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보통 에펠탑, 그리고 개선문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에펠탑은 별로…였습니다. 다만 개선문은 정말 멋있더군요. 와이프도 파리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조형물은 개선문이라고 합니다. 사실 파리에는 개선문이 2개 있습니다. 둘 다 나폴레옹이 1805년 아우스테를리츠 전투를 거둔 뒤 그의 대군단 (La Grande Armee)를 기념하기 위해 짓도록 명한 것입니다. 좀더 작은 카루젤 개선문 (Arc de Triomphe du Carrousel)은 나폴레옹이 살던 튈르리 (Palais des Tuileries)에 위치해 있고, 더 잘 알려진 에투알 개선문 (Arc de Triomphe de l’Étoile)은 에투알 광장에 위치해 있습니다. 둘 다 1806년에 설계가 시작되었는데, 좀 더 작았던 카루젤 개선문은 2년만인 1808년 완공되었으나, 2배 이상 컸던 에투알 개선문은 그 기초를 파는데만도 2년이 걸렸습니다.
나폴레옹은 어느 개선문을 더 좋아했을까요 ? 그 대답은 모호할 수 밖에 없습니다. 에투알 개선문은 1836년 루이-필립 왕 시대에나 완성되었으므로, 나폴레옹은 결코 그 완공된 모습을 볼 수가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확실한 건, 뭔가 웅장한 모습을 기대했던 나폴레옹은 카루젤 개선문이 생각보다 너무 작게 만들어진 것을 보고 꽤 실망했다는 것입니다.
이 개선문들 모두, 역시 로마에 있는 개선문의 모방품에 불과합니다. 카루젤 개선문은 로마의 콜로세움 바로 옆에 있는 콘스탄티누스 (Constantinus) 개선문을 본 뜬 것이고, 에투알 개선문은 고대 로마의 폐허인 포로 로마노 (Forro Romano) 안에 있는 티투스 (Titus) 개선문을 본 떠 만든 것입니다. 제가 이번에 콜로세움을 방문했을 때는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은 개보수 중이어서 비계로 절반 정도 가려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관심 있게 보려던 티투스 개선문은 가까이에서 아주 잘 볼 수 있었지요. 티투스 개선문은 제가 중학생인지 고등학생이었을 때 TV에서 방영되었던 미니시리즈 마사다 (Masada)와 연관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티투스 개선문은 기원 후 82년, 도미티아누스 (Domitianus) 황제가 만든 것인데, 바로 그 전 황제이자 그의 친형이었던 티투스의 예루살렘 정복을 기리기 위해 만든 것입니다. 티투스와 도미티아누스의 아버지는 베스피아누스 (Vespianus) 장군이었습니다. 이들 3부자는 모두 제위에 올랐는데, 로마 제국 역사상 아버지의 황위를 아들이 물려 받은 것은 이 티투스가 최초였습니다. 1951년 로버트 테일러 주연의 영화 쿠오바디스의 마지막 장면 기억하십니까 ? 로마군 장교이던 로버트 테일러는 예전에 모시던 갈바 (Galba) 장군의 반란 덕분에 처형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는데, 영화 끝 부분에 그는 전차를 타고 로마에 보무도 당당하게 입성하는 갈바 장군을 멀리서 바라보면서 여주인공 데보라 카와 함께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가지요. 저는 어릴 때 그 장면을 보면서 ‘이제 갈바 장군 밑에서 높은 자리에도 오르고 그래야지 왜 떠나지 ?’ 하고 아쉽게 생각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그런데 만약 로버트 테일러가 갈바 장군 따라갔다면 큰일나는 거였어요. 갈바 장군은 황제에 오른 지 불과 7개월 만에 암살되었고, 로마는 큰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제가 전에 왜 나폴레옹은 왕이 아닌 황제가 되었을까 ? 편에서 언급했듯이, 원래 황제 (emperor)라는 단어의 어원은 imperator인데, 이는 로마 군단 병사들이 대승을 거둔 장군에게 자발적으로 엄지 손가락을 들어보이며 외쳐줌으로써만 얻을 수 있는 명예 호칭이었거든요.
로마가 네로 사후 혼란에 빠지자 로마 제국 여러 속주에 주둔하고 있던 각 군단에서는 각자의 지휘관을 억지로라도 연단에 올려세우고 임페라토르 ! 를 외침으로써 황제로 추대하게 되었는데, 그때 팔레스티나에 주둔하면서 유대의 반란을 진압하고 있던 베스피아누스는 군대를 이끌고 황제가 되기 위한 모험을 떠났고, 유대 전쟁은 아들인 티투스를 남겨 마무리 짓도록 했습니다. 티투스는 결국 예루살렘을 함락시켜 유대인들을 ‘나라없는 민족’으로 만들었고, 또 마사다 요새에서 최후까지 항전하던 유대 열심당원들에게 최후가 뭔지를 정말로 보여주었습니다. 그 마사다 요새에서의 포위전을 그린 미니시리즈가 바로 피터 오툴과 피터 스트라우스 (‘야망의 계절’에서의 루디 조다쉬) 주연의 ‘마사다’ 입니다. 그때 나왔던 로마군의 거대한 관절식 공성병기, 즉 충차(battering ram)을 부착한 운제(siege tower)는 정말 대단했지요.
