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백악관에 무지개가 떴다
2015년 6월은 성소수자들에게 영원히 남을 역사적인 순간이 될 것 같다.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은 6월을 성소수자의 달로 선포했으며, 이에 호응이라도 하듯 6월 26일 미 연방대법원은 미국 전역에서 동성결혼을 합법화하는 결정을 내렸다. 페이스북은 이 결정을 축하하며 프로필 사진을 무지개(성소수자의 상징)로 교체하는 툴을 제공했다.
그러나 먼 태평양을 건너, 한국에서 성소수자 인권 문제는 여전히 평행선 위에 있다. 6월 서울에서 열린 퀴어 퍼레이드는 이에 반대하는 단체들의 반대 시위로 얼룩졌고, 대구에서 열린 퀴어 퍼레이드에서는 인분을 투척하는 테러가 발생하기도 했다.
성소수자 인권 보장에 반대하는 주축은 기독교, 개중에서도 개신교계다. 개신교계는 동성애가 신의 창조질서에 어긋나며 성경에 죄악으로 규정되어 있다는 이유로 그들의 인권 보장에 반대 목소리를 낸다.
인간성조차 상실한 개신교계의 반대 구호
개신교계의 구호는 점점 다양해지고 있다. 차별금지법이 동성애를 죄악이라 말할 자유를 빼앗는다며, 소수의 의견에 의해 다수의 인권이 박탈당한다고 말한다. 동성애자들은 항문섹스 등 더러운 성행위를 일삼는다고 말한다. 성적으로 문란하고 방종하다고 말한다. 최근에는 심지어, 동성애자들이 에이즈에 걸리면 그 치료비를 모두 국가가 지원하는만큼 세금폭탄을 맞게 될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 구호는 그 자체로 폭력이다. 동성애자들을 혐오스러운 죄인으로 규정하고 몰아내야 할 불가촉천민으로 포장한다. 심지어 최근 나오기 시작한 에이즈 세금폭탄론은 기가 찰 지경이다. 기독교계의 주장대로라면, 건강보험 재정 절약을 위해 고려장을 도입해야 할 것이다. 노인층만큼 거의 모든 질병에 취약한 계층이 또 없으니까 말이다. 질병으로 고통받는 환자들을 세금이나 축낸다고 힐난하는 개신교인들은, 종교인이기 전에 과연 인간이기나 한 것인가.
바비를 위한 기도
‘바비를 위한 기도(Prayers for Bobby)’라는 영화가 있다. 여전사 시고니 위버가 독실한 기독교 집안의 어머니 역할로 출연하는 TV 영화로,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 태어난 한 동성애자 소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온 가족이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그리피스 가(家)의 차남 바비 그리피스는 자신이 여자가 아니라 남자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깨닫게 되고, 정체성에 큰 혼란을 느낀다. 결국 자살까지 시도하지만, 자살 또한 기독교의 죄라는 점 때문에 이를 포기한다.
그는 자신의 혼란스런 심정을 형에게 털어놓지만, 이 커밍아웃은 곧 가족 전체에게 알려지고 만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바비의 어머니는 모든 게 괜찮아 질 것이라고 바비를 안심시키고, 동성애를 치료하는 법에 대해 여러 책과 정신과 의사를 찾아 공부한다. 그리고 실제로도 바비를 치료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한다.
그러나 어머니의 모든 시도는 아무 효과도 없었고, 괴로워하던 바비는 어머니와 떨어져 생활하게 되며 비로소 편안함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그 후로도 바비는 자신을 죄인으로 여기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채 다 지워버리지 못했고,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알기 전 행복했던 가족을 생각하며 죄책감으로 혼란스러워하다 끝내 육교의 난간 위에 올라선다.
난간에 올라선 바비가 어떻게 되는지, 그가 가족과, 자기 자신과, 그리고 신과 화해할 수 있었는지 하는 얘기에 대해서는 여기에서 다 글로 풀 필요가 없을 것 같다. 다만 한 가지만 첨언하자면, 이 이야기는 실화를 각색한 것이다.
치료라는 미명의 살인
동성애 혐오 발언으로 인해 동성애자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일은 비단 영화 속 바비 그리피스에게만 일어난 일이 아니다. 당장 한국에서도 한기총의 동성애자 혐오 발언에 괴로워하던, 육우당이라는 필명의 동성애자가 자살하는 일이 있었다.
개신교계는 동성애 치료, 탈동성애가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탈동성애자야말로 진짜 소수자이며 동성애자들이 탈동성애자들의 인권을 박탈한다는 기이한 주장도 나온다.
하지만 바비와 육우당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 이는 가능하지도 않을 뿐더러 위험하기까지 하다. 영국 왕립 정신의학회는 동성애를 이성애 또는 양성애로 전환하려는 시도가 가능하다는 증거가 전혀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우울증, 자살 등 정신적으로 심각한 상해를 끼치게 됨을 공식적으로 밝히고 있다.
동성애 치료 효과를 지지하는 논문이 없는 것은 아니나 절대적인 수가 매우 적은데다(영국 왕립 정신의학회는 공식 입장에서 2개의 알려진 논문을 소개했다) 연구 방법 등에 문제가 있어 학회로부터 지지받지 못하고 있다. 실제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었던 로버트 L. 스피처의 2003년 논문은 십 년 후 저자 자신이 답변의 신뢰도에 문제가 있었다며 사과하기도 했다.
