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이 따뜻한 1769년 8월의 코르시카 섬, 몰락한 귀족 가문인 부오나파르떼 집안에 둘째 아들이 태어나기전 약 3개월 전인 5월 1일, 저 먼 북해의 우울한 바다 한가운데 있는 에머랄드 빛 섬 아일랜드의 수도 더블린(Dublin)에서, 웨슬리 (Wesly) 가문에는 세째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이 아이의 아버지는 개럿 웨슬리 (Garret Wesley)로서, 부오나파르떼 집안과는 달리 몰락한 귀족 가문이 아니라 그런대로 체면은 차리는 모닝턴 백작 (The 1st Earl of Mornington)의 작위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웨슬리 가문은 아일랜드에 수대째 살아오던 아일랜드 가문이었지만 이들의 근본이 잉글랜드계로서, 개신교를 신봉하고 잉글랜드와의 정치적 연합을 지지한다는 측면에서 가톨릭을 믿고 독립을 추구하는 진짜 아일랜드 가문은 아니었습니다.
잉글랜드가 아일랜드를 지배하면서 카톨릭을 믿는 아일랜드인들은 토지를 빼앗기고 공직 출마까지 금지당하는 등 많은 핍박에 시달렸고, 그 틈을 이용하여 잉글랜드에서 건너오거나 잉글랜드에 충성하는 개신교 가문들이 아일랜드의 지배 계급이 되었는데, 웨슬리 가문도 그런 앵글로-아이리쉬 (Anglo-Irish, Protestant Ascendancy) 가문 중 하나였습니다. 그렇다고 웨슬리 가문이 아일랜드에서 떵떵거리는 가문은 아니었습니다.
가령 모닝턴 백작이라는 작위도 바이올린 연주와 작곡에 조예가 있었던 개럿 웨슬리의 음악적 업적과 아일랜드 지방 정부에서의 소소한 정치적 활동 덕분에 얻은 것이었지요. 그나마 개럿은 얼마 안 되는 가문의 자산을 별 생각없이 써버리는 편이었고, 그가 45세의 젋은 나이로 요절하자 남은 식구들은 당장 경제적인 어려움에 맞닥뜨리게 되었습니다.
개럿이 사망할 때 그 셋째 아들의 나이는 12세였습니다. 아서(Arthur)라는 이름의 이 셋째 아들은 그 어머니도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 정도로 아무 생각이 없는 철부지 소년이었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사망하던 해인 1781년부터 바다 건너 영국 본토의 명문 사립 학교인 이튼 (Eton) 학교를 3년간 다녔습니다. 그가 이 명문 학교를 고작 3년만 다녔던 것은 2가지 이유였습니다.
첫째, 잉글랜드 출신 귀족 가문 자제들이 주로 다니는 학교에서 아일랜드 출신인 그는 일종의 왕따와 무시 대상이어서, 아서는 10대 초반의 어린 마음에 큰 상처를 받고 이 학교를 정말로 증오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문인지 원래 자질이 그랬는지 학교 성적도 영 형편 없었지요.
둘째,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가족에게 들이닥친 경제적 어려움은 마침내 그의 비싼 학비를 대줄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렀던 것입니다. 결국 그의 어머니는 10대 중반의 아서를 데리고 좀더 생활비와 학비가 싼 벨기에 브뤼셀 (Brussels)로 이사를 합니다.
그렇다고 그의 어머니는 아서의 교육을 방관할 수는 없었습니다. 프랑스와는 달리 영국은 장자 상속제가 굳어진 나라라서, 모닝턴 백작으로서의 모든 작위와 재산은 모두 맏형에게 넘어갔고, 동생들은 젊을 때의 교육 외에는 특별히 상속받는 것 없이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해 나가야 했기 때문입니다.
아서의 어머니는 머리가 그다지 좋아보이지 않는 이 셋째 아들의 적성을 나름 잘 파악하여, 그를 앙제 (Angers)에 있는 프랑스 왕립 기마 학교 (French Royal Academy of Equitation)에 입학시킵니다. 자질도 없는 아이에게 무조건 공부만 강요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적성을 찾아주어야 한다는 것이 여기서 드러납니다. 1년 뒤인 1786년 말에 영국으로 돌아온 아서는 예전의 자신감 없고 흐리멍텅한 모습에서 벗어나, 승마와 더불어 뛰어난 프랑스어 실력을 익히고 돌아와 그의 어머니를 기쁘게 했습니다.
