시아의 여제 예카테리나 2세가 영국 해군의 무차별 정선 및 검색에 대항하여 주창한 것으로서, 덴마크-노르웨이 왕국과 스웨덴 왕국이 여기에 가담하여 제1차 무장 중립 동맹을 맺고 영국 해군의 공해상에서의 검문 검색에 저항하기로 했습니다.
실제로 러시아는 해군 함대를 대서양과 지중해까지 파견하여 무력 시위를 펼쳤지요. 하지만 실제로는 영국 함대의 전력이 이들 찌질한 북방 국가들보다는 훨씬 강했으므로 러시아가 큰소리를 칠 형편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영국 역시 미국, 그리고 미국의 독립을 응원하는 프랑스와 한참 전쟁 중에 러시아까지 적으로 돌리고 싶지는 않았으므로 굳이 러시아와의 무력 충돌을 일으키지는 않았습니다.
특히 당시 영국 해군의 주요 해군 물자는 대개 발트해 연안국인 스웨덴이나 노르웨이 쪽에서 나오고 있었으므로 (영국의 전략 자원, 노르웨이의 숲 참조) 더욱 이들 북방 국가와의 무력 충돌은 피하고자 했지요. 덕택에 나중에는 이 무장 동맹에 오스트리아나 나폴리 왕국, 네덜란드, 심지어 오스만 투르크까지 가입했고 ,결국 영국은 미국 독립 전쟁에서 쓰디쓴 패배를 맛보았습니다.
자, 그럼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으로 촉발된 제2차 대불 동맹전쟁 당시의 무장 중립 동맹에 대해서 보시지요. 이때도 영국 해군의 무차별 검색에 저항하는 동맹의 주창자는 러시아의 짜르 파벨 (Paul) 1세였습니다. 그런데 러시아는 대불 동맹 전쟁의 당사자 아니었던가요 ? 제3국도 아니고 전쟁 당사자가 갑자기, 그것도 적국인 프랑스와 교역을 하겠다는 이유로 동맹국인 영국에게 대포를 들이대는 것은 대체 무슨 해괴한 경우일까요 ? 여기에 얽힌 스토리가 또 다소 깁니다.
전에 나폴레옹이 이집트로 원정을 떠나는 항해길에 거저 줍다시피 점령했던 말타 섬이 그 시초였습니다. 이때 말타 섬에서 쫓겨난 말타 기사단은 흘러흘러 러시아에 보금자리를 정하고, 아예 러시아의 파벨 1세를 기사단 단장, 즉 그랜드 마스터로 선출합니다. (말타에서 생긴 일 참조) 파벨 1세가 약간 괴짜 군주이긴 했어도, 단순히 폼이 난다는 이유로 말타 기사단의 그랜드 마스터에 취임할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사실 말타섬이 탐났던 것입니다. 그때도 이미 러시아는 겨울에도 얼지않는 부동항을 얻고자 노력하고 있었는데, 추운 나라에서 벌벌 떨던 러시아 해군에게 따뜻한 지중해 한복판의 요지에, 그것도 이미 튼튼한 발레타 요새까지 마련된 말타섬만큼 탐나는 해군 기지가 어디 있겠습니까 ? 그래서 러시아는 사실 자신에게 아무런 해도 입히지 않은 프랑스에게 뜬금없이 선전포고도 하고 수보로프 장군에게 대군을 딸려보내 먼 이탈리아와 스위스에서 피를 흘리게 했던 것입니다. (나폴레옹, 알프스를 넘다 참조)
그런데 일이 묘하게 돌아갔습니다. 마침내 1800년 9월에 말타섬의 프랑스군이 영국군에게 항복하면서 철수했으나, 말타섬이 러시아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입니다. 영국이 그대로 말타섬에 주저 앉을 기세였던 것이지요. 러시아로서는 아주 기분이 팍 상할 상황이었지요. 어차피 이탈리아로 갔던 러시아 원정군이 이미 1799년에 마세나에게 패배하는 바람에 이미 대불 동맹 전쟁도 때려친 마당에, 더 이상 영국에게 알랑거릴 이유가 없어진 것이지요. 결국 러시아의 파벨 1세는 1800년 12월, 20년 전의 추억을 되살려 덴마크-노르웨이 왕국과 스웨덴 왕국에게 제2차 무장 중립 동맹을 결성합니다.
사실 알고보면 러시아는 이런 무장 중립 동맹을 맺을 이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정작 러시아는 선박을 이용하여 프랑스와 무역할 일이 거의 없었거든요. 이건 파벨 1세의 분풀이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덴마크-노르웨이나 스웨덴에게는 이야기가 달랐습니다.
이들 국가는 영국과 프랑스 양쪽 국가에 이런저런 해군용 군수품 (그래봐야 목재, 밧줄, 뭐 그런 임업 제품이 대부분)을 많이 팔았거든요. 이들 국가에게는 러시아라는 든든한 빽을 등에 업고 프랑스와 교역을 계속할 수 있다는 것은 대단히 솔깃한 이야기였습니다. 당연히 이들 국가는 이게 왠떡이냐 하며 러시아의 제안을 받아들였던 것이지요.
이 무장 중립의 요지는 다음과 같은 5개의 선언이었습니다.
– 모든 중립국은 교전 당사국의 항구와 해안을 자유롭게 항해할 권리를 가진다.
– 교전 당사국 국민이 소유한 화물일지라도, 금수품이 아닌 이상, 중립국 선박으로는 자유롭게 운송될 수 있다.
– 해양 봉쇄는 적법한 것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근접 감시에 의해 수행되어져야 한다.
– 중립국 선박은 ‘정당한 이유와 명백한 사실에 근거해서만’ 체포될 수 있다.
– 선단의 호송을 맡은 군함의 함장이 해당 선단에 금수품이 없다고 선언하면, 해당 선단은 어떤 검색도 받지 않을 권리를 가진다.
즉 요약하자면 금수품이 아니라면 영국 해군의 방해를 받지 않고 프랑스와 자유롭게 교역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영국으로서는 이건 해양 봉쇄를 포기하라는 말이나 다름없었습니다. 특히 호송 군함이 딸린 선단의 경우, 지휘 함장의 ‘금수품 없다’라는 말 한마디면 검색을 못한다니 이런 법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세상에 어떤 함장이 ‘실은 우리 선단에 금수품이 있긴 합니다’ 라고 말을 하겠습니까 ?
실제로 알고 보니 그 선단의 화물선 한척에 프랑스로 향하는 화약 30통이 선창에 몰래 숨겨져 있다고 해도, ‘아, 저는 몰랐습니다. 그 화물선 선장이 저를 속였나 보군요.’ 라고 한마디만 변명하면 끝일텐데 말입니다. 게다가 더 심각한 것은 여러 나라들 간에 금수품의 정의가 크게 달랐다는 것입니다. 가령 화약 같은 것이야 명확하겠지만, 100년 묵은 떡갈나무로 만든 ㄱ자 모양의 곡재에 대해서는 영국과 스웨덴의 관점이 완전히 달랐습니다. 이런 목재는 군함을 만드는데 필수적인 핵심 부품이기도 했지만, 그냥 일반 화물선에 사용되기도 하는 흔한 물건이었던 것입니다. 기타 타르, 밧줄, 강철괴 등등 보는 관점에 따라서 금수품이기도 하고 일반 화물이기도 한 상품은 너무나도 많았습니다.
