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스퀘어 에닉스에서 만든 밀리언 아서(원제:확산성 밀리언 아서)가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앱스토어에서는 출시 후 1개월이 된 지금까지 계속해서 매출 1위를 지키고 있으며, 구글플레이에서도 매출 상위권을 유지하고 있다. 애니팡이나 드래곤 플라이트처럼 국민적 관심까지는 아지더라도, 서비스 후 2번이나 네이버 검색순위 1위에 오르기도 했다.
이례적인 결과다. 왜냐하면 밀리언아서의 첫 인상은 ‘하는 사람들만 하는’ 게임이기 때문이다. 일러스트는 일본색이 짙은 편이고 여성 캐릭터의 비율이 매우 높은데다가, 무엇보다 카드를 모아서 덱을 짜는 트레이딩 카드 게임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물론 국내 서비스 이전부터 플레이하던 열성 유저들도 있었고, 먼저 서비스된 바하무트의 분노를 통해 이런 게임에 익숙해진 유저가 있겠지만 이 정도로 화제가 되리라고는 유저나 업계 관계자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는 어찌 보면 예견된 일이었다. 일본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밀리언아서 스타일의 게임. 이른바 ‘모바일 소셜 게임’들이 자극하는 심리가 한국의 온라인 게임과 거의 동일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온라인 게임
한국에서 온라인 게임이라고 하면 보통 MMORPG를 일컫는다. MMORPG는 리니지를 위시한 ‘다중접속 역할수행 게임’으로, 대규모의 인원이 동일한 시각에 게임 내의 동일한 공간에서 플레이할 수 있는 롤플레잉 게임을 의미한다. 사람들이 MMORPG를 플레이하는 동기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주로 전투, 성장, 경쟁, 수집, 커뮤니티의 5가지가 가장 주효하게 작용한다. 시간이 지나 다양한 장르의 온라인게임이 등장했지만 대부분의 게임에서는 여전히 이 요소들로 게임을 계속하는 동기를 부여한다. 몇몇 요소들은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개발사들은 이 동기를 자극하여 매출을 유도한다.
좀 더 근원적인 동기로 다가가기 위해 다중접속 개념을 제거하고 롤플레잉 게임만 남겨 보자. 위에 언급했던 요소 중 전투와 성장이 남는다. 전투의 핵심은 ‘전략’이다. (전술 혹은 컨트롤이라는 단어로 대체될 수 있다.) 전투는 플레이어의 전략에 따라 이루어진다. 만약 전투에서 전략이 없다면 그것은 아무 의미도 없는 행위가 되며, 전투는 그저 성장을 위한 과정에 불과하게 될 것이다.
반면 성장의 핵심은 ‘보상’이다.(돈 또는 경험치라는 단어로 대체될 수 있다.) 보상을 통해 캐릭터가 성장하기 때문이다. 만약 캐릭터가 보상을 받아 성장하지 않는다면 전략이 전투에서 승부를 가르는 유일한 요소가 될 것이다.
이 두 요소중 어느 것이 롤플레잉 게임에서 근원적인 동기일까? 이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이야기와 비슷하다. 캐릭터는 전투에 의해 성장하고, 성장해야 다음 전투에서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에 두 요소는 서로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또한 전투는 기본적으로 성장하기 위한 과정이지만, 한편으로 자신의 캐릭터가 얼마나 성장했는지 확인하는 수단이기에 더욱 그렇다.
새로운 강적이 나타났을 때 플레이어에게는 최고의 전략을 구사할 수 있을 때까지 반복해서 도전하는 방법과 전략이 필요없는 전투를 반복하여 성장하는 2가지의 선택지가 주어진다. 길어야 30시간 정도면 끝을 보는 싱글플레이 게임을 할 때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하겠지만, 몇백 시간 몇천 시간을 성장에 투자하는 온라인 게임을 할 때는 대부분의 경우 피로가 덜한 후자를 선택하게 된다. 최고의 전투보다는 최고로 편한 자세와 적은 클릭 수가 더 중요해진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어느 쪽이든 성장하기 위해 전투를 하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롤플레잉 게임은 시간을 투자해서 성장하는 게임이기도 하다. 격투나 전략 게임에서 최고가 되는 데에는 재능과 연습이 필요하지만, 롤플레잉 게임에서 최고가 되려면 그저 잉여력시간이 필요하다.