문제는 말을 잘 타고 프랑스어를 쏼라쏼라 잘 하는 것으로는 밥벌이가 쉽지 않았다는 점이었습니다. 이 두가지 재주가 그나마 도움이 되는 그럴싸한 직업을 찾다 보니, 사실 선택의 여지가 많지는 않았습니다. 당시 그런 한량 귀족 청년들이 흔히 하던 것처럼, 아서도 군 장교직을 얻기 위해 가문의 빽을 이용하여 당시 아일랜드 총독 (Lord Lieutenant of Ireland)이던 러틀랜드 백작 (The 4th Duke of Rutland)에게 청탁을 넣었고, 덕분에 프랑스에서 돌아온지 몇 개월만에 제73 보병 연대에 소위로 임관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그의 급료는 일당으로 5실링 (현재 가치로 약 6만원)으로서, 이는 그가 의무적으로 참석해야 했던 장교 식당의 식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금액이었습니다. 즉, 다니면 다닐 수록 적자가 나는 직장이었지요. 당시의 이런 장교 급여 체제는 일부러 이렇게 고안된 것으로서, 가문의 뒷받침이 없는 무일푼 청년이 자신의 재능만으로 장교가 되는 일을 막기 위한 제도였습니다.
당시 기득권 세력이 군 장교직이라는 체제 수호에 무척 중요한 사회 계급을 유복한 집안에서 독차지하기 위한 수법 중 하나였지요. 물론 아서는 다시 집안의 빽을 이용하여 불과 6개월만에 일당 10실링을 받는 아일랜드 총독 부관 보직을 꿰찰 수 있었고, 소위 임관 한 뒤 9개월만에 중위로 승진까지 했습니다.
그는 군 장교로서의 직책을 유지한 채로, 아버지의 연고가 있는 아일랜드의 트림 (Trim)이라는 지방에서 출마하여 아일랜드의 하원 의원 (Member of Parliament for Trim in the Irish House of Commons)으로 당선되기도 했습니다. 이 자리는 원래 그의 맏형인 리처드 (Richard Richard Colley Wesley)의 선거구였습니다. 그러다가 아버지인 개럿이 사망하면서 맏형 리처드가 모니턴 백작 지위를 얻게 되었고, 맏형이 이제 귀족으로서 상원 의원 (Irish House of Lords)으로 올라가게 되자 그 동생인 아서가 그 후광을 업고 출마했던 것이지요.
당시 영국의 선거 제도는 그야말로 개판 5분전이라서, 어느 지방이건 가문과 재산의 뒷받침만 있다면 국회 의원으로 당선되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습니다. 소위로 임관한지 4년만인 1791년에는 대위로 승진도 했습니다. 당시 이런 승진은 시험이나 인사 고과에 의한 것이 아니라, 돈을 주고 계급을 사는 것이 영국을 포함한 대부분의 유럽 왕국들의 관행이었습니다. 일반 보병 연대 대위 계급의 가격은 대략 1800 파운드 (현재 가치로 약 4억6천만원)이었고, 대위의 연봉은 약 106 파운드 (현재 가치로 약 2천7백만원)였습니다. 그마나 그 연봉의 절반 이상은 장교 식당의 식대 및 품위 유지비로 다 날아갔으니, 어지간한 가문의 뒷받침이 아니라면 장교 생활을 계속 하기 어려웠지요. 그의 빽은 맏형이자 제2대 모닝턴 백작인 리처드였습니다.
이때 즈음하여 아서는 롱포드 남작 (2nd Baron Longford) 파켄햄 (Edward Pakenham)의 활달하고 아름다운 딸인 키티 (Kitty Pakenham)와 연애를 시작했습니다. 약 1년 넘게 연애를 하다 1793년 그녀에게 청혼을 했으나, 별로 대단하지도 않은 귀족 가문의 셋째 아들이자, 도박 빚만 있을 뿐 별로 비전도 보이지 않는 평범한 대위이던 그는 환영받는 신랑감이 아니었습니다. 그녀의 남동생이자 파켄햄 가문의 가장인 롱포드 백작 토마스 (Thomas Pakenham)가 그 청혼을 거부한 것입니다.