나폴레옹은 이런 움직임을 관측하고는 얼른 러시아와 북방 국가들의 편을 들어주었습니다. 그러면서 러시아와 프랑스는 이제 전쟁 상태가 아님을 선언하고, 모든 러시아 국적의 선박에 대한 공격 행위를 중단시켰습니다. 사실 당시 바다에 프랑스 군함도 별로 없었고 러시아 선박도 별로 없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는 괜히 남의 나라들을 이간질하는 뻔한 선전 행위에 불과했습니다.
나폴레옹의 이간질과는 무관하게, 당연히 영국은 이 무장 중립 동맹을 사실상의 프랑스와의 동맹이라고 간주했고, 이를 깨뜨리기 위해 모든 수단을 쓸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이 설사 러시아와의 일전을 뜻한다고 하더라도 말이지요. 특히, 이번에는 저 대서양 너머 북아메리카 해안지방까지 다 감시할 필요는 없었으므로, 영국 해군성은 이번이야말로 영국 해군의 집중된 힘을 보여줄 기회라고 판단했습니다.
1801년 초, 영국 해군은 영국 동해안의 야머스 (Great Yarmouth) 해안에 대규모 함대를 집결시키기 시작합니다. 불과 작년 12월에 이 무장 중립 동맹이 결성된 것을 생각하면 엄청나게 빠른 반응이었지요. 이렇게 신속한 대응의 이유는 하나였습니다. 봄이 되어 러시아의 크론슈타트 (Kronstadt)와 레발 (Reval) 등의 군항의 얼음이 녹아 러시아 함대가 출항할 수 있기 전에 먼저 덴마크부터 친다는 것이었습니다. 왜 하필 덴마크가 제1의 목표가 되었던 것일까요?
간단했습니다. 덴마크가 발트해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었거든요. 러시아를 치기 위해 발트해로 들어가려면 먼저 걸리적거리는 덴마크부터 쳐야 했습니다. 그 다음에 러시아의 크론슈타트로 항진하여 그대로 러시아 해군을 궤멸시킨 뒤, 만약 스웨덴이 러시아를 응원하러 기어나오면 스웨덴도 마저 응징한다는 것이 영국 해군의 기본 계획이었습니다. 즉, 만약 스웨덴이 도발하지 않는다면 스웨덴은 일단 내버려둔다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영국 해군의 뼈와 살을 이루는 떡갈나무가 대부분 다 스웨덴에서 오는 것이었으니, 가급적 스웨덴과의 관계는 최악으로 치닫게 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지요.
이렇게 중대한 원정길에는 당연히 상당한 규모의 함대, 즉 전열함만 12척에 5척의 프리깃이 집결했고, 또 유사시 덴마크의 수도인 코펜하겐을 직접 폭격하기 위해 박격포함 (bomb ketch, 덴마크의 몰락과 미국 국가 작사에 관련된 군함 이야기 참조) 7척과 이런저런 소형 함정들도 많이 집결시켰습니다. 게다가 유사시 아예 상륙전을 펼치기 위해 제49 보병 연대를 통째로, 그리고 제95 라이플 연대에서 2개 중대의 라이플 소총병들을 함께 데려갔을 뿐만 아니라 육군의 포병대도 동반시켰습니다. 이런 대함대의 사령관으로는 당연히 가장 유능한 제독이 임명되어야 했는데… 일단은 그냥 당장 보직이 없는 제독 중 가장 선임자였던 파커 (Sir Hyde Parker) 제독이 임명되었습니다.
이는 연공 서열 위주였던 영국 해군의 고질적인 문제였지요. 사실 파커 제독은 이렇게 군사적으로 위험하고도 외교적으로 미묘한 업무에 전혀 어울리는 적임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미 고령인데다 최근에 화끈한 전투를 치루어본 적도 없었고, 또 추운 날씨는 질색이었던데다, 무엇보다도 최근에 젊은 아가씨에게 새 장가를 간 직후라서 아직 찬바람이 쌩쌩부는 황량한 발트해로 항해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영국 해군성에서도 이런 사정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 함대의 지휘부에 좀더 젊고 뜨거운 피를 수혈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딱 알맞는 적임자가 영국에 돌아옵니다. 바로 넬슨 (Horatio Nelson) 제독이었지요.
넬슨은 이미 세인트 빈센트 (St. Vincent) 전투와 나일 강 전투 (넬슨의 불꽃놀이 – 아부키르 해전 참조)에서 불멸의 영광을 쌓은 영국 해군의 영웅이었습니다. 그런데 넬슨도 수컷이랍시고, 나폴리 왕국에서 엠마 해밀턴 부인과의 염문으로 그간 쌓은 영광을 아주 빠른 속도로 말아먹고 있었습니다. 특히 엠마 해밀턴이 남편을 따라 귀국하자 그를 따라 냉큼 영국으로 귀국을 하여 넬슨의 평판은 아주 바닥을 치고 있었습니다.
영국 해군성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영웅이 이런 식으로 망가지는 것이 전혀 달갑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넬슨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를 엠마에게서 떼어놓을 것은 딱 하나, 바로 화끈한 해전이었지요. 해군성은 넬슨에게 즉각 야머스에 가서 파커 제독의 함대에 제2인자로서 합류하도록 명령서를 내립니다.
해군성의 기대대로, 넬슨은 즉각 출항하기를 원했으나, 파커 제독은 어린 새 아내가 참석하고 싶어했던 무도회가 끝나기 전에는 움직일 생각이 없었습니다. 물론 이런 대함대에는 항상 뭔가 준비가 부족했으므로 (물통, 화약, 밧줄, 염장 쇠고기, 수병 충원 등등) 출항을 미룰 핑계거리는 충분했거든요. 하지만 결국 넬슨의 등쌀에 못 이겨 파커는 3월 12일 출항을 합니다. 결국 알고 보니 넬슨은 2인자가 아니라 1.5인자(박명수는 쩜오라고 부르더군요)였던 것이지요.
파커도 바보가 아닌지라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넬슨과 파커의 관계는 그다지 돈독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넬슨도 저 잘난 맛에만 취해 있는 사람은 아니었던지라, 부하 장교가 우연히 잡은 가자미 한마리를 파커에게 선물로 보내면서 관계 개선을 시도했고, 이런 소소한 정성에 파커도 마침내 넬슨에게 마음을 열었다고 합니다.
출항한지 4일만에 함대는 크리스티안산(Kristiansand, 스칸디나비아반도 최남단) 앞바다에 도착했고 여기서 2일간 폭풍을 만나 고생을 한 뒤 3월 21일 드디어 사운드(Sound, 덴마크와 스웨덴 사이의 좁은 해협으로서, 덴마크 말로는 Øresund 외레순이라고 읽습니다) 앞에 도착합니다.