일본의 모바일 소셜 게임
이것이 일본의 모바일 소셜 게임이 취하는 방식이다. 밀리언 아서에서는 일정 시간이 지나면 충전되는 행동 포인트(AP)를 사용하여 던전을 탐색할 수 있다. 한 발 걸어갈 때마다 성장하고, 때로는 아이템을 얻기도 한다. 포인트를 모두 사용하는 데에는 10분이 걸리지 않고, 드물게 발생하는 보스와의 전투 역시 통으로 스킵할 수 있다. 모험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보상을 받는 행위에 가깝다.
기존에 롤플레잉 게임을 즐기던 사람 중 보상만 주는 이런 게임이 무슨 롤플레잉이냐고 반문할 지 모르겠다. 플롯에 입각한 과정 자체를 즐기던 패키지 게임 마니아들은 그 정도가 더욱 심할 것이다. 실제로 위에 생각해 봤던 닭과 달걀의 문제에서 그냥 달걀만 남아있는 셈이니 그럴 만도 하다. 그냥 하염없이 기다리면 무리없이 진행할 수 있는 게임을 누가 플레이할까?
그런데 여기에 아까 전에 제거했던 다중접속의 개념을 다시 합치면, 놀랍게도 굉장히 강렬한 게임이 된다.
밀리언 아서에서는 위에 언급했던 AP와 별도로 보스와 싸울 수 있는 배틀 코스트(BC)가 존재한다. AP와 마찬가지로 시간이 경과하면 자동으로 충전되는 포인트다. 던전에서 보스를 만나면 대부분의 경우 보스를 이길 수 없고 어느정도 대미지만 입히게 된다. 그리고 그 순간 자신이 보스를 발견했음이 친구들에게 알려진다. 전투에 참여한 친구들 역시 보상을 얻고, 타이밍 좋게 보스를 처치한 친구는 보스를 발견한 나와 같은 보상을 받는다.
이 규칙은 단순하지만 매우 다양한 변수를 만들어낸다. 혼자라면 그저 일정시간 기다렸다가 공격하면 될 것을, 친구가 발견한 보스를 공격하기 위해 배틀 포인트를 배분해야 하고, 타이밍 좋게 보스를 공격해야 할 필요도 생긴다. ‘경쟁’의 부활과 함께 대부분의 전투를 제거하면서 증발했던 ‘전략’도 부활했고, 보유한 카드로 더 좋은 효과를 내가 위해 덱을 짜는데도 신경을 쓰기 시작한다. 전략의 부활보다 더 큰 변화는 성장에 의미가 부여됐다는 것이다. 이제 더이상 그저 기다리면 보스를 물리치는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이 발견한 보스를 내가 쓰러뜨리기 위해서는 더 많이 성장해야만 한다.
한없이 강력한 보스가 등장하고, 손쉽게 좋은 보상을 얻기 위해서는 강해져야만 한다. 그런데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 더이상 내가 시간을 투자한다고 강해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농장가꾸기 게임처럼 친구만 늘린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친구가 많아도 내가 어느정도 강해지지 않으면 도움이 안되는 나와 친구를 끊어버릴 수도 있다. 이래저래 캐릭터를 성장시킬 때의 마음가짐이 온라인 게임과 거의 비슷해진다.
