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환은 지난 2013년 1월 15일 방송된 KBS2 ‘김승우의 승승장구’에 출연해서 이탈리아 세리에A 진출 당시 페루자에서 한솥밥을 먹던 마르코 마테라치와의 일화를 소개했다. 그는 “하루는 마테라치가 문을 뻥 차고 들어오더니 나에게 마늘냄새가 난다고 대놓고 얘기했다.”라며 마테라치에게 당한 인종차별에 대해 털어놓았다.
유럽 내에서도 이탈리아, 러시아는 특히 인종차별이 심하다고 알려져 있다. 일본의 대표적인 스타 나카무라 슌스케도 이탈리아 세리에A의 레지나에서 뛸 당시 동료들이 노란색 훈련용 자켓을 주면서 “넌 동양인이니까 노란색 자켓을 입어라”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렇듯 무례한 언사, 언행으로 다른 인종에 속한 사람들에게 불쾌감을 안겨주거나 또는 물리적인 해를 가하는 인종차별 행위들이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비단 이 문제는 먼 나라 이야기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한 민족 한 국가’를 강조하며 폐쇄적으로 살아온 대한민국에서는 인종차별 문제가 크다. 사회의 전체주의적 분위기와 유교적 가치관과 맞물려 인종차별 문제가 아예 수면 위로 드러나지도 않는 수준이니 더욱 심각하다고 할 수 있겠다.
특히 한국사회의 인종차별 주요 대상은 주변 아시아인들이다. 그 중에서도 일본인을 상대로 행해지는 경우, 과거 역사 문제가 겹치면서 “그들이 과거에 우리에게 몹쓸 짓을 했기 때문에” 우리가 그들에게 무례하게 대하는 것을 정당화 하는 경향이 있다. 북한처럼 가족의 죄를 이어받는 연좌제를 적용하자는 얘기인가? 일본 정부에게 과거사에 대한 사과를 요구하는 것이 아닌 일본 사람들을 상대로 무차별적으로 저지르는 인종차별은 확실히 문제가 있다.
특히 2년 전, 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2011 아시안 컵 4강전 한국과 일본의 남자 축구 경기에서 기성용이 페널티 킥을 골로 연결시키고 선보인 “원숭이 셀러브레이션”과 그 이후 일어난 일들은 한국 사회의 인종차별의 대표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겠다.
당시 이를 일본 팬들이 경기장에 욱일 승천기를 내건 것과 엮어 ‘통쾌하다’는 반응이 많았는데, 참으로 안타까운 반응이었다. 당시 팬들과 언론 일부에서는 자각 있는 소리가 나오기도 했는데 이에 기성용을 옹호하는 사람들의 괴상한 논리가 잇달아 나오기도 했다. 심지어는 “원숭이는 일본을 상징하는 동물일 뿐인데 무엇이 잘못되었는가?”라는 정신이 안드로메다로 떠나 있는 이야기까지 나오기도 했다.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한국 사회가 아직 이런 인종차별적인 요소들을 구분조차 하지 못한다는 데 가장 큰 문제가 있다. 이런 무지함의 밑바탕에는 ‘낯설음’이 있는데, 지금이야 우리가 여행도 자유롭고 국내에서 외국인들을 찾아보기가 좀 더 쉬워졌지만, 90년대 이전만 하더라도 잘 알려지지 않은 폐쇄적인 동아시아 독재 국가였고 인종을 포함한 사회의 모든 부분에서 다양성이 보장되지 않는 병영국가였다. 특히 역사 교육에서 민족주의 교육을 강화하면서 ‘한 국가 한 민족’을 지나치게 강조했기에 사회 전체적으로 인종차별이 일어날 소지가 더욱 강화되었다.