여기서 좀더 영국 함대는 코펜하겐이 위치한 큰 섬인 젤란트(Zealand, 덴마크어로는 Sjælland 셸란)의 서쪽 항로, 즉 영국이 벨트(the Belt)라고 부르는 해협을 통해 크게 빙 돌아서 코펜하겐을 남쪽으로부터 접근하느냐, 아니면 곧장 사운드 해협을 건너 코펜하겐으로 가는 최단거리인 북쪽으로부터의 접근로를 택하느냐 고민을 합니다.
양쪽 항로 모두 각각 장단점이 있었거든요. 벨트 쪽은 방어진지가 거의 없어 육상으로부터의 포격 걱정은 없었지만 물길이 험해 잘못하다간 좌초의 위험이 있었고, 사운드 쪽은 반대로 물길은 안전한 편이었지만 그 해협의 덴마크 쪽 해안인 헬싱괴르(Helsingor)에는, 크론보르(Kronborg) 요새, 즉 세익스피어의 햄릿의 무대가 되었던 엘시노어 (Ellsinore) 요새가 폭 5km 정도의 해협을 장악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특히 이 크론보르 성 바로 건너편에는 무장 중립 동맹의 맹방인 스웨덴의 헬싱보리(Helsingborg)의 요새가 버티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 사운드(또는 외레순) 해협을 건너자면 반드시 양쪽 요새의 포격 범위를 통과해야만 했습니다. 결국 덴마크제 또는 스웨덴제의 포탄의 위협이냐 보이지 않는 암초의 위협이냐 중에서 선택을 해야 했지요. 파커 제독은 벨트 쪽을 선호했습니다만, 이번에도 역시 ‘더 빨리 싸우러 가자’는 넬슨의 성화에 영국 함대는 사운드 쪽으로 향합니다. 파커 제독은 그래도 좀더 안전하게 이 해협을 통과하고자 크론보르 성의 덴마크 수비대 사령관에게 ‘우리 서로 좋게 그냥 통과하게 해달라’고 요청하지만, 덴마크 사령관은 단호하게 발포하겠다고 선언합니다. 별 수 없이 영국 해군은 단호한 입장의 덴마크 쪽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져 스웨덴 헬싱보리 요새 바로 턱 밑에 바싹 붙어 사운드를 통과했습니다. 이때가 3월 30일 오전 7시 경이었는데, 영국 해군에게는 다행히, 그리고 덴마크 측에게는 실망스럽게도, 명색이 동맹인 스웨덴의 헬싱보리 요새포들은 전열함 12척의 위용에 짓눌려 침묵을 지켰습니다.
이렇게 사운드를 무사 통과한 영국 함대와 코펜하겐 사이에는 이제 아무런 장애물이 없었습니다. 장애물이 있다면 딱 하나, 바로 덴마크 해군이었지요. 영국 함대는 아마거(Amager) 섬 동쪽에 자리를 잡고 이제 코펜하겐의 방어 준비가 어떤 식으로 진행 중인지 염탐을 했습니다. 파커와 넬슨을 비롯한 영국 함대 지휘부 전원이 작은 프리깃함 아마존(Amazon) 호를 타고 코펜하겐 근처까지 접근하여 정찰을 수행했는데, 그 정찰 결과는 한마디로 ‘만만치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영국에 비해 덴마크는 작은 나라였습니다. 영국 해군 입장에서는 한개 함대를 파견했을 뿐이지만, 사실 이 함대는 영국 전체 함대의 약 1/8에 해당하는 규모였고, 이 정도만 되어도 덴마크에게는 국가의 흥망이 걸린 심각한 위협이었습니다. 따라서 덴마크는 거국적인 저항선을 펼쳤는데, 아무래도 덴마크 해군의 규모가 영국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지라, 정상적인 함대 결전으로는 도저히 승산이 없다고 이미 결론이 내려졌었습니다.
따라서, 덴마크군은 ‘폼은 안나지만 실속있는’ 방어진을 펼치기로 했습니다. 즉, 보유하고 있던 7척의 전열함에게서 과감하게 돛대와 삭구를 다 제거해버리고 코펜하겐 해안가에 바싹 붙여놓았습니다. 원래 포격전이 벌어지면 돛대나 활대 같은 것은 포탄에 맞아 부러지면서 갑판 위에 떨어져 수병들을 다치게 하므로 순수하게 포격전 관점에서 보면 없는 것이 더 유리했거든요. 이 7척의 전열함만으로는 아무래도 부족하니까 무역선이니 소형 슬룹함이니 하는 11척의 잡다한 크고 작은 배들을 역시 돛대와 삭구를 제거한 채 전열함 사이사이에 배치했습니다. 이것들은 전열함에 비해 상대적으로 작아서 가장 큰 것이 24문의 대포를 장착하고 있었습니다. 이 외에도 일부 전열함과 프리깃함으로 ‘정상적으로’ 남겨두어 코펜하겐 항구 내에 배치해두었습니다. 이들은 혹시라도 영국 함대가 곧장 코펜하겐 항구 내로 쳐들어올 것에 대비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방어 태세를 접한 영국 함대의 입장은 난감 그 자체였습니다. 영국 해군의 장기는 수많은 전투와 항해로 단련된 승무원들을 100% 활용하여 탁 트인 바다에서 화려한 함대 기동을 수행하면서 적 함대의 사이를 파고들어 종사(rake, 넬슨의 불꽃놀이 – 아부키르 해전 참조)를 해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아예 기동전을 포기하여 돛대와 삭구를 다 제거한채 해안가에 딱 붙어 있는 적과 정적인 포격전을 펼치는 것은 그다지 내키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실은 넬슨이 바로 3년전에 이런 적과 맞부딪혀서 성공적으로 박살을 낸 적이 있었지요. 바로 나일 해전의 전투가 딱 이런 모양새로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넬슨은 이렇게 해안가에 늘어선 프랑스 전함들과 해안 사이를 파고 들어 프랑스 해군을 양쪽에서 쌈싸먹는 전법을 썼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여기는 황량한 이집트 해안이 아니라 덴마크의 홈그라운드였던 관계로, 육상에도 큼직한 대포들이 잔뜩 포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특히 트레크로너 (Trekroner, 덴마크-노르웨이-스웨덴의 세개의 왕관이라는 뜻입니다) 포대는 해안에서 바다 쪽으로 불쑥 튀어나오도록 바다속에 말뚝을 박아넣고 그 위에 지은 포대로서, 영국 해군 전함들에게 큰 위협이 되었습니다.
이 모양새를 본 뒤, 3월 30일 저녁 파커 제독은 넬슨을 비롯한 전체 함대의 함장들을 3층 갑판에 98문의 대포를 자랑하는 기함 런던 (HMS London)에 모두 불러모아 작전 회의 (council of war)를 열었습니다. 이 회의에서 넬슨은 과연 어떤 묘안을 내놓았을까요?
넬슨은 원래 지장이라기보다는 용장에 가까운 스타일이었습니다. 나일강 전투에서도 프랑스 전함들과 해안선 사이로 파고 들었던 묘책은 사실 넬슨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당시 선두함 골리앗 호의 함장이던 폴리(Thomas Foley)의 즉흥적인 대응이었습니다. (넬슨의 불꽃놀이 – 아부키르 해전 (하편) 참조) 넬슨의 전략이야 항상 “Never mind manoeuvres, go straight at ’em.” (함대 기동 같은 건 신경쓰지 말게. 그냥 돌격 앞으로.) 였으니까요.
