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1월에 실린 이코노미스트의 기사 한 꼭지가 남북관계에 큰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한국 맥주가 대동강 맥주보다 맛이 없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영국까지 날아가서 이코노미스트 편집장의 코에 코렁탕을 부을 만한 내용이었지만, 실은 2008년에도 로이터 통신이 비슷한 기사를 실었으니 처음도 아니었습니다.
상식적으로 북한의 술이 한국보다 맛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얼마 전에 마셔본 북한의 금강산 소주의 경우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이걸 마시고 있을까’싶을 정도로 양조 알코올에 물 탄 맛이었습니다. 소주에서 이렇게 차이가 나는데 영국 언론이 인정할 정도로 북한 맥주가 맛있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지요.
이코노미스트의 기사 이후 외신기사 받아쓰던 한국 언론에서도 반향이 있자 동아일보 주말 섹션에서 비교 시음 기사를 싣기도 합니다. 맥주 전문가부터 독일인 유학생까지 한국 맥주와 대동강 맥주를 같이 마셔보고는 모두 대동강 맥주의 손을 들어주면서, 대동강 맥주가 한국 맥주보다 맛있다는 이코노미스트의 기사 내용을 뒷받침해줬습니다.
실은 이미 한국에서도 맥주 좀 마셔본 사람들 사이에서 대동강 맥주가 한국 맥주보다 맛있다는 건 딱히 비밀도 아니었습니다. 2003년에 금강산 관광을 가서 대동강 맥주를 마셔본 사람들을 시작으로 그 뒤 2011년까지 정식 루트와 비공식 루트로 꾸준히 대동강 맥주가 수입되었습니다. 저도 당시에 마셔봤는데 확실히 한국 맥주보다 맛있었습니다.
이런 상식을 뒤엎는 결과는 남한과 북한의 맥주가 둘 다 이상한 탓입니다.
그러고 보니 대동강 맥주가 맛있다는 기사를 실은 외신이 둘 다 영국계로군요, 왠지 수상한 냄새가 납니다.
맥주 하면 알아주는 영국이지만 양조장이 많은 만큼 망하는 양조장도 많은데 180년 역사의 어셔 양조장도 그중 하나였습니다. 대동강 맥주 공장은 바로 그 어셔 양조장 설비를 통째로 사 와서 2000년에 세운 정통 영국 맥주 공장입니다. 영국정부도 북한이 양조장을 사간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지만 아직 대북 제재를 받기 전이라, 별 문제 없이 어셔 양조장의 설비는 부품별로 분해돼서 북한으로 실려갑니다. 그렇게 북한에 팔린 어셔 양조장은 2002년부터 대동강 맥주를 생산하게 됩니다.
정통 영국 양조 설비로 만든 맥주니 영국 언론인 이코노미스트와 로이터가 빨아줄 만도 하지요?
꼭 그렇지는 않아도 대동강 맥주 공장에서 빚은 대동강 맥주의 퀄리티는 쉽게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처음에 영국 기술자에게 배운 대로 말고 꼼수를 부려가며 맥주를 만들 기술력이 없습니다. 이러니 남한 맥주보다 대동강 맥주가 맛있어도 이상할 이유가 없지요.
북한이 이런 이상한 맥주 공장을 세운 첫 번째 이유는 대국민 선전용입니다. 북한에서 맥주는 쉽게 접하기 어려운 사치품입니다. 하지만 대동강 맥주를 다룬 북한 방송을 보면, 인민들에게 맛있는 맥주를 마시게 하기 위한 지도자 동지의 은덕이라고 자랑하며 대동강 맥주를 즐기는 평양시민들을 보여주는데, 탁자 위에 안주 하나 없는 것은 그렇다고 쳐도 피처 대신 잔 하나 더 올려놓은 것은 날조의 향기가 납니다.
처음에 대동강 맥주를 남한에서도 마셔봤다고 했죠? 인민들을 위해서라는 말은 뻥이고 실은 외화벌이용이었습니다. 외화에 눈이 벌건 북한이니 수출 가능한 수준의 맥주를 만들 수 있다면 영국에서 양조장 하나 사오는 것은 일도 아니죠.