예를 들어, ‘살색’ 논란을 보자. 어릴 때 크레파스를 사용할 때 많이 봐왔고 제일 많이 썼던 이 색상은 동북아시아 황인종의 살갗의 색상으로, 현재 살구색으로 불리고 있다. 1964년 제정된 색이름 표준 규격부터 ‘살색’이라는 이름이 붙었으나 인종차별의 요소를 느낀 2001년 성남 외국인노동자의 집 대표인 김해성 목사의 국가인권위원회 청원으로 ‘연주황’으로 바뀐 후, 2005년 김해성 목사의 여섯 딸들이 다시 “어려운 한자어로 어린이를 차별”한다며 쉬운 한글말로 바꾸어 달라고 하여 살구색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한마디로 이 ‘살색’은 장장 37년이나 아무런 문제 제기도 되지 않았던 것이다.
사실상 90년대 이다도시, 이참(귀화 당시 이한우) 그리고 하일(로버트 할리) 등이 방송에 나오기 전 까지만 해도 한국인의 정체성은 “한반도에서 살아온 한민족”으로 굉장히 배타적인 성적을 띄고 있었다. 좀 더 많은 ‘다른 인종의 한국인들’이 조명을 받은 후에도 지금까지 전체적인 사회 분위기는 크게 변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방송에 노출된 해당 귀화 한국인들은 모두 ‘선진국’ 출신의 ‘백인’ 귀화인이라는 점이다. 유색인종이면서 한국인으로 귀화한 사람들에 대한 조명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점에서도 한국 사회의 인종 차별에 대한 색다른 점을 엿볼 수 있다.
한국 뿐 아니라 많은 나라에서 인종차별이 행해지고 있다. 그런데 보통 그 인종차별들은 자국인과 외국인을 나누어 차별하는 것들이다. 그런데 한국 사회의 인종차별은 약간 다른 성향을 띄는데, 그것은 인종을 백/황/흑인종으로 나누어 차례대로 상/중/하로 평가하는, 전근대적인 제국주의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유교주의적 가치관 및 계급적인 분류에 익숙한 한국 사회의 특징과 맞물려 더욱 기이한 인종차별 행태를 만들어 냈다. 예를 들어 앞서 언급한 인종주의에 더불어 금전만능주의 및 학력우선주의가 섞여 “백인이지만 금융업계 등 고소득 직종 및 방송 출연자”, “영어 강사 백인”, “영어 강사 유색 인종” 이런 식으로 분류를 해 나가는 인종차별 형태가 더해졌다.
심지어는 영어 강사 내에서도 출신 국가로 분류를 당한다. 이에 관한 개인적인 에피소드가 있는데, 스코틀랜드 출신 친구가 마포구의 한 초등학교에서 영어 선생님으로 있을 때의 얘기였다. 하루는 그 친구가 부모님 초청 수업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수업이 끝나고 한 학부모가 학교 측에 자기 아이의 원어민 선생님이 미국인이 아니라고 항의를 했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이것 또한 명백한 인종차별이다.
이 즈음 되면 고개를 갸우뚱 거리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미국인이 아니라고 항의를 했다는 것이 왜 인종차별인가? 앞서 언급한 기성용 인종차별 셀러브레이션 건에서도 “한국인과 일본인은 모두 황인종인데 어떻게 인종차별이냐”라는 무지한 의견을 표출한 사람도 있었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인종이란 정의하기 나름이기 때문이라는 거다.
국립 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의하면 인종이란 “인류를 지역과 신체적 특성에 따라 구분한 종류. 백인종, 황인종, 흑인종이 대표적이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흔히들 인종 구분의 척도로 알고 있던 백.흑.황인종 구분은 인종 구분의 방법 중 하나라는 것 뿐이다. 한국인과 일본인 또한 다른 인종이 될 수 있고, 문화적인 범주에서도 인종구분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예를 들어 비욘세는 ‘미국인’이라는 범주에 들어갈 수도 있고 ‘아프리카 계 미국인’이라는 범주에도 들어갈 수 있다.
그러나 ‘혈통주의’로 따지고 들어가자면 그의 어머니는 아프리카 계이면서도 프랑스 계, 인디언 계, 심지어는 아일랜드 계 혈통까지 모두 가지고 있는데, 한국의 민족주의적 순혈주의 분류법에 따르면 비욘세는 어느 부분에 들어가야 할 것인가? 피부 색의 어두움 정도로 판단할 것인가? 그러면 채도가 어느 정도가 되면 비욘세는 아프리카 계이고 어느 정도부터는 인디언 계로 분류가 될 수 있는가?