이야기가 많이 삼천포로 빠졌습니다만, 이 티투스 개선문에는 여러분도 쉽게 알아볼 수 있는 물건들이 나옵니다. 바로 메노라 (menorah)라는 7개의 가지를 가진 촛대지요. 영화 쉰들러 리스트에도 나옵니다만, 이는 유대교의 상징입니다. 티투스 개선문에는 로마군이 예루살렘 성전을 약탈하여 이 메노라와 함께 유대교의 황금 나팔, 진설병을 얹어놓는 탁자 등을 짊어지고 나오는 장면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중세 이후 근대에 이르기까지 이 개선문은 유대인 박해의 상징이었다고 합니다.
나폴레옹은 코르시카 섬에서 자라던 어린 시절부터 플루타르코스 영웅전과 같은 로마 고전을 즐겨 읽었고, 그로부터 많은 영감과 동기부여를 받았습니다. 로마의 영웅들이 승전을 거둔 뒤 4마리의 말이 끄는 전차를 탄 채 개선식을 치르고, 또 자신의 공적이 새겨진 개선문을 세우는 모습을 읽으며, 언젠가는 자신의 공적을 새긴 자기 자신의 개선문을 세우리라 다짐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시궁창이라고, 그는 로마와 같은 위대한 제국이 아닌 한낱 프랑스의 식민지인 촌구석 섬마을에 태어난 몰락한 귀족의 세째 아들에 불과했습니다. 집안은 가난하기 짝이 없었고, 또 시대는 이미 고대의 영웅이 활약할 만한 그런 환경이 아니었습니다. 프랑스 경찰이 코르시카 독립 운동가를 잡으러 다니고, 전장에서는 대포알과 머스켓 총알이 날아다녔지요. 이때 나폴레옹이 주변 친구들에게, 언젠가는 나만의 개선문을 세우겠다고 했다면, 아마 나폴레옹은 전형적인 중2병 환자로 찍혔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현실이 되었네요. 그는 프랑스의 황제로서, 또 아우스테를리츠의 주인공으로서, 당당히 고대 로마의 영웅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자신만의 개선문을 세울 수 있었습니다.
에투알 개선문의 4개 기둥에는 각각 커다란 부조가, 그리고 그 상면에는 6개의 작은 부조가 새겨져 있습니다. 그 중 나폴레옹의 모습이 새겨진 것은 대형 부조 중 Le Triomphe de 1810 (1810년의 승리)라는 작품과, 소형 부조 중 La bataille d’Aboukir (아부키르 전투), Le passage du pont d’Arcole (아르콜레 다리 전투), 그리고 La bataille d’Austerlitz (아우스테를리츠 전투)의 4개입니다. 전체 부조 10개 중 4개이니, 40%에 자기 얼굴을 새겨 넣을 수 있었던 것이지요.
특히 이 비율이 인상적인 것은, 위에서 언급했듯이 이 조형물은 나폴레옹이 모든 권력을 잃은 한참 뒤에야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에투알 개선문의 공사는 1814년 중단되었다가, 1833년에야 다시 만들어지기 시작해서 1836년에야 완공이 되었지요. 개선문의 완공을 지시한 루이-필립 왕은 쇠퇴한 프랑스의 군사적 위용을 되살리기 위해 이 기념물의 완공을 지시했습니다만, 당시 보나파르트 파로부터 정치적 도전을 받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나폴레옹의 모습이 새겨진 개선문을 만드는 것이 달갑지는 않았겠습니다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폴레옹을 빼고는 프랑스의 군사적 위업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말이 안되는 것이었던 것입니다. 참고로, 1840년에 나폴레옹의 유해가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이송되어 앵밸리드에 최종 안장되기 전에, 그 운구 행렬은 이 개선문을 통과하여 지나갔다고 합니다. 나폴레옹으로서는 퇴위 이후 25년만에 개선문을 거쳐 개선한 셈이었지요.
그러나 이 부조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나폴레옹이 출연하지 않는 작품, 즉 Le Départ de 1792′ (1792년 자원병들의 출정)이라는 작품입니다. 흔히 La Marseillaise라고도 알려진 이 부조는 공화국을 상징하는 여인이 청동으로 된 검을 쥐고 있는 것으로 나오는데, 1916년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많은 희생자를 냈던 베르덩 (Verdun) 전투가 시작되던 날 이 검이 부러졌다고 합니다. 당국은 이 불길한 징조를 감추기 위해 이 부조를 방수포로 덮어 감추었다고 하네요.
이 개선문의 내부에는 온갖 지명과 사람 이름이 잔뜩 새겨져 있습니다. 프랑스 군이 승리를 거둔 전투 이름과, 그 지휘관들의 이름이 빼곡히 새겨져 있는 것입니다. 자세히 보면 지휘관의 이름들 중 일부 이름에는 밑줄이 그어져 있습니다. 몇몇 익숙한 지휘관들의 이름을 보면 아시겠습니다만, 밑줄이 그어진 이름들은 전사한 장군들을 뜻합니다.