하지만 이날 밤 작전 회의에서 넬슨은 정말 할 말도 많았고 진땀도 많이 흘려야 했습니다. 파커 사령관 이하 다른 장교들 모두가 이런저런 난관에 대해 이야기하며 자꾸 공격을 늦추려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반면 넬슨은 항상 ‘그딴 것 신경쓰지 말고 당장 공격’이라는 입장이었지요. 가령 이런 식이었습니다.
덴마크 해군의 방비가 생각 외로 튼실하다, 좀더 신중하게 공격 준비를 하자
–> (넬슨) 더 기다리면 적의 방어가 더 견고해진다 당장 공격하자
우리가 코펜하겐을 공격하는 동안 러시아 해군이나 스웨덴 해군이 배후를 기습하면 어떻게 하나, 먼저 그쪽 방면을 정찰하자
–> (넬슨) 그러니까 그들이 합세하기 전에 먼저 덴마크부터 서둘러 쳐야 한다 당장 공격하자
우리는 코펜하겐 앞바다의 물길도 잘 모른다, 잘못 들어가다가는 좌초 위험이 있다, 먼저 수로 안내인(pilot)부터 구하자
–> (넬슨) 백날 기다린다고 덴마크 수로 안내인이 우리 쪽으로 투항하겠느냐 당장 공격하자
결국 이날 회의의 승리자는 넬슨이었습니다. 파커 제독은 넬슨에게 원하는 대로 전함들을 내주고 작전도 원하는 대로 혼자서 짜도록 허락을 해주었습니다. 한마디로 파커는 스스로 바지저고리 노릇을 자청했고, 넬슨이 사실상 진짜 대장이라는 것을 인정한 셈이지요. 어떻게 보면 넬슨의 어거지스러운 고집에 파커가 지쳐서 ‘그래 네 멋대로 해봐라’ 하고 지휘권을 내동댕이친 것처럼도 보입니다만, 나중에 드러나듯이 그건 아니었고 다만 자신은 그저 연공서열에 따라 명목상의 지휘관이 된 것 뿐이고, 이 원정의 실질적인 책임자는 넬슨이라는 해군성의 의중을 파커가 잘 읽고 너그럽게 행동한 것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원래 무협지에서도 문파의 실제 권력은 그 문파의 젊은 수제자가 쥐고 있고 장문인은 그저 위엄만 지키고 있으면 되는 법이지요.
이제 공격의 총책임을 맡은 넬슨은 나름대로 머리가 복잡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공격군에게 상당히 불리한 상황이었거든요. 특히 코펜하겐 앞바다의 물길을 아는 사람이 전혀 없다는 것은 정말 당면한 과제였고 이건 빨리 공격한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결국 그 다음날인 3월 31일에 당장 공격하지는 않았고, 3월 31일 밤에 자신의 기함이었던 세인트 조지 호(HMS St. George)의 함장 하디 (Thomas Hardy)를 작은 보트에 태워 보내 코펜하겐 앞 접근 수로의 깊이를 직접 측정하도록 했습니다. (당시 수심 측정 방법에 대해서는 나폴레옹 시대에도 도선사가 연봉 킹이었을까 ? 편 참조) 함장이 이렇게 물길 깊이를 직접 잰다는 것은 이 일의 중대함을 반증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둠을 틈타 덴마크 해군의 방어진 바로 지척까지 접근할 수 있었던 하디는 이날 밤새도록 영국 함대가 접근할 해로의 수심을 측정했습니다만, 바다는 넓고 노젓는 배로 하룻밤에 잴 수 있는 해역의 넓이는 제한적인지라, 역시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나중에 고스란히 드러나게 됩니다.
넬슨도 3월 31일과 4월 1일 2일 동안 놀고 있던 것은 물론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미 외레순 해협을 통과하기도 전에 자신의 기함을 98문짜리 3층 갑판의 2급함 세인트 조지 호(HMS St. George)로부터 74문 2층 갑판의 3급함 엘레펀트(HMS Elephant)로 바꾼 상태였습니다. 아무래도 3급함에 비해 2급함은 좁은 해로에서 움직이기엔 너무 느리고 둔중했고, 무엇보다 배수량이 너무 커서 얕은 해안가에서는 좌초하기 딱 좋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이 2일 동안 공격 작전을 세우느라 바빴는데, 그의 작전은 단순하면서도 효과적인 것이었습니다. 아주 넬슨스러운 것이었지요.
1. 공격에는 참여하는 전열함은 74문 이하급 12척으로 제한한다.
어차피 98문 짜리 2척 (HMS St. George, HMS London)은 위에서 말한 이유로 좌초의 위험성이 있었고, 또 해안가에 늘어선 덴마크 해군이 고작 전열함 11척에 불과했기 때문에 더 많은 전열함을 끌고 들어가봐야 비좁아서 전개할 공간도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또 코펜하겐 항구 내에는 돛대와 삭구를 갖추고 출항 준비가 완료된 전열함 4척을 비롯하여 소형 군함들이 좀더 남아 있었으므로, 이들이 만약 기어나올 경우 이들을 막아설 예비 함대가 필요했습니다. 넬슨은 파커 제독에게 98문짜리 두척을 포함한 총 8척의 전열함을 가지고 예비대로서 이들을 견제해주도록 요청했습니다.
2. 잔재주는 필요없다 화력으로 제압한다.
덴마크 전열함들은 해안선을 따라 길게 남북으로 늘어서 있었습니다. 당시 바람이 주로 남쪽에서 북쪽으로 불었으므로, 넬슨은 함대를 한줄로 길게 남쪽에서 북쪽으로 항진시켜 나가면서 선두함이 가장 먼저 만나는 덴마크 군함, 즉 가장 남쪽의 군함 옆에 닻을 내리고, 또 2번함이 그 다음 적함 옆에 닻을 내리고… 하는 식으로 거의 1대1로 맡아서 정적인 포격전으로 적함을 두들겨 패기로 했습니다.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좁은 해안가에서 달리 뭐 뾰족한 수가 없었고, 또 1대1 싸움이면 아무래도 어중이떠중이 군함들과 미숙련 자원병들로 이루어진 덴마크 함대에 비해 영국 함대가 더 유리했거든요.
3. 소형 군함을 적극 활용한다.