갑자기 치열해진 게임 분위기에 적응하려니 게임 시작 시 무료로 받은 뽑기 쿠폰이 보인다. 한 번 뽑아보니 던전 탐험할 때 공짜로 주던 카드와는 일단 간지부터 다른 카드가 나온다. 파티를 구성하고 보스를 한 대 쳐보니 파워의 격이 다르다. 그다지 엄청난 노력을 한 것도 아닌데 갑자기 엄청 강해졌다. 친구를 초대하니 쿠폰이 하나 더 떨어진다. 또 뽑는다. 이번엔 어떤 예쁜 카드가 나올까?
젖과 꿀이 흐르는 공간에서 다마고치 하듯 카드를 모았는데 갑자기 살벌한 레이드 파티에서 무한경쟁에 돌입하게 된다. 왠지 친구들한테 민폐만 주는 것 같고, 다들 금빛뻔쩍하고 예쁜 카드 자랑질인데 나만 후진 카드 투성이고..그리고 플레이어의 머리를 지나 가슴에 하나의 새로운 동기가 작용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결핍.
갑자기 수 년간 나의 지갑에서 돈을 앗아간 여러 온라인게임이 생각난다. 그 때만큼 시간을 요구하지 않을 뿐이지 그 때도 이런 식이었다. 재미있게 플레이하다가 어느 순간에서 부족함을 느끼고, 돈을 쓰면 훨씬 재미있게 게임을 즐길 수 있는 상태가 된다. 옷을 사기 위해 2~3분이라도 반복해서 게임을 플레이하고, 보스 드롭템을 얻기 위해 최저 루트로 던전 공략을 반복한다.
모바일 소셜게임은 온라인 게임에서 이미 귀찮아진 반복 과정을 제거하고 성장과 성장한 자신을 확인하는 즐거움만 남겨 둔, 하나의 발전형태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욕망과 확률의 관계
밀리언아서를 하다 보면 기존의 롤플레잉과의 차이점을 또하나 발견하게 된다. 보스를 잡아도 카드(캐릭터)가 경험치를 얻지 않는다는 것이다. 밀리언 아서에서는 어떤 카드를 성장시키려면 다른 카드를 소비해야만 한다. 한발짝 걸을 때마다 가끔 떨어지던 카드 낱장이 실은 경험치였던 것이다. 어차피 유저가 받을 보상은 평균 기대값으로 통제되기 때문에 실제로 받는 경험치에 변화는 없지만, 플레이어는 뽑는 행위를 계속하며 조금이라도 좋은 카드가 나오기를 기대하게 된다. 이는 디아블로에서 아무 의미없는 아이템을 계속 떨어뜨려 주는 것과 비슷하다. 다만 디아블로에서는 몬스터를 잡을 때 매번 그것을 시행하고, 밀리언아서에서는 몇 발짝 걸을 때마다 시행하는 차이일 뿐이다.
플레이어가 어떤 카드를 얻는 지 결정하는 규칙을 한 번 생각해보자. 복잡할 것 같지만, 원리는 매우 단순하다.
1. 드롭될 수 있는 모든 카드에 대해 각각 정해진 눈 수의 주사위를 배정한다. 예를 들어 싸구려 카드는 1 ~ 6의 주사위를 배정하고, 최고급 카드는 1 ~ 1000의 주사위를 배정한다.
2. 그리고 모든 주사위를 한 번에 던져 1이 나온 주사위를 성공으로 친다.
3. 성공한 주사위 중 하나를 골라 해당 카드를 얻는다. 성공한 것이 없으면 그냥 실패.
눈이 1000개짜리인 주사위가 배정된 카드가 나올 확률은 0.1%지만, 수많은 유저가 시행하다 보면 꽤 많은 수가 풀리게 된다. 확률이라는 것이 참 오묘해서 게임을 오래 한 플레이어는 경험을 통해 자신이 1000개의 눈을 가진 주사위를 던져 1이 나와야만 좋은 카드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머리로는 알지만, 가슴은 매 번 좋은 카드를 갈망하게 된다.