현재 한국에는 귀화 한국인 및 외국인 거주자 수가 늘어나면서 ‘다문화 정책’에 대한 필요성이 높아지면서 갖가지 다문화 정책을 시행 중이다. 그러나 대부분은 한국으로 이주한 사람들에게 ‘한국스러움’을 정의하고 이를 강제하거나 그 사람들이 한국 사회에 별 탈 없이 자신을 적응시킬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이 전부이다. 진정 ‘다름’을 인정하고 사회적인 통념에서도 이를 반영할 수 있는 준비가 매우 부족한 상태이다. 이는 비단 인종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병역, 성적 소수자, 여성 문제, 빈부 격차 등 각종 문제에 대해서도 한국 사회는 사회적 약자들에 대하여 굉장히 폐쇄적이고 강경한 태도를 취해왔고 이는 단순히 한국 정부에 국한된 문제가 아닌, 한국 사회 전체 구성원들의 인식이 매우 배타적이고 폐쇄적이며 때로는 파시즘적인 요소까지 모두 갖추고 있음에서 나온 것이다.
특히 요 근래 외국인 범죄 관련 글이 언론에 과거에 비해 상당히 많이 노출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 한국 언론들이 해외에서 한국인들에게 일어난 사건들을 ‘한국인 혐오 범죄’로 둔갑시켜 과대 포장하여 전달하는 경우가 잦다. 예를 들어 한 기사에 나온 내용을 보자면 “시드니에서 발생한 한국인 폭행 사건 2건의 경우 돈만 뺏으면 되지 왜 골프채 등으로 때렸겠느냐”라는 한 사람의 개인 의견을 사실인 것 마냥 보도하고 있다. 물론 호주에 거주하는 사람으로서 이 동네에 인종차별이 어느 정도 존재는 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호주에서 한국인을 특별히 범죄 대상으로 지목하여 범죄가 일어나지는 않는다. 무엇보다도 한국인을 따로 범죄 대상으로 지목할 이유가 있는가? 그럴만한 이유는 딱히 존재하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이는 다른 국가들에게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경제가 악화되고 사회적 불안이 심화될 때 외국인을 사회 불안 현상의 주범으로 모는 일이다. 과거 한국인이 그 일로 심하게 피해를 입은 적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관동대지진 한국인 학살’ 사건이다. 지금이야 그렇게 과격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곤 하더라도 위에서 언급한 ‘해외 한국인 혐오 범죄’ 기사와 맞물려 외국인 혐오(제노포비아)를 조장하는 것이 사실이다.
한 광고에 나온 ‘대비’에 따르면 한국인의 완전 반대 인종은 스코틀랜드인이다.
사실 지금 호주에 나와 있어 보니, 나 자신을 보더라도, 워킹 홀리데이를 온 많은 한국인 청년들을 보더라도, 외국인 노동자라는 신분은 사회적 약자이다. 사회적 약자의 위치를 지금까지 삶에서 경험해 보지 못한 나 같은 사람에게는 상당히 많은 생각이 들게 해 준 좋은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내가 어느 국가에서 태어났고 어느 혈통을 지니고 있느냐가 아니다. 나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고 어떻게 행동하고 어떻게 말하느냐. 그것이 중요한 것임은 세계 어디든 똑같다.
한국이 언제까지나 “머리 검고, 살구색 피부를 지닌 사람들의 사회”로만 남을지는 그 누구도 모른다. 그러나 너와 나의 다름에 인색한 사회, 이런 사회의 각박함과 일방적인 매도 속에서 상처를 받는 것은 비단 외국인 뿐만이 아닐 것이다. 우리 자신을 위해서라도 이제는 한국 사회 내의 인종 차별에 대해서 좀 더 생각을 해보아야 할 시기가 왔다. 언제까지 “단일민족” 운운하며 꿩처럼 고개를 땅에 처박고 있을 것인지. 너와 나 우리 한 명 한 명이 바뀌어 감으로 인해 더 나은 미래를 꿈꾸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