원래 전열함들끼리 포격전을 벌일 때는 프리깃함이나 슬룹(sloop), 브릭(brig) 같은 꼬마 군함들은 아예 참전하지 않는 것이 상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경우는 정상적인 전열함끼리의 포격전도 아니었고, 또 이런 작은 군함들은 좌초의 위험에 조마조마해할 필요없이 꽤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으므로 넬슨은 이들 꼬마 군함들을 적극 활용하기로 합니다. 이들을 전열함들끼리의 포격전 전면에 내세울 수는 없었으므로, 덴마크 전열함들의 양쪽 끝단인 남북쪽 양끝에 나누어, 남쪽에서는 프리깃 데지레(HMS Desiree) 호와 브릭함들이 덴마크 전열함 선수 부분에 붙어서 종사(rake)를 해대기로 했고, 북쪽에서는 역시 프리깃 아마존(HMS Amazon) 호를 선두로 한 프리깃들이 덴마크 전열함들의 선미 부분에 붙어서 종사를 퍼붓기로 했습니다. 즉, 이론상으로는 전면에서는 전열함이, 그리고 좌우 양쪽에서는 프리깃함들이 쌈싸먹듯 3면을 포위하고 십자 포화를 퍼붓는 모양새였지요. 뿐만 아니라, 코펜하겐을 폭격하기 위해 끌고온 박격포함 (bomb ketch) 7척도 가담시켰습니다. 이들의 포는 직사포가 아니라 폭발탄(bomb)이 하늘 높이 솟았다 떨어지는 박격포였으므로, 영국 전열함 뒤에 늘어서서 영국 군함들의 돛대 위로 덴마크 전함들에게 폭발탄을 던지도록 했습니다.
4. 남쪽을 먼저, 북쪽은 나중에
당시 풍향은 주로 남풍이었으므로, 남쪽에서 북쪽으로 움직이는 것은 쉬웠으나 반대로 남쪽으로 내려오는 것은 어려웠습니다. 따라서 영국 함대는 먼저 덴마크 전열의 남쪽을 집중적으로 두들기고, 북쪽은 나중에 처리하기로 했습니다. 특히 북쪽에는 트레크로너 (Trekroner) 요새가 있어서, 아무래도 남쪽보다는 방어가 더 견고한 편이었으므로 더욱 그래야 했습니다. 트레크로너 요새에는 총 68문의 대포가 있었고, 아무래도 육상에 위치한 대포가 훨씬 안정적이었으므로 이는 68문의 대포를 갖춘 전열함 이상의 위력을 낼 수 있었습니다. 이 요새의 위치는 저 아래 지도에서처럼 덴마크 전열함 방어선의 북쪽에 위치해 있었는데, 넬슨은 굳이 불리한 위치에서 이 요새와 툭탁거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이 요새와의 포격전은 일단 회피하고, 먼저 덴마크 전열함들부터 잠재운 뒤, 나중에 육상 부대를 상륙시켜 이 포대를 보병으로 점령할 생각이었습니다. 만약에 덴마크군의 저항이 심하여 전면적인 승리가 불가능하다고 해도, 최소한 남쪽의 전열을 궤멸시켜 놓는다면, 그쪽 해안으로 박격포함들을 바짝 붙여 놓고 코펜하겐 시내에 폭탄을 쏘아넣을 수 있기 때문에 최소한 남쪽에서만은 완승을 거둬야 했습니다.
이렇게 작전을 짜고, 또 하나하나의 군함마다 정확하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 세세한 명령서를 작성하는데는 의외로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넬슨은 4월 1일밤 늦게까지, 정확하게는 전투 당일인 4월 2일 새벽 1시까지 서기들에게 둘러싸인 채 명령을 구술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넬슨보다 더 불쌍한 것은, 새벽 1시 넘어 넬슨이 일을 마치고 자러 간 뒤, 그 명령서를 다시 일일이 손으로 깔끔히 베껴써서 제대로 된 명령서를 만들어야 했던 서기들이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아무튼 서기들의 밤샘 작업 덕분에 전체 함대의 함장들은 전투 당일인 4월 2일 아침 8시까지는 모두 넬슨의 명령서를 읽어볼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바람도 넬슨의 기대에 맟주어 적절한 남품이 불어주었기 때문에, 마침내 9시 반에 전투 함대에는 닻을 올리라는 명령이 내려집니다. 원래 넬슨의 함대는 코펜하겐 및 그 앞을 가려주는 아마거(Amager) 섬 앞 바다에 닻을 내리고 있었는데, 넬슨의 함대와 덴마크 방어선과의 사이에는 영국인들이 Middle Ground라고 부르던 큼지막한 모래톱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넬슨의 함대는 먼저 역풍인 남풍을 거슬러 차례로 이 모래톱의 남쪽을 돌아나온 뒤 다시 남풍을 타고 북쪽으로 향해야 했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모래톱을 사이에 두고 크게 U턴을 해야 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여기서부터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64문의 아가멤논 호 (HMS Agamemnon)는 그 전날 닻을 내린 위치가 미들 그라운드라는 모래톱에 너무 가까이 붙어있었던데다 역풍을 그다지 잘 타는 배가 아니었는지, 이 U턴을 제대로 수행해내지 못하고 다시 닻을 내려버리고 맙니다. 아가멤논 호의 함장이었던 프랭코트(Robert Devereux Fancourt)는 여기서 무리해서 기동을 하다가는 남동풍에 밀려 모래톱에 좌초되어 버릴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이지요. 게다가 한척한척 덴마크 군함들 앞에 닻을 내린 영국 전함들의 우측으로 빙 돌아 자기 자리를 찾으려던 영국 전함 두척 (HMS Bellona, HMS Russell)이 결국 (다른 많은 함장들의 우려대로) 모래톱에 좌초해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총 12척의 전열함 중 무려 3척이 좌초 또는 좌초 위험 때문에 전열에서 이탈한 것입니다. 전체 전력의 1/4에 해당하는 수자였습니다.
이 외에도 상황이 뜻대로 돌아가지 않은 부분이 많았습니다. 영국 함대의 선두는 10년전 이 코펜하겐 앞바다의 수심을 측정했던 경력이 있는 머레이(George Murray) 함장이 지휘하는 에드가 호(HMS Edgar)가 맡았는데, 원래 계획대로라면 에드가 호는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적함, 즉 가장 남쪽에 위치한 Prøvesteenen 호 옆에 닻을 내려야 했는데, 무려 4척의 적함과 포격을 주고 받으면서 그대로 지나쳐 5번째 적함인 Jylland 호 옆에 닻을 내렸던 것입니다.
이 때문인지 영국 전열함들의 배치가 다소 뒤죽박죽이 되었고, 맨 마지막 전함이자 가장 북쪽에 위치했던 디파이언스 호(HMS Defiance)는 원래 의도와는 달리 트레크로너 요새 앞에서 60문짜리 Holsteen 호와 64문짜리 Indfødsretten 호와 맞닥뜨리게 됩니다. 원래는 남쪽에 전력을 집중시켜 적은 수의 적을 많은 수의 아군으로 공격하려는 계획이었는데, 실제로는 정반대로 이쪽의 전함 1척이 무려 2척의 전함과 1채의 요새를 상대로 불리한 싸움을 벌이게 된 것입니다. 이러다보니 의도와는 다르게 아마존 호(HMS Amazon)을 비롯한 프리깃함들도 적절한 위치를 찾아 종사(rake)를 퍼붓기 보다는 디파이언스 호와 나란히 포진하여 트레크로너 요새와 포격전을 벌이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나크 호 (HMS Monarch)도 디파이언스 바로 남쪽에 닻을 내리고 Holsteen 호 및 그 남쪽의 수상 포대들과 포격전을 벌였습니다.