이 경험은 보스를 쓰러뜨렸을 때 나오는 좀 더 좋은 카드로 이어지고, 이어서 결제 후 뽑기를 했을 때 나오는 더 좋은 카드까지 이어진다. 큰 목표와 플레이 핵심은 온라인 게임과 다르지 않지만, 몇십 시간을 들여 내 캐릭터의 레벨 1을 올리고 보스를 잡아 한 번 설레임을 느낄 시간에 밀리언 아서에서는 수십번 설레임을 느끼고 수중에 예쁜 캐릭터 카드를 수십장 갖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결제유저가 되면 그 뒤는…
갈라파고스의 세계진출
밀리언아서가 네이버 검색순위 1위를 찍은 뒤 몇몇 매체에서는 애니팡, 드래곤 플라이트 다음 게임이라는 설레발을 치기도 하지만, 그건 매출 순위만 보고 내린 섣부른 판단이다. 글을 쓰는 현재 밀리언아서는 앱스토어 무료 게임 항목에서 14위, 구글플레이 무료게임 항목에서 28위를 기록하고 있다. 이는 새로 게임을 하러 들어오는 유저가 많이 감소했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출이 1위라는 것은 현재 게임을 즐기는 유저들이 굉장히 많은 금액을 결제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굳이 통계를 들이대지 않더라도, 지금 드래곤 플라이트나 애니팡 정도의 게임만 하는 사람이 밀리언아서를 플레이할 확률은 극히 낮아 보인다.
사실 밀리언아서는 이런 방식의 게임 중 후발주자에 속한다. 일본은 SMS 대신 폰메일을 이용해 왔기 때문에 2007년부터 이미 피처폰으로 브라우저 기반의 모바일 소셜 게임을 서비스해 왔다. 이 분야의 선두주자는 GREE와 DeNA의 2개 회사로, 2013년 1월 기준 시가총액이 각각 3299억엔, 4,735 억엔이고 2012년 3분기 매출이 각각 379억엔, 503억엔이다. (참고로 넥슨의 2013년 1월 시가총액은 3898억엔, 2012년 3분기 매출은 242억엔) 이 정도 규모로 커지려면 지금의 밀리언아서 정도 인지도로는 불가능하다. 실제로 일본에서 인기있는 카드배틀 게임을 즐기는 층은 짬나는 시간을 이용하는 일반인으로, 흡사 한국에서 게임을 전혀 안하던 층이 온라인게임에 빠르게 적응한 것과 유사하다.
주목해야 할 것은 우리가 일본 시장을 갈라파고스라고 비웃을 동안 이들이 모바일 소셜이라는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냈고, 탄탄한 내수를 바탕으로 1조원 매출 기업의 반열에 올라서 있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당시 일본의 모바일 단말기는 갈라파고스에 가까웠지만 이제는 스마트폰으로 통합되어 장벽은 무너진 지 오래다. 온라인게임에 있어 2000년대 초반의 한국/일본 상황이 모바일 소셜에 와서 역전된 것이다. 내수시장이 포화에 이르자 이들 기업은 세계로 눈을 돌렸고, 플랫폼 점유율 싸움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 밀리언 아서는 갈라파고스 군도의 작은 섬 하나에 불과하다.
이들이 고속성장을 할 때 페이스북과 징가만 바라보던 한국 개발사들은 뒤늦게 모바일 소셜로 방향 전환을 하는 중이다. 애니팡과 드래곤 플라이트가 하루에 몇십억을 벌었다는 이야기가 작년 가을부터 게임계의 화두가 되어 왔지만, 이제 막 붐이 일어난 정도이다. 드래곤 플라이트는 그래도 참신한 오리지널 게임으로 쳐준다고 해도 애니팡이나 다함께 차차차로 세계 시장에 도전할 수 있을까? 이렇게 카피캣 게임들이 히트하는 흐름만 계속된다면 갈라파고스라는 오명이 자칫 한국으로 넘겨올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할 시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