이 실연에 분노하고 좌절한 아서는 사람이 다소 변하게 됩니다. 그는 평소 즐겨 켜던 바이올린을 불태워버리고 이제부터는 정말 출세를 위해 살겠다고 다짐을 하지요. 그는 당장 그 해에 맏형으로부터 돈을 빌려 제33 보병 연대의 소령 자리를 사서 진급합니다. 당시 소령 계급은 3200 파운드 (현재 가치로 약 8억1천만원) 이었습니다. 물론 대위 계급과의 차액만 내면 되었으므로 형에게서 꾼 돈은 1400 파운드 (현재 가치로 약 3억6천만원) 이었겠지요. 그러나 맘을 굳게 먹은 아서의 출세욕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불과 몇 개월 만인 그해 9월 다시 형에게 돈을 더 빌려 제33 보병 연대의 중령 자리를 사서 진급했습니다. 불과 26살에 얻은 중령 자리의 가격은 4500 파운드였습니다. 그러니까 1793년 한해 동안 아서가 형에게 빌린 돈은 총 2700 파운드 (현재 가치로 약 6억9천만원)였던 셈입니다.
어떻게 보면 귀족 나부랭이들끼리는 출세도 쉽다, 돈이면 다 되네 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서가 무리하게 돈을 빌려 중령 계급을 꿰찬 것은 나름 생각이 있는 투자였습니다. 당시 실제로 단독으로 전투를 치룰 수 있을 정도의 부대 규모는 대대(battalion)로서, 이 대대장을 하려면 중령 정도가 되어야 했습니다. 즉, 뭔가 전공을 세워 출세를 하기 위해서의 최소 발판이 중령 자리였던 것이지요. 그리고 그가 속한 제33 보병 연대가 다음 해인 1794년 네덜란드 전장으로 파견되면서 그의 선견지명이 빛을 발하는 듯 했습니다.
1793년부터 벨기에-네덜란드 지방에서는 혁명 프랑스군과 오스트리아군, 그리고 반혁명 연합군 편이던 영국 등이 뒤엉켜 혼전이 벌어지고 있었거든요. 그러나 야심차게 출항했던 그의 부대는 습기찬 네덜란드 저지대의 풍토병인에 시달리다 별다른 전공을 세우지 못하고 1795년 초라하게 철수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 네덜란드 전장이 그에게 아무런 소득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거기서 비로소 진짜 전투란 어떤 것이고, 지휘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배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즉, 겉치레 장교가 진짜 전투 경험을 쌓을 수 있는 on the job training을 받았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 그는 네덜란드 전장에 대해 ‘최소한 뭘 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배웠다’ 라고 평가했습니다.
1796년 연공 서열에 의해 대령이 된 그는 제33 보병 연대가 인도 캘커타 (Calcutta)로 파병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습니다. 1797년 2월 인도에 도착한 그에게는 행운이 함께 했는데, 11월에 그의 형이자 든든한 배경이던 리처드가 인도 총독 (Governor-General of India)으로 부임한 것입니다. 그야말로 호랑이에게 날개를 달아준 셈이었습니다. 그는 다음 해인 1798년부터 여태까지 써오던 웨슬리 (Wesley)라는 성을 웰슬리 (Wellesley)로 바꿨습니다. 그의 가문의 수장이던 형 리처드가 가문의 성을 예전의 스펠링으로 바꾸기로 했던 것입니다. 이때부터 아서는 아서 웰슬리 (Arthur Wellesley)로 불리우게 됩니다.
그의 형 리처드가 인도 총독이 되었다고 해서, 영국이 이미 인도를 식민지로 삼은 상태는 아니었습니다. 당시 인도는 아대륙답게 여러 지방 세력으로 분산된 상태였고, 영국은 벵갈을 비롯한 동부 해안가에서만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영국이 혼자의 힘으로 드넓은 인도를 정복한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중남부의 여러 지방 세력을 각각 회유 또는 군사적 침공을 통해 영국 세력권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던 것은 이 웰슬리 형제의 활약 덕분이었습니다.
가령 세링가파탐 (Seringapatam)의 강력한 이슬람 군주였던 티푸 (Tippoo)를 공격할 때는, 그와 대립 관계에 있던 하이데바라드 (Hyderabad)의 군주 니잠 (Nizam)과 연합하여 그 병력과 함께 티푸를 쳤습니다. 리처드가 기획안을 내고, 아서가 군대를 이끌고 그 기획을 실현하며, 이 형제는 1805년 함께 영국으로 귀환할 때까지 인도의 상당부분을 영국 지배하로 굴복시킵니다. 그 과정에서 아서는 이미 언급한 세링가파탐 공략전, 마라타 연합과의 아사예 (Assaye) 전투, 가윌구르 (Gawilghur) 요새 포위전 등 치열한 전투를 많이 치렀는데, 이 전투들 하나하나는 영국 소설가 버나드 콘월 (Bernard Cornwall)에 의해 샤프 (Sharpe) 시리즈의 소재로 사용되었습니다.