이 상황에서 여러분이 넬슨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 저같으면 일단 ‘그러게 내 뭐랬어, 너무 성급하게 들어가면 저 꼴 난댔쟎아’ 라며 뒤에서 빈정거릴 함장들이나 파커 제독의 문책 때문에라도 의기소침해할 것 같습니다만, 넬슨은 확실히 좀 남다른 데가 있었나 봅니다. 그는 원래 계획 그대로 그냥 그대로 밀어 붙입니다. 자신이 탄 74문 전열함 엘리펀트 호를 적의 기함인 다네브로(Dannebrog) 호 옆에 정박시킨 넬슨은 아주 넬슨스럽고 의연하게 맹렬한 포격전에 들어갑니다.
포격전은 약 10시부터 시작되었고, 디파이언스 호가 트레크로너 요새 앞에 닻을 내린 11시 30분에 본격적인 풀 스윙에 들어갑니다. 전투 개시 이후 3시간이 지난 오후 1시 경에도 양측의 포격은 전혀 누그러질 태세를 보이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때 양측 라인의 거리는 약 200~300 미터 정도로서, 매우 가까운 편이었습니다. 당연히 쏘아붙이는 대포알들은 별로 빗나가지도 않고 참혹한 피바다를 만들어냈습니다. 그러나 바람을 타야 하는 당시 해전은 참으로 묘한 것이라서, 바로 지척 북동쪽 바다에 있던 잔여 영국 함대나, 평화롭고 아름다운 코펜하겐 항구 내에 정박해 있던 잔여 덴마크 함대는 바람의 방향 때문에 이 전투에 전혀 참여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근거리에서 이 생지옥을 바라봐야 했던 파커 제독의 마음은 편치 않았습니다. 특히 전투 현장이 자욱한 포연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답답했는데, 상황이 넬슨에게 별로 유리하지 않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었습니다. 일단 시작하기도 전에 전체 전력의 1/4이 모래톱 위에 주저 앉아 버렸고, 또 포격 시작 3시간 이후에도 이렇게 포격이 거세다는 것은 확실히 영국 함대에게 불길한 징조였습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미숙한 덴마크 해군은 영국 해군의 능숙한 포격에 진작 넉아웃되어 지금쯤은 항복해야 했기 때문이었지요.
영국 해군의 기대와는 달리 덴마크 해군이 끈질기게 저항할 수 있었던 것은 아무래도 홈그라운드의 이점이 강하게 작용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실제로 덴마크 해군의 포병들은 상당수가 대포를 제대로 쏘아본 적이 없는 자원병에 불과했으나, 바로 등 뒤에 자기 가족이 사는 집이 있었으므로 여기서 내가 무너지면 가족들에게 대포알이 날아간다는 절박함과, 또 섭정인 프레드릭 (Frederik) 왕세자가 바로 코펜하겐 성벽에서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다는 긍지로 끈질기게 저항했습니다. 그런 정신적인 측면 외에도, 영국군의 포격에 나가 떨어진 사상자들은 즉각 해변에서 보트로 실어오는 추가 병력으로 교체될 수 있었다는 실질적인 측면도 강했습니다. 심지어는 군함의 함장도 부상을 입자 육지에서 다른 함장을 불러와 교체시킬 정도였습니다.
일이 이렇게 진행되자 강철같은 신경과는 거리가 좀 멀었던 노신사 파커 제독은 아군 함대의 피해가 극심할 것을 걱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타고 있던 런던 호의 함장인 도멧(William Domett) 및 제독 보좌관 (flag captain) 오트웨이(Robert Otway) 함장에게 전투 중지 명령을 내려야 하는 것 아니냐고 초조함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한창 전투 중인데 맥빠지게 후퇴 명령을 내리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제대로) 판단한 오트웨이 함장은 파커에게 ‘그러지 마시고 제가 보트를 타고 넬슨의 기함인 엘리펀트 호에 직접 가서 전황이 불리하다면 후퇴해도 좋다라고 구두로 전달하겠습니다’ 라고 사정했습니다. 파커는 그를 승낙했으나, 부하들의 안위를 걱정한 나머지 미처 오트웨이 함장이 엘리펀트 호에 도착하기도 전에 ‘전투 중지’를 알리는 깃발을 기어코 올리고 맙니다. (열심히 노를 저어가던 오트웨이가 이 깃발을 보고 ‘에이 ㅆㅂ 저 영감탱이하고는 정말 못해먹겠네’ 하고 욕을 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파커 제독이 이 전투 중지 깃발을 올린 것은 나름 생각한 바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넬슨의 성격을 이미 잘 파악하고 있었고, 만약 싸울만 하다면 넬슨이 자신의 신호 깃발을 무시하리라고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 깃발을 올리면서 주변 장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만약 현장 상황이 괜찮다면, 넬슨은 내 신호를 무시하고 계속 싸울 거야. 반대로 상황이 안좋다면 넬슨은 내 명령에 따라 후퇴하는 것이 되니까, 후퇴의 불명예를 뒤집어 쓸 일은 없게 되는거지.”
실제로 넬슨은 전투가 길어지자 ‘파커 이 양반이 애간장이 타겠군’ 하면서 이런 신호가 올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해서 이 신호가 올라오자, 부하들에게 ‘아군 기함 말고 적군 기함에나 신경을 쓰라’고 핀잔을 주며 애써 제독의 신호를 무시했습니다. 이때 그 유명한 일화가 나옵니다. 넬슨은 나일강 전투부터 함께 했던 폴리 (Thomas Foley) 함장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폴리, 자네도 알겠지만 난 눈이 하나 밖에 없다네. 내겐 가끔 완전히 장님이 될 권리가 있다구.” 그러면서 그는 정말 그의 보이지 않는 눈에 망원경을 대면서 이렇게 말했답니다. “신호가 정말 안 보이는데 !”
이 상황은 넬슨 함대의 2인자인 그레이브스(Thomas Graves) 제독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가장 불리한 상황에 있던 디파이언스 호에 타고 있었는데, 그는 넬슨처럼 파커의 신호를 완전히 무시하지는 않고, 그저 ‘신호를 받았다’ (acknowledge)는 신호 깃발만을 올렸고, 원래 올려야 하는 반복 신호 깃발은 올리지 않았습니다. 즉, ‘제독의 의사는 알겠는데 복종하지는 않겠다’는 의사를 표시한 것이지요.
