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와 중세까지는 공개적으로 모욕을 주는 것이 형벌의 한 형태였다. 이러한 문화는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혼재했으며, 이제는 인터넷 조리돌림으로까지 발전했다. 이런 문제를 다룬 영화 7편을 선정했다.
1. 여성을 공격하며 공동체를 유지하는 집단 광기: 크루서블
아서 밀러의 연극, <세일럼의 마녀>는 매카시즘(빨갱이 때려잡기)의 공포를 마녀사냥이라는 소재로 잘 드러낸 작품이다. 원작을 영화로 각색한 <크루서블>을 보면 집단의 정치적 광기와 조리돌림의 공포가 잘 드러난다. 사회의 약자였던 여성을 공격하며 사회에 공포를 불어넣고 희생양을 만들어내 공동체의 억압된 질서를 유지한다.
2. 좁은 공간에의 격리: 공포의 계단
좀비는 살아 있으면서도 죽어 있는 존재다. 공동체의 벌을 받은 인간을 살아있는 시체, 곧 좀비 취급하는 현상도 발견하게 된다. 웨스 크레이븐의 <공포의 계단>에서는 양부모의 말을 어긴 아이들이 불구가 되어 계단 아래 암흑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3. 더욱 발전한 괴롭힘의 형태, 왕따: 라이프
SNS가 일상화된 지금은 단체 카톡방과 트위터 같은 공간을 통해서 상시적으로 괴롭힘이 이루어진다. 소위 사이버 불링(cyber bullying)이다. 사진이나 영상을 주고받기 쉬워진 까닭에 희생자의 두려움과 공포는 더욱 가중된다.
학교의 왕따와 이지메는 교사의 권력이 무너지면서 시작된다. 또래 집단에서 질서와 계급이 필요하고 희생양이 요구된다. 스에노부 케이코의 만화 <라이프>는 극단적인 왕따 문제를 공포스럽게 그렸고, 드라마로도 리메이크 되었다. 그러나 현실은 가공된 이야기보다 상상을 뛰어 넘어, 작가는 만화에서 묘사된 것보다 더한 이지메 사례를 팬레터로 받았다고 한다.
4. SNS는 그저 정의로운가: 아메리칸 셰프
<아메리칸 셰프>에서는 트위터로 음식평론가와 설전을 벌이다가 해고된 요리사가 나온다. 살다 보면 불만은 있을 수 있고, 누군가에게 이야기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이 공적인 공간으로 비화되면 문제가 생긴다.
인터넷에는 정의의 기사 혹은 마녀 심판관이 존재한다. 자신의 기준과 판단으로 보기에 부적절하면 바로 사람들에게 알리고 조리돌림에 동참하기를 권한다. 그러면 심판관의 주변에 달라붙은 이들이 리트윗을 하고, 게시판에 올리면서 순식간에 사회의 공적이 된다. 누구나 잘못된 판단을 하고, 말실수를 할 수는 있지만 그것만으로 조리돌림을 하는 것은 과연 합당한 일일까.
5.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언론과 SNS: 백설공주 살인사건
21세기 이후 인터넷이라는, 가상이지만 현실을 압도하는 공간이 생기면서 문제는 더욱 복잡해졌다. 공개적인 모욕주기만이 아니라 댓글로 다투다가 직접 만나 싸움을 벌이는 ‘현피’가 빈번히 일어나고 사이버 스토킹, 엉뚱한 사람의 신상 털기, 허위 기부금 모집 등등의 문제가 빈번하게 벌어진다.
<백설공주 살인사건>에서는 한 여성의 살인사건을 둘러싼 SNS의 반응을 실시간으로 보여주고,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이 SNS에 개입하며 여론의 흐름이 뒤바뀌는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과정 속에서 사람들이 아무런 책임감 없이 SNS에서 떠드는 것이 어떤 무서운 결과를 낳는지 잘 보여주는 영화다.
6. 지금 한국의 적나라한 현실: 소셜포비아
한국영화 <소셜포비아>는 SNS를 통해 벌어지는 경악스러운 한국의 현실을 잘 그려낸 영화다. 군인의 자살에 악플을 남겼다가 논란이 되고, 결국 현피가 벌어지는 상황에 사람들이 우루루 몰려가고, 악플러의 시체가 발견되면서 상황은 점점 벼랑으로 몰려간다.
이렇게 극단적인 상황이 실화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올림픽 경기 결승에서 아쉽게 진 선수의 미니 홈페이지에 한 여성이 악플을 달자, 네티즌들이 신상을 터는 것은 물론 그 여성 집 근처 PC방을 찾아가서 모여있으면서 위협하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더 놀라운 것은 이가 ‘실화’에서 아이디어를 따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현피 멤버들에 의해 진행되는 수사과정은 온라인 속 음모론의 생성과정과 쏙 빼닮아있다. 하나의 증거가 나오면 앞뒤 없이 달려들어 타겟을 재단하고 심판대에 올린다. 그들은 법적체계로 이루어지는 전통적인 수사방식을 뒤로한 채 SNS를 통해, SNS에서, SNS으로 범인을 쫓는다. 그들의 방식으로 산출된 범인은 수없이 바뀌며 제2의 마녀사냥 피해자를 양산해낸다. (뉴스컬처)
SNS 중독자인 용민과 SNS에 흥미를 가지게 된 지웅은 SNS를 통해 가해자가 되기도 하고 피해자가 되기도 한다. SNS에 올려 진 하나의 정보에 대해 다양한 사람들의 수많은 의견이 올라온다. 그리고 서로 의견이 다르면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 비판의 대상자가 나만 아니면 돼라는 생각으로 스스럼없이 거친 말들을 쏟아낸다. (디씨뉴스)
SNS를 하는 사람이라면 영화를 다 보고 난 뒤 개운치 못한 기분이 들면서 자신을 돌이켜보게 될 것이다.
7. 마녀사냥의 대표작: 주홍글씨
마지막은 고전으로. 나다니엘 호손의 소설 <주홍글씨>에서는 간통을 저지른 사람의 옷에 알파벳을 새겨 사람들이 알아보게 하는 벌이 나온다. 소설의 제목인 ‘주홍글씨’는 사회적 낙인의 대명사로 자리잡았다. 명작은 세월을 건너 뛰고 다시 태어나는 법. 롤랑 조페 감독 데미 무어 출연의 1995년작 영화로 리메이킹 된다.
끝없이 이어지는 야만의 문화
이마에 문신을 하거나 낙인을 찍어 누구나 그가 지은 죄를 알아보게 하는 처벌은 동서양을 그리지 않고 존재했다. 야만적 풍습은 시대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단지 육체적 낙인을 찍느냐, 사회적 낙인을 찍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마지막으로 한겨레의 기사를 인용한다.
근대 사법 체계가 등장하면서 공개적인 망신주기 형벌은 점차 사라졌습니다. 치욕을 주는 것은 보편적으로 죽음보다 더한 형벌”(벤자민 러시, 1787)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졌기 때문입니다.
<더 타임스>는 1867년 기사에서 영국 일부 지방에 남아있는 태형 제도를 비난하며 “뉴캐슬에서 절도로 태형을 맞은 18살 소년은 십중팔구 낙오된다. 스스로 존중하는 마음이 파괴되고, 공개적으로 망신당하면서 경멸이 낙인찍히면, 스스로를 잃고 동료들에게 버림받은 느낌을 갖게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일말의 교화 가능성마저 망가뜨린다는 것이지요.
현실에, 현실보다 더욱 현실적인 가상의 현실이 겹치면서 모든 것이 극도로 혼란스럽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과연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