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가 중남미 순방을 마치고 돌아온 다음 날인 4월 28일 오늘 홍보수석을 통해 대국민 메시지를 발표했다. 소위 ‘성완종 리스트’로 불리는 대통령 최측근 정치인들의 뇌물 스캔들에 대한 입장을 밝힌 것인데, 실로 그가 무능하고 비겁한 역대 최악의 대통령임을 다시 한 번 증명했다고 할 수 있겠다. 다음 링크에서 전문을 읽을 수 있다.
한국일보 – [전문] 朴대통령 “누구든 부패 용납 못해…반드시 정치개혁”
1. 유감을 표명하는 게 아니라 사과를 해야 한다
메시지는 총리 사의에 유감을 표하며 시작한다. 정치인들이 말하는 ‘유감’이란 영어 표현 ‘Regret’을 번역한 것으로, 뭔가 입장 표명은 해야 하는데 ‘사과(Sorry)’하기엔 애매한 상황일 때 많이 쓰인다. 하지만 사실 ‘Regret’이 ‘그런 일은 일어나지 말았어야 했다’는 후회의 감정이라면 ‘유감’은 섭섭함이나 불만을 뜻하는 말이라서, 한국말 ‘유감’은 영어 ‘Regret’과 달리 ‘사과(Sorry)’를 대체할 만한 단어가 아니다.
게다가 총리와 전 비서실장을 위시한 최측근들이 뇌물 스캔들에 연루된 이 정도 사태에 ‘사과’가 아니라 ‘유감’을 표했다는 것은 대단히 유감스럽다. 유감이란 원래 이런 뉘앙스의 단어입니다 겅듀님.
2. 자신은 부패와 관계 없는 듯한 유체이탈 화법
친’박(朴)’ 정치인들의 대규모 뇌물 스캔들에 대해 정작 그 ‘박(朴)’의 책임은 실종되었다. 박근혜는 “과거부터 내려온 부정과 비리, 부패를 척결”하겠다고 말한다. 현재 대통령인 본인의 책임을 은근슬쩍 과거의 탓으로 돌리는 그의 모습은, 그 자신이 적폐의 심장인 주제에 늘 적폐 해소를 부르짖던 바로 그 유체이탈화법의 연장선상이다.
“과거부터 내려온 부정” “그동안 만연됐던 지연, 학연, 정치문화 풍토” “금품의혹들이 과거부터 어떻게 만연해오고 있는지” … 이쯤 되면 정말 할 말이 없어질 정도다. 그러면서 박근혜는 계속 얘기한다. “정치가 새로 거듭나야 한다”, “새로운 정치개혁과 문화를 만들어나가야 한다”. 실소가 터져나온다. 박근혜 본인이 중심인 비리 스캔들을 두고, 책임은 ‘과거’에 돌리고 자신은 이를 개혁할 초인으로 봉하고 있는 것이다.
3. 구체성 없이 뭉뚱그리는 이야기들
대통령에게 사과의 의지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건 다른 부분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이번 사태를 다시 짚어보자. 허태열 7억, 홍문종 2억, 유정복 3억, 홍준표 1억, 부산시장 2억, 김기춘 10만 달러, 거기에 이병구와 이완구. 소위 ‘성완종 리스트’에서 촉발된 여당 친박 정치인들의 대규모 뇌물 스캔들이다. 개중 이완구 총리는 혐의를 증명할 만한 정황이 상당부분 드러난 상황이고.
그러나 박근혜의 대국민 메시지만 봐선 총리가 왜 사퇴했고 박근혜가 왜 유감스럽게 생각하는지 알 수가 없다. 전문을 전부 읽어봐도 무엇 때문인지 말하고 있지 않다. ‘이번 문제’ ‘최근 사건’ 따위의 실체 없는 표현들로 대충 눙쳐버린다.
박근혜의 대국민 메시지에서 유일하게 구체적으로 명시된 것은 참여정부 때 성완종이 두 차례 사면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과거의 정치를 개혁해야 한다는 메시지 직후에 이 사면을 언급하며, 대국민 메시지 중 가장 많은 분량을 할애하여 성완종 사면을 비난한다. 국민도 납득하지 못할 거라고 힘을 줘서 말이다. 총리가 돈 받아먹은 건 국민이 납득할 만 해서 언급 안 하셨나요 겅듀님.
4. 처음부터 끝까지 엉망진창인 이야기들
유체이탈 화법과 중언부언, 책임 회피와 실행할 생각도 없는 정치개혁 놀음으로 멋진 용을 그려냈으니 이제 용의 눈동자를 찍을 차례다. 대국민 메시지를 통해 노무현과 참여정부를 까던 박근혜는 이제 뜬금없이 “세계는 뛰고 있다”는 쌍팔년도식 메시지를 던진다. 중남미에 다녀왔더니 세계가 뛰고 있더라, 대한민국 국민도 방향을 잡아 기적을 만들자.
그럼 어떻게 방향을 잡아 기적을 만들 것인가? 정쟁에서 벗어나 정치를 개혁해야 한다고 한다. 어떻게 정치를 개혁할 것인가? 공무원 연금을 처리해야 한다고 한다. 놀랍게도, 이 기자회견을 마무리하는 메시지가 저거다.
정리하자면 이렇다. (뭔 사건이었는지는 말할 생각 없지만 어쨌든) 어떤 사건으로 총리가 사퇴했는데 유감스럽다고 한 마디 던진 뒤, 참여정부를 욕하며 정치를 개혁해야 한다고 일갈하다가, 정치개혁의 구체적인 방안으로 공무원연금 처리를 요구하며 끝. 그래서 결국 주제가 뭔가? 공무원 연금 처리의 시급성? 이게 만일 논설문이라면 0점이다.
5. 나는 당신을 대통령이라 부를 수 없다
인두염에 위경련으로 아프다는데 악플이 달리는 게 괜히 그런 게 아니다. 이번 중남미 순방은 박근혜의 해외여행이라 불렸다. 그렇게 볼 수밖에 없었다. 시급한 현안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뭘 관람하고 K팝 팬들을 만났더다라 하는 소식만 들려왔다. 와닿는 성과도 없었고 이번엔 중남미로 청년을 수출하자는 헛소리만 했다.
반면 국내에서는 세월호 1주기, 대통령 최측근들의 대규모 뇌물 스캔들 등 대통령이 나서야 할 일들이 산적해있었다. 외교적으로도, 같은 시기 인도네시아에서 반둥회의가 열리는 등 중요한 일정이 많았다. 이 회의에는 중국과 일본 정상이 직접 참석했다.
돌아와서도 현안 처리는 뒷전이고 대통령은 앓아누워버렸다. 청와대는 대통령이 ‘절대 안정’해야 하는 상황이라며, ‘안정’과 ‘절대 안정’의 차이를 강조했다. 경고나 엄포로 들린다. “나 건드리지 마” 하고 방에 쳐박힌 어린아이를 보는 것 같다. 이러니 가지가지 한다는 얘기가 안 나올래야 안 나올 수가 없다.
그 와중에 나온 대국민 메시지는 정말 최악이다. 일이 터질 때마다 남에게 책임만 돌리고 자기는 고결한 영웅 역할만 하려드는 저 유신 시대의 공주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직도 삼 년이나 대통령 대신 공주님을 오냐오냐 모셔야 할 팔자다. 부정한 방법으로 당선되었으며 대통령으로서의 역할조차 할 줄 모르는 저 사람을 나는 도저히 대통령이라 부를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