대북 제재 때문에 성사되진 못했지만 얼마 전엔 병행 수출로 미국에도 대동강 맥주를 팔아 보려고 했던 모양입니다.
영국제 설비와 영국제 기술, 그리고 수출을 염두에 두고 재료를 아끼지 않은 결과가 북한 맥주라면, 도대체 한국 맥주는 왜 이 모양 이 꼴일까요?
이코노미스트의 해당 기사가 나온 뒤 한국 맥주 회사들은 뒤집어졌습니다. 원래 ‘한국 맥주 맛이 없다’는 기사에 대동강 맥주는 비교용으로 등장했을 뿐이니까요.
맥주 업계는 이코노미스트에 항의 서한을 전달했고, 정헌배 인삼탁주를 만드는 정헌배 교수가 ‘대동강 맥주 논란 유감’이라는 칼럼을 한국일보에 싣기도 했습니다.
정헌배 교수의 칼럼처럼 한국 맥주의 기술력은 세계적인 수준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한국 맥주가 대동강 맥주보다 맛이 없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습니다. 한국 맥주의 운명은 1965년에 결정되었습니다.
1965년 양곡관리법과 함께 운명이 뒤집힌 술이 맥주뿐만은 아닙니다만, 맥주만 보면 당시 100%로 낮지 않았던 주세를 150%로 훌쩍 올려 버렸습니다. 맥주는 곡물 낭비라는 것이겠죠.
그 뒤 먹고살 만 해지면서 맥주의 소비량이 크게 늘었습니다. 하지만 맥주 주세 150%의 고공 행진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1969년 기업 납세 순위를 보면 대한석유공상, 한국전력, 동양맥주, 제일제당, 조선맥주 순이었습니다. 3, 5위가 맥주회사일 정도로 맥주는 세금을 많이 냈습니다. 전체 주류 판매의 6%를 차지했던 맥주가 주세는 27%를 냈으니 술이 아니라 세금을 마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이건 6, 70년대 뿐만 아닙니다.
한국 맥주의 세금은 맥주가 대중적인 술이 되어도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위스키 주세가 72%였던 2000년에도 120%였고, 2007년에 와서야 위스키와 같은 72%가 될 수 있었습니다. 위스키보다 맥주 세금이 비싼 나라는 거의 없을 겁니다.
이렇게 오랫동안 높은 주세에 시달리다 보니 한국 맥주는 50년 동안 적은 재료로 어떻게든 마실 수 있는 맥주를 빚을 수 있는 기술력을 쌓게 됩니다.
그런데 그동안 높은 주세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해도, 맥주의 주세가 120%에서 72%로 떨어지던 2000년과 2007년 사이에 맥줏값이 싸지길 했나요, 맥주가 더 맛있어지길 했나요? 50년에 걸쳐 드디어 싱거운 맥주에 소비자 입맛을 맞췄는데, 이제 와서 호프 등을 더 넣고 비싸게 만들 필요가 없지요. 재료를 아껴가며 맥주를 빚는 것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막상 상표도 안 붙이고 일본에 OEM으로 수출하는 맥주는 그렇게까지 재료를 아끼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한국 맥주가 물 같아지는 비밀이 조금 이해가 가지 않나요? 이래서 영국 기술로 만든 대동강 맥주하고 비교해서 맛없다는 소리를 듣게 된 겁니다.
같은 한국 맥주가 맛이 없다는 내용이지만, 2008년 로이터 기사와 달리 2012년의 이코노미스트 기사가 한국에 큰 반향을 일으킨 것은 어째서였을까요? 그 사이 한국 사람들도 한국 맥주 외에 다른 나라 맥주를 접하면서, 한국 맥주가 밍밍하다는 공감대가 훨씬 커졌기 때문이 아닐까요? 한국 맥주회사들이 이번 기사에 앞뒤 안 맞는 변명을 늘어놓는 대신 맥주 맛에 좀 더 신경 써줬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