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물방울』이라는 만화가 있다. 한때 와인 붐을 타고 글은 읽기 싫으나 와인은 알고픈 사람들에게 필독서가 되었다. 그러나 만화라는 매체의 전개 특성상 드라마틱한 효과와 과장이 함께 퍼지며 오해도 같이 퍼지는 부작용이 생겼다.
일례로 와인바에 온 손님들이 소믈리에에게 『신의 물방울』을 보여주며 이런 디캔팅을 해달라고 요청하자 “손님, 이건 와인이 아니라 물엿입니다.”라는 답을 들었다는 일화가 있다.
위 사례 정도는 아니더라도 『신의 물방울』을 보고 큰맘 먹고 와인을 맛본 사람들은 비슷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기대에 가득 차 와인 한 모금을 머금었지만 ‘왜 강 건너 춤추는 처녀가 보이지 않을까…?’ ‘먹어본 것 같지만 사실은 먹어보지 않은 이 맛은 뭐지…’ ‘아 개 떫어. ㅈㄴ 맛없네’ 정도의 감상이 지나가는.
『신의 물방울』을 보고 와인을 안다고 생각한 것이 잘못이었다. 와인을 아는 것이 아니라 와인 감상기를 알게 된 것일 따름이다.
아는 게 독이다
필자도 처음엔 커피를 글로 배웠다. 군인 신분이라 선택의 여지도 없긴 했고… 각종 커피 서적을 읽으며 꿀 같은 상상을 거듭했다. 내가 알고 있던 커피는 가공된 인스턴트였고, 갓 볶은 커피는 세상에서 제일 향기롭고, 카페는 엄선된 아라비카 커피를 정성껏 만들어 내놓는 커피 전문점이고… 등의 망상은 제대와 동시에 깨어졌다.
꾸역꾸역 찾아간 카페의 커피 맛과 내가 추출한 커피 맛 모두 상상 속의 그것과는 달랐다. 지식과 리얼의 갭은 점점 커지고 뭐가 뭔지 싶은 혼란에 빠져 ‘난 잘못되지 않았어…’를 중얼거리며 상상 속의 커피를 찾아 마셔대길 계속했다. 군 시절 『바람의 크로노아』라는 타이틀을 보고 미소녀 모험물일 것이라 생각했다는 《게임라인》 정태룡 기자의 일화가 떠오른다.
몇 개월이 지나고 커피 맛이 다르게 느껴지는 걸 느끼기 시작했다. 기대하던 상상 속의 그 맛은 아니었지만 소소한 맛과 향이 달라지는 걸 구분할 수 있었다. 차이는 몹시 미묘해서 대뜸 알아채긴 어렵지만 분명해서 각각의 카테고리에 집어넣을 수 있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카테고리는 잘게 나누어졌다. 블로그 글에 점점 많은 태그를 달 줄 알게 되는 것과 같았다.
그 차이를 타인에게 설명하려고 하자 내가 알던 지식이란 이 차이를 묘사해놓았을 뿐이라는 것도 알았다. 글로 옮겨진 지식이란 지식의 탁본일 뿐이라는 걸 그제야 알아차린 것이다.
커피 애호가는 저질 입맛
덕분에 커피 애호가 칭호를 달고 커피 관련 도서를 낸 경험이 있지만 내 미각은 신뢰성이 없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남이 마실 커피를 골라주는 일에 잼병이다. 나는 ‘어떤 커피가 맛있어요?’라는 질문만큼 곤혹스러운 게 없다. 내가 마실 커피는 신나게 고를 수 있다. 약한 바디에 적절한 신맛, 스모키한 향 등등 그때그때 원하는 요소를 집어넣어 고른다.
하지만 내가 쓰는 ‘약한’ ‘적절한’이라는 단어가 온전히 내 전용이라 타인에게 납득시키기 어렵다. 내게 약한 바디가 남들한테는 강할 수도 있고 스모키한 향이 그저 담배 냄새로만 여겨지는 사람도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겁이 난다. 때문에 ‘아무거나 먼저 먹고 다른 것 먹어보면 차이를 알 수 있을 거예요’가 고작이다.
카페 추천도 어려운 것이 커피는 그때그때 맛이 다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한 모금 마셔보고 맛있다고 생각해 또 찾아간 카페가 형편없는 커피를 내놓는 이유는 정말 부지기수로 많다. 원두의 상태, 그날의 습도와 온도, 마실 때의 기분 등등이 모두 커피 맛에 영향을 끼친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망하지 않을 정도의 커피와 카페를 추천하는 것이 고작이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건 각자 다르지만 싫어하는 건 대개 일치해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모를수록 행복하다
나는 그저 인당 소비량이 당신에 비해 월등히 높은 헤비 소비자일 뿐이며, 먹다 보니 알게 되고 알고 먹는 것은 전과 같지 않음을 경험한 사람일 뿐이다. 커피를 잘 안다고 맛없는 커피가 맛있어지지 않는다.
맛없는 이유를 알 것 같으면 애호가이고 이걸 설명할 수 있으면 전문가일 따름이다. 그래서 커피 이야기를 할 때도 주관을 빼려고 노력했다. 정말 그랬는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많은 경우 전문가는 일반인이 누려야 할 즐거움을 빼앗아가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냥 마셔라. 전문가도 아닌 나의 말은(내가 전문가라 가정해도) 당신이 직접 마신 커피 한 잔 경험에 비할 바 못 된다. 문자에 집착해 커피의 즐거움을 잊지 않기를 바란다. 저급한 애호가인 내가 그러려고 노력하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