특히 그 중 아사예 전투는 1만이 안되는 영국군과 세포이 병력으로 서양식으로 중무장한 5만이 넘는 마라타 연합군을 대파한 전투로서, 먼 훗날 아서가 대인물이 된 뒤 자신이 지휘한 전투 중 가장 빛나는 승리였다고 회고할 정도의 사건이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아사예 전투에서 그는 자기가 타던 말이 2번이나 적탄에 죽어 넘어질 정도로 몸을 아끼지 않은 용감한 지휘로 5배가 넘는 적을 결정적으로 패배시키는 기염을 발휘하는 등 자랑거리가 아주 많았거든요.
1805년 3월 그의 형과 함께 프리깃함 하우 (HMS Howe) 호를 타고 인도를 떠날 때 그는 더 이상 비전 없는 흐리멍텅한 귀족 출신 장교가 아니었습니다. 그 사이에 그는 소장 (Major General)으로 승진했고 기사 작위 (Knight of the Bath)도 받은데다, 4만2천 파운드 (현재 가치로 약 106억원)라는 거금을 전리품 나포 포상금 (prize money)로 챙긴, 부와 명예, 권력을 모두 손에 넣은 거물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렇게 금의환향한 뒤에 비전이 없다며 자신을 내팽개친 여자네 집을 찾아가는 것은 너무 뻔하고 유치한 이야기 같은데… 그런데 그렇게 했습니다 ! 키티는 여전히 아서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를 안타깝게 지켜보던 키티의 지인들이 아서에게 키티가 아직도 널 기다린다고 알려준 것이었지요. 하지만 키티가 명랑하고 아름다왔던 것은 12년 전의 일이었습니다. 그건 정말 18세기 말엽의 이야기였고, 이제는 19세기 초였지요.
출세하여 당당하게 키티를 찾아간 아서는 그 사이에 마르고 나이가 든 키티 (당시 32세)를 보고 크게 실망했습니다. 그는 키티를 만난 뒤 돌아와 형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그 여자 엄청 추해졌더라고, 세상에 !” (She has grown ugly, by Jove!)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리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 아서는 키티와 결혼을 감행합니다. 어떻게 보면 거의 오기로 결혼한 셈인데, 결혼은 사랑으로 해야지 오기로 해서는 안되는 것이었나 봅니다. 이 부부의 결혼 생활은 결코 행복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서는 그 이후 1807년 8월의 제2차 코펜하겐 전투에도 참전하는 등 활약을 계속 했습니다. (이때의 활약은 버나드 콘웰의 샤프 시리즈 Sharpe’s Prey 편의 소재가 됩니다.) 1808년 4월 중장 (lieutenant general)으로 승진한 그에게 같은 해 6월 남미 베네주엘라로의 원정대 지휘가 맡겨집니다. 당시 남미 베네주엘라에서는 남미 전체를 스페인 및 포르투갈의 식민 지배로부터 독립시키려는 반란 세력이 미란다 (Francisco de Miranda)의 주도하에 활발히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당시 스페인은 영국의 적군이었으므로 스페인의 반란 세력을 돕는 것이 영국의 이익에 부합했기 때문에 영국은 이런 남미 독립 지원을 위한 원정대를 준비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뒤늦게 영국에 1808년 5월 2일의 마드리드 폭동 시건 (Dos de Mayo) 소식이 전해지면서, 스페인이 졸지에 프랑스의 적국이자 영국의 연합군이 되어버렸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자, 아서가 남미로 데려갈 9천 병력의 행선지는 삽시간에 포르투갈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이 정도의 병력은 남미에서 스페인에 대한 반란을 지원하기엔 충분한 병력일지 몰라도 포르투갈을 점령하고 있던 쥐노의 프랑스군을 몰아내기에는 턱도 없이 부족한 병력이었으므로, 지브랄타에서 북상할 5천명의 병력 등 다른 추가 병력들과 합류할 예정이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1808년 7월 30일, 포루투갈의 몬데고 (Mondego) 만 앞바다에 아서가 지휘하는 9천명의 레드코트를 실은 영국 함대가 나타납니다. 이렇게 이베리아 반도에 나타난 아서 웰슬리는 6년 뒤 이베리아 반도를 떠날 때는 웰링턴 공작 (the 1st Duke of Wellington)의 작위를 가진 유명 인사가 되어 있었습니다.
원문 : Nasica님의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