그런데, 가만 보면 이집트 원정에서 죽은 클레베르 (Kleber)의 이름에는 밑줄이 그어져 있지 않더군요. 생각해보면, 그도 그럴 수 있는 것이, 그는 전사한 것이 아니라 시리아인에게 암살당한 것이었으니, 그도 그럴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하지만 또 자세히 보면 루이-필립을 보좌하다가 그를 노린 암살 시도에 휘말려 죽은 모르티에 (Mortier) 원수의 이름에는 밑줄이 그어져 있습니다. 이것도 그럴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이 개선문이 완공될 당시의 왕이 바로 루이-필립이었고, 루이-필립은 모르티에의 장례식에서 예절을 무시하고 펑펑 통곡을 할 정도로 그의 죽음을 아쉬워 했기 때문에, 그의 이름 밑에 밑줄 하나를 더 그어 그의 명예를 조금 더 높여주는 것이 (클레베르에게는 좀 불공평하더라도) 당연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모르티에의 죽음에 대해서는 왜 마리우스는 감옥에 가지 않았을까 ? http://blog.daum.net/nasica/6862532 참조)
하지만 그러고보니 정말 아리송한 인물의 사례가 궁금해지더군요. 바로 모로 (Moreau)의 경우입니다. (모로에 대해서는 모로와 나폴레옹 – 호헨린덴 전투 http://blog.daum.net/nasica/6862505 참조) 모로는 프랑스의 위대한 지휘관이기는 하지만, 나폴레옹과 반목한 끝에 결국 드레스덴 전투에서는 러시아 군 편에서 프랑스 군과 싸우다 프랑스 군의 대포에 맞아 전사했습니다. 그의 이름에는 밑줄이 그어져 있었을까요 ? 아마 당시 그것을 결정해야 했을 책임자는 정말 고민이 많았을 것 같습니다. 결국 보니 밑줄이 그어져 있지 않더군요. 역시 아무리 독재자 나폴레옹을 몰아내기 위해서라고 해도, 프랑스의 적 편에 서서 프랑스 군과 싸우다 전사한 사람에게는 ‘전사자’라는 명예를 줄 수 없었나 봅니다.
좀더 작고, 또 그래서 좀더 관심을 덜 받는 카루젤 개선문에도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현재 카루젤 개선문 위에는 평화의 여신이 금박을 입힌 두 승리의 여신의 호위를 받으며 고대 로마의 개선식에서처럼 4마리의 말이 끄는 전차를 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나폴레옹 시대의 원본이 아니고, 부르봉 왕정 때인 1828년에 만든 것입니다. 원래는 더 소박하지만 훨씬 더 유서 깊은 조각상이 놓여 있었지요. 바로 베네치아 산 마르코 성당의 4마리 청동 마상입니다.
원래 이 4마리의 청동 마상은 비잔티움의 전차 경기장에 있던 것으로서, 일설에 따르면 기원전 4세기 경의 전설적인 조각가 리시푸스 (Lysippus)가 만든 것이라고도 합니다만, 그 금속 기술로 볼 때 헬레니즘 시대 또는 로마 시대에 만들어진 것일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아무튼 수백년간 비잔티움을 지키던 이 청동 마상들은, 1204년 일탈 행위를 일삼은 제4차 십자군이 비잔티움, 즉 동로마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을 약탈할 때 베네치아로 옮겨진 것입니다. 십자군이 비잔티움을 터는데 왜 청동 마상은 베네치아로 옮겨졌냐고요 ? 십자군에게 동로마제국을 손봐달라고 부추기고 배로 태워준 사람들이 바로 베네치아 공화국이었거든요. 그리고 당시의 십자군은 사실상 야만인에 가까운 무식한 프랑크 인들이라서, 금도 아니고 은도 아니고 비단도 아닌 그런 낡은 청동 마상의 예술성이나 값어치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몰랐으므로 베네치아 인들이 얼씨구나 하면서 베네치아로 실어와서 완공된지 얼마 안된 산 마르코 대성당의 입구 위에 장식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1797년 베네치아 공화국을 점령한 나폴레옹은 과거 조상이던 프랑크 인들과는 달리, 그 청동 마상의 가치를 대번에 알아보았습니다. 그는 그 청동 마상들을 그대로 떼어다 파리로 보냈고, 나중에 카루젤 개선문 위에 올려 놓아 새로 만들어진 그의 기념비를 더욱 뜻깊게 했습니다.
하지만 1815년 나폴레옹 퇴위 이후 부르봉 왕가는 오스트리아에게 그 청동 마상을 반환했고, 오스트리아 정부는 그것들을 원래 위치인 베네치아의 산 마르코 대성당에 다시 올려 놓았습니다. 당시 베네치아는 오스트리아의 일부로 합병된 다음이었거든요. 물론 지금은 베네치아가 이탈리아 땅이고, 따라서 당연히 그 청동 마상들도 이탈리아 소유로 되어 있습니다. 당시 오스트리아 인들은 일이 그렇게 돌아갈 줄은 전혀 몰랐던 것이지요.
원문:Nasica의 뜻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