파커 제독과 넬슨은 이렇게 쿵짝이 잘 맞았지만, 파커 제독이 예상하지 못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넬슨이나 그레이브스는 파커 제독과 나름대로의 교감을 가지고 있는 제독이었지만, 초급 함장들은 파커 제독의 명령을 감히 거부하기가 너무 거북했던 것입니다. 특히 가장 북쪽에 위치해있어서 파커 제독의 신호가 아주 잘 보였던 아마존 호의 리우(Edward Riou) 함장에게는 더욱 그랬습니다. 그는 잠시 고민하다 결국 자신이 지휘하는 몇척의 프리깃함들에게 파커 제독의 퇴각 신호를 반복 게양합니다. 당시 아마존 호 함상에 있었던 육군 제48연대의 스튜어트 (William Stuart) 중령의 증언에 따르면, 퇴각 명령을 내리면서도 리우 함장은 ‘넬슨 제독이 뭐라고 생각할까’ 하며 무척이나 괴로와했다고 합니다. 특히 트레크로너 요새의 치열한 포격에 노출된 상태에서 배를 돌리는 것은 무척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선회하는 순간 고물 쪽을 그대로 노출시켜 종사(rake)를 당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아니나다를까, 가장 마지막으로 후퇴하던 아마존호는 적의 종사에 큰 피해를 입었고, 리우 함장 자신도 적의 포격에 두동강이 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오후 2시 즈음이 되자, 마침내 덴마크 측의 포화가 점차 느슨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래도 화력면에서, 또 숙련도 면에서 영국 해군이 월등했던지라, 투지만으로는 더 버티기가 어려웠던 것입니다. 덴마크 측에서는 프리깃함들인 니보르(Nyborg) 호와 아게르슈 (? Aggershuus) 호가 결국 격침되었고, 다른 군함들도 크게 손상을 입었습니다. 덴마크 방어 함대의 총지휘관은 제독이 아니라 임시 제독 (Commodore)에 불과한 피셔 (Olfert Fischer) 함장이었는데, 피셔도 최초의 기함이었던 다네브로(Dannebrog) 호에서 홀스틴(Holsteen) 호로, 이어서 다시 트레크로너 요새로 기함을 옮겨야 할 정도였습니다. 그 정도로 덴마크 함정들의 피해가 극심했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2시 30분까지도 덴마크 군은 간헐적으로나마 여전히 포격을 계속하고 있었고, 이 순간까지는 깃발을 내려 항복한 덴마크 군함은 아직 Infødsretten (대체 뭐라고 읽어야 하는지 ?)호 1척 뿐이었습니다.
넬슨 입장에서는 상황이 무척이나 난감했습니다. 대충 포격이 그쳐가고는 있었으나, 이 덴마크인들이 대체 항복을 하겠다는 것인지 끝까지 싸우다 죽겠다는 것인지 명확한 표시가 없으니 상황 판단이 되질 않았습니다. 최소한 적함 1척은 항복했으니, 이제 그 군함을 나포하기 위해 보트에 나포 승선대(prize crew)를 실어 보내야 했는데, 적함들이 빽빽히 들어찬 해안에서 아직 간헐적으로 포격이 날아오고 있는 상황에서 그럴 수도 없었습니다. 게다가 저 배들은 애초에 전투 개시할 때부터 돛대와 삭구를 다 제거한 상태여서 움직일 수가 없는 상태였으므로, 나포 승선대가 그 배에 오른다고 해도 어떻게 그 배를 빼내 올 수가 있겠습니까 ? 뿐만 아니었습니다. 영국 전함들도 피해가 막심한 편이었습니다. 특히 트레크로너 요새는 아직도 별 피해를 입지 않고 맹렬히 포격을 가해왔으므로, 그쪽에 위치했던 디파이언스 호와 모나크 호는 피해가 점점 늘어나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넬슨은 훗날까지 계속 논쟁거리가 되는 편지 하나를 급히 휘갈겨 씁니다. 수신자는 바로 덴마크-노르웨이 왕국의 섭정인 프레드릭 왕세자였습니다. ‘영국인들의 형제인 덴마크인들에게’ 라는 구절로 시작되는 그 편지의 내용은 한마디로 항복하라, 아니면 남은 선박을 다 불태워 포로고 뭐고 다 죽여버리겠다는 협박이었습니다. 다만 우리는 영국인의 형제인 용감한 덴마크인들을 살리고 싶은데 너희들이 계속 포격을 해대면 어쩔 도리가 없다라는 식으로 부드러운 인상을 주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보였지요. 그러나 실상은 넬슨의 함대도 더 버티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이 편지는 정말 덴마크 왕세자에게 전달되었고, 오후 3시경 왕세자도 휴전을 뜻하는 백기를 든 부관 린트홀름(Hans Lindholm)을 보내 ‘대체 의도가 뭐냐 ?’ 라는 질문을 해왔습니다. 이 휴전이 넬슨의 함대를 위기에서 구합니다. 넬슨은 기꺼운 마음으로 린트홀름을 맞아들여 대화를 나누었는데, 여기서 넬슨은 2번째 편지를 왕세자에게 보냅니다. 그 내용은 자신의 의도는 인도주의에 따라 덴마크 수병들의 목숨을 구하려 하는 것 뿐이며, 덴마크 측은 덴마크 군함들로부터 부상자들을 데려가도 좋다, 대신 부상을 입지 않은 덴마크 수병들은 영국이 포로로서 영국 군함에 옮겨 실은 뒤 덴마크 군함들을 불사르거나 나포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아울러 만약 덴마크 국왕께서 영국과 화평을 맺으신다면 그를 자신의 가장 큰 승리로 받아들이겠다고 겸손하게 의사 표명을 했습니다. 이 편지는 곧장 코페하겐 성채의 왕세자에게 보내졌고, 린트홀름은 그대로 파커 제독의 기함 런던 호로 보내져 좀더 협의를 한 뒤, 일단 24시간의 휴전에 양측이 동의하게 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인도주의 정신으로 가득찬 넬슨의 편지가 훗날 논란을 낳은 것은 넬슨이 당장의 위기를 모면하고자 덴마크 수병들을 배와 함께 불태워 버리겠다고 허풍을 쳤다고 덴마크 측 총사령관 피셔 함장이 비난을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피셔의 주장에 따르면 이날 넬슨이 허풍으로 가득찬 편지로 왕세자를 속이지만 않았어도 패배하여 물러난 쪽은 영국 해군이었을 거라는 것이었지요. 사실 총사령관은 왕세자가 아닌 바로 피셔 함장이었는데, 피셔는 이 휴전에 전혀 관여를 못했다는 점이 절차상 문제가 있기는 했습니다. 당시 피셔는 트레크로너 요새에서, 이미 반파 상태였던 모나크 호와 디파이언스 호를 신나게 맹타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다른 덴마크 군함들도 더 이상 저항을 못할 정도로 완파 당한 상태이긴 했습니다만, 적어도 총사령관 피셔에게는 항복할 의사도, 이유도 별로 없었던 것이지요. 넬슨조차도 (비록 좀더 뒤의 일이긴 했지만) 이날의 전투가 의도한 바와는 달리 영국의 완전한 승리는 아니었다고 인정하기는 했습니다.
피셔의 주장도 꽤 일리가 있었던 것이, 전투가 일단 종료되고나자, 영국군의 피해가 얼마나 컸는지가 드러났습니다. 물론 덴마크군의 피해도 컸지요. 특히 덴마크 함대의 기함인 다네브로(Dannebrog)는 전투 중에 이미 화재가 발생했었는데, 휴전이 시작된 이후인 오후 4시 반 경에 마침내 폭발을 일으켜 아직 대피하지 못했던 250명의 수병들과 함께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습니다. 이 250명을 포함하여 덴마크 측의 인명 피해는 총 790명 전사에 910명의 부상자를 냈습니다. 실제로는 이보다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됩니다만 아무튼 1천7백명의 사상자도 적은 편이 아니었지요.