이는 영국 왕립 정신의학회만의 입장이 아니다. 미국 정신의학회와 심리학회 등 저명한 유관 단체도 같은 입장이며, 적어도 선진국의 주요 학회 중 동성애 치료가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단체는 없다. 진짜 없다.
말은 강력한 것이다. 직접적인 혐오 범죄나 물리적 폭력이 없더라도, 동성애를 잘못된 것이라 주장하거나 이를 치료하려는 모든 시도가 동성애자들에게는 심각한 폭력이다. 그들의 목소리는 실제로 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다. 다만 치료라는 미명으로 자신들의 폭력과 살인을 감추고 있을 뿐이다.
날 교회로 데려다 주오
세계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음악상 그래미. 지난 그래미는 영국 출신의 싱어송라이터 샘 스미스의 독무대였다. 그는 올해의 레코드, 올해의 노래, 올해의 신인 등 굵직한 상을 그야말로 싹쓸이했다. 그는 공개적으로 성적 지향을 밝힌 동성애자인데, 아마 한국에서였다면 어떤 개신교 단체에서 나서 57년 동안 지켜온 상의 권위와 신성성을 무너뜨린다며 항의 시위를 했을런지도 모르겠다.
한편 ‘올해의 노래’ 부문 후보에는 이런 노래도 있었다. ‘Take Me to Church(날 교회로 데려다 주오)’. 후렴구에 무겁게 읊조리는 ‘아멘, 아멘, 아멘’ 소리가 인상적인 이 노래는, 아일랜드 출신의 25세 신인 싱어송라이터 호지어(Hozier)의 노래다. 동성애자들에 의해 가정이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지고 그래미가 무너지는 가운데, 아마 또 어떤 개신교 단체는 신앙심이 돈독한 친구가 나왔다며 지지 운동을 벌였을지도 모르겠다.
이건 그런 노래가 아니지만 말이다.
아멘, 아멘, 아멘
날 교회로 데려가줘
당신의 거짓된 성전 앞에 개처럼 예배드릴 테니
내 죄를 고백할게, 당신이 칼을 갈 수 있도록
내게 불사(不死)의 죽음을 줘
선한 신이여, 당신에게 내 삶을 바치게 해 줘
이 노래에서 말하는 ‘교회’란 우리가 익히 아는, 십자가를 높이 세우고 이것이야말로 절대적인 진리라며 성경의 가르침을 설파하는 그 교회가 아니다. 노래는 오히려 세상의 교회가 매주 새로운 독을 만들듯이 매 일요일을 음울하게 만들어간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갈 천국은 오직 연인과 함께 있는 순간 뿐이라며 세상의 교회 대신 나만의 교회, 곧 자신의 연인을 침대 위에서 예배하겠다고 노래한다.
교회가 아니라 연인과 함께 침대 위에서 예배(?)하는 것이 더 좋다는 것만으로도 개신교 입장에서는 신성모독이라 하기에 넘치고도 남을 것이다. 아마 뮤직비디오를 본다면 까무러칠지도 모르겠다. 뮤직비디오는 한 게이 연인이 혐오 범죄로 희생되는 내용을 그리고 있다.
교회는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으면서도 그럴듯한 미명과 거짓된 논리로 자신들의 행동을 합리화시킨다. 이 교회가 정말 성스러운 전당이라 할 수 있을까? 오직 상대에 대한 애정과 갈구만으로 가득한 침대 위야말로 교회라 불리기에 마땅한 곳이 아닐까? 호지어의 노래는 교회라는 공간의 의의에 대해 지극히 합당한 의문을 던지고 있다.
“나아질 거야”
동성애 치료와 탈동성애를 부르짖는 개신교계의 목소리와 비교할 만한 운동이 하나 있다. 4년여 전 인터넷을 물들였던 “나아질 거야(It gets better)”라는 운동이다.
성인 성소수자도 개신교계를 비롯한 일부 세력의 폭력적인 목소리로 괴로움을 겪고 있지만, 청소년들만큼 심각하진 않을 것이다. 청소년 성소수자의 약 3~40%가 실제 자살을 시도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이성애자의 경우보다 3~4배 가까이 높은 것이다. 이런 높은 자살 시도율은 성소수자에 대한 집단 괴롭힘과 따돌림, 그리고 그들을 죄인으로 규정하는 (주로 개신교계의) 사회적 분위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나아질 거야(It gets better)” 운동은 청소년 성소수자들을 격려하기 위해 시작되었다. 힘들겠지만, 곧 나아질 것이라고. 행복한 삶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말해주는 것이다. 유명 연예인들, 애플이나 구글 등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기업의 직원들, 그리고 무명씨에 이르기까지 – 청소년기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고통받던 사람들이, 혹 그 고통을 간접적으로나마 목격했던 사람들이, 그토록 고통스러웠지만 나아졌다고, 지금 자신의 삶이 얼마나 행복한지에 대해 직접 이야기했다.
호지어는 이렇게 얘기한다. “이 노래는 사랑의 행위를 통해 자신의 정체를 확실히 하고 인간성을 회복하는 과정에 대한 노래죠. 보이지 않는 것으로부터 등을 돌려, 세상에 실재하는, 나와 함께 할 수 있는 그 무엇인가를 경배하고 사랑하자는 거예요.”
그의 말에 모두가 찬성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교회가 사랑과 경의 대신 혐오와 저주를 가르치는 한, 그의 말이 가진 무게를 또한 함부로 무시할 수도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