이에 비해 영국 함대는 253명 전사에 688명의 부상자를 냈습니다. 총 941명의 사상자라는 수자는 덴마크 측의 절반에 해당하는 것이긴 합니다만, 그래도 영국측이 애초에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보다는 더 많은 수자였습니다. 게다가 트레크로너 요새에게 두들겨 맞던 모나크 호와 디파이언스 호, 그리고 넬슨의 기함인 엘레펀트 호까지 총 3척이 비틀거리며 철수하다가 결국 모래톱에 좌초하고 맙니다. 이들은 다른 전함들이 낑낑대며 끌어주었음에도 결국 다시 물에 뜰 수 있었던 것이 한밤중이 되어서였으므로, 만약 휴전을 맺지 않았다면 영국군의 피해는 더욱 커졌을 것입니다. 게다가 영국 함대가 나포한 적함은 총 12척이었으나 실제로 나포할 가치가 있을 정도였던 덴마크 군함은 겨우 Holsteen 호 1척 뿐이었으므로 영국 함대의 전과는 상당히 실속이 없는 편이었습니다.
바로 다음날인 4월 3일, 넬슨은 (파커의 위임 하에) 영국 대표로 코펜하겐에 상륙하여 휴전 협상에 들어갔습니다. 항구에 내린 넬슨에게 덴마크는 궁성까지 마차를 제공하려 했지만, 넬슨은 몰려든 군중 사이를 걸어가기를 택합니다. 이때 전쟁 전까지만 해도 영국과 덴마크는 사실 사이가 그다지 나쁜 편은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나일강 전투의 영웅인 넬슨은 이미 덴마크에서도 유명 인물인지라 코펜하겐 시민들은 (사진도 없던 시대였으므로) 넬슨의 모습을 보려고 구름처럼 몰려들었다고 합니다. 이때 영국 측 기록에 따르면 코펜하겐 시민들이 넬슨을 보고 ‘넬슨 만세 (Viva Nelson) !’를 외치며 환호했다고 합니다만, 덴마크 측 기록에는 시민들이 그저 ‘경외심을 가진 침묵’으로 넬슨을 맞이했다고 합니다. 상식적으로는 덴마크 측 기록이 더 맞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휴전 협상은 그다지 잘 진행되지는 못했습니다. 아무래도 넬슨의 승리가 그다지 완벽하지 못했기 때문이었겠지요. 덴마크 측은 자유 통상의 권리를 끝까지 주장했고, 결국 넬슨은 덴마크 측에게서 프랑스와의 교역을 중단하겠다는 약속을 얻어내지 못하고 그저 14주간의 휴전만을 얻어냅니다. 그와 동시에, 넬슨은 영국 함대가 그 휴전 기간 동안 코펜하겐 항구를 자유로이 이용할 수 있는 권리도 얻어냅니다. 대신 덴마크 포로들을 가석방 조건으로 풀어주었지요. 넬슨이 이렇게 3달간의 휴전과 코펜하겐 항구에 대한 자유 이용권만을 얻어낸 것에 만족했던 것은 바로 러시아 때문이었습니다. 이번 전투에서 만신창이가 된 함대를 코펜하겐 항구 시설을 이용하여 신속하게 수리한 뒤, 덴마크와의 휴전 기간이 끝나기 전에 러시아를 공격하는데 사용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즉, 어차피 덴마크는 러시아라는 배경을 믿고 감히 영국에게 저항한 것이므로, 러시아 함대를 격파하고 나면 자연스럽게 덴마크의 굴복도 끌어낼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지요.
하지만 넬슨의 신나는 모험은 여기까지였습니다. 넬슨은 몰랐으나, 반영국 정책을 펴던 러시아의 짜르 파벨 1세가 3월 24일 이미 암살당했던 것입니다. 이는 그 아들이자 후계자인 알렉상드르에 의한 것이라는 설이 대세입니다. 당연히 이 못된 아들 짜르는 그 아버지가 아무 실속없이 말타에 대한 원한 때문에 시작했던 이 무장 중립 동맹에서 발을 뺄 것이 불을 보듯 뻔했습니다. 이 암살 및 새로운 짜르의 소식은 4월 하순 경에는 이미 코펜하겐에까지 전해졌지만, 이 암살 소식은 당분간 비밀로 지켜져 코펜하겐 앞바다에 정박한 영국 함대나 영국 본토에는 그 소식이 퍼지지 않았습니다.
그 사이 파커 제독은 4월 12일 스웨덴의 군항인 칼스크로나(Karlskrona) 앞바다로 출동하여, 스웨덴 함대를 위협하고 바다로 출항할 생각을 버리도록 촉구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이후 파커 제독은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고, 넬슨의 함대가 수리를 끝낸 이후에도 스웨덴이 후방을 노리면 어쩌나 하는 뻔한 핑계를 대고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빨리 러시아를 쳐야 한다고 생각하던 넬슨은 애가 탔습니다. 그런데 5월 5일, 영국 해군성도 넬슨과 비슷한 생각이었는지, 파커 제독을 본국으로 소환하고 넬슨을 총사령관으로 대체하는 명령서를 보내왔습니다. 이때 넬슨이 받은 명령은 러시아 함대와 스웨덴 함대가 합류하는 것을 막으라는 것도 있었습니다. 그는 즉각 스웨덴 측에 편지를 보내 ‘바다에서 스웨덴 함대를 만나면 즉각 격침시켜버리겠다’는 협박장을 보내고, 아울러 6척의 전열함을 떼어 칼스크로나의 스웨덴 함대를 감시하도록 했습니다. (이 협박은 잘 먹혀, 스웨덴 함대는 칼스크로나 밖으로 나올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동시에 넬슨은 남은 11척의 전열함을 이끌고 즉각 러시아의 군항 레발(Reval, 현재의 탈린 Tallinn)로 출발합니다. 그러나 5월 14일 레발에 도착해보니, 우려하던대로 이미 얼음이 녹아 러시아 함대는 핀란드만 깊숙히 위치한 러시아의 군항 크론스타드(Kronstad)로 도주한 뒤였습니다. 여기서 비로소 넬슨은 파벨 1세의 암살 소식과 함께 무장 중립 동맹의 해체가 논의되고 있다는 다소 맥빠지는 소식을 접하게 됩니다. 그는 5월 17일 레발에서 철수했고, 1달 뒤 건강이 악화되어 소형 브릭함인 카이트 호(HMS Kite)를 타고 본국으로 귀환하게 됩니다.
결국 중립국의 자유 무역을 강대구이 해상 봉쇄로 막을 권리가 있는가에 대한 거창한 주제로 시작했던 이 원정은, 러시아의 짜르 암살이라는 음침한 사건에 의해 시시하게 흐지부지 끝나고 맙니다. 실제로 덴마크는 영국 함대와의 14주간의 휴전 기간이 끝나기도 전에 이미 프랑스와의 무역을 재개했고, 이로부터 1년도 안되어 영국과 프랑스는 아미앵 조약을 맺고 근 10년 만에 드디어 평화의 시대를 맞이하게 됩니다.
원문: Nasica의 뜻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