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핑커의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에는 “내 평생 읽은 책 중에서 가장 중요한 책이다.”라는 빌 게이츠의 추천사가 실려 있다. 게이츠는 작년에 ‘레딧 Reddit’에서 “제일 좋아하는 책이 뭔가요?”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도 “지난 십 년 동안 읽은 책 중에서 제일 좋아하는 건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라고 대답하면서, 자신이 블로그에 쓴 서평도 추천했다.
그런데 빌 게이츠가 이 책을 좋아한다는 건 그냥 하는 말이 아닌 모양. 게이츠의 개인 블로그에는 그가 스티븐 핑커를 초대하여 대화를 나누고는 그 모습을 다섯 편의 짧은 동영상으로 찍어 올린 포스팅이 있다. 세상에나 이것은 궁극의 덕질이 아닌가. ㅋㅋㅋ 덕질도 빌 게이츠가 하면 스케일이 달라… 좋게 읽은 책의 저자를 초대해서 묻고 싶은 걸 막 묻고 있음… (홍보용으로 기획된 게 아닌가도 의심했지만 아닌 모양. 블로그 포스팅의 태그도 ‘personal’. ㅎㅎㅎ)
유튜브에도 있는 다섯 편의 동영상을 대충 번역해 보았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내용이 책의 재미난 대목을 제법 잘 짚고 있기 때문. (갸웃한 부분이 있어도 저의 히어링 실력이 그 정도이겠거니 하고 넘어가 주세요. 쓸데없는 부분은 압축도 좀 했는데 내용은 달라질 게 없습니다.) 특히 게이츠는 1960년대 미국의 폭력률 역전 현상이 상당히 놀라웠던 듯, 그 이야기를 길게 한다. 우리에게는 그것보다는 다른 질문들이 더 흥미롭지만. 게이츠가 쓴 리뷰도 시간 나면 번역해 볼 생각.
1. 세상의 폭력성은 갈수록 늘었는가, 줄었는가?
스티븐 핑커: 두 가지 요인이 함께 작용했습니다. 하나는 인간 본성에 대해서 줄곧 관심이 있었다는 점이죠. 인간 본성에 대해서 흥미가 있다면, 폭력을 다루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래된 의문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선천적으로 폭력적인가?’ ‘인간은 선천적으로 평화롭고 협동적인가?’ ‘이 사실이 우리가 사회를 조직하는 데 어떤 의미를 줄까?’ ‘우리는 타고난 악한 본성이 있어서 그것을 길들여야 하는가?’ 아니면 ‘사람들이 알아서 살아가도록 내버려 두면 자연스럽게 공동의 조화가 발생하는가?’ 이런 의문들은 지적인 과제이죠.
또한 저는 역사가 진행되는 동안 폭력이 모든 측면에서 계속 곤두박질쳤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놀라운 통계를 자꾸만 접했습니다. 제가 처음 엄청나게 충격을 받았던 그래프는 중세 이후 유럽의 살인율을 보여주는 그래프였는데요, 그래프 모양이 이랬습니다. 현대의 영국인은 중세 선조에 비해 살해 당할 가능성이 50분의 1밖에 안 됩니다. 우리는 중세를 근심 없고, 순수하고, 오월제 기둥을 돌면서 춤이나 추고 그랬던 시절로 생각하곤 하죠. 사실은 사람들이 하찮은 모욕에도 식탁에서 서로 칼로 찌르곤 했다는 걸 잘 모릅니다. 저는 또 부족 사회에서 벌어졌던 전쟁의 사망률이 현대 전쟁의 사망률보다 훨씬 더 높다는 통계를 접했습니다.
그래서 제 블로그에서나 사적인 자리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는데, 그랬더니 이전에는 알지도 못했던 각종 분야의 학자들이 제게 편지를 보내서 여러 종류의 폭력이 감소했음을 보여 주는 데이터를 더 제공해 주지 뭡니까. 1953년에 한국 전쟁이 끝난 뒤로 지금까지 강대국 사이의 전쟁이 한 건도 없었다는 사실이라든가 말이죠. 반 세기 동안 강대국 전쟁이 없었다는 건 인류 역사에서 유례가 없는 일입니다. 아동 학대 발생률도 줄고 있죠. 가정 폭력 발생률도 줄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학술 문헌에 파묻힌 이런 사실들을 더 많은 독자에게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이 사실이 인간 본성에 대해서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하는 점도 이해하고 싶었습니다.
게이츠: 그런데 이런 주제가 지금까지 주류에서 논의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제게는 놀랍게 느껴졌습니다. 인간이 다른 인간을 대우하는 방식이 진보했다는 사실만큼 역사학에서, 나아가 심리학에서 더 흥미로운 문제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저는 이 책에서 그런 트렌드를 보여 주는 숫자들을 접하고 엄청나게 충격을 받았고, 이전까지 그런 이야기를 전혀 들어 보지 못했다는 점에도 충격을 받았습니다.
핑커: 그렇죠. 어떻게 보면 우리가 무수한 세월 동안 해 온 일이 우리를 더 좋게 만들었는가 더 나쁘게 만들었는가 하는 궤적을 추적하는 것만큼 중요한 문제가 또 없죠.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동안 우리가 더 나빠졌다고 생각합니다. 인류가 자연적인 상태였을 때 더 나았다는 거죠. 하지만 이게 정말 중요한 메시지인데, 사실 우리는 뭔가를 잘해 왔습니다. 우리는 이제 사람들을 십자가에 매달지 않죠. 정부의 법적 보호를 받으면서 노예를 부리지도 않습니다. 왕들이 개인적인 모욕이나 운명 때문에 전쟁을 일으키거나 자신의 허영을 달래기 위해서 수천 명의 농민을 희생하지도 않습니다. 채무자 감옥도 사라졌고, 명예를 중시하는 남자들이 평판을 지키고자 결투를 벌이지도 않습니다. 물론 요즘도 끔찍한 일들이 존재하고, 우리가 걱정해야 마땅한 사건들이 분명히 있지만, 그래도 아마 과거가 더 나빴을 겁니다.
저는 또한 그래프와 숫자로 들려 드린 이야기에 더해서 일종의 정상성 점검을 해 보고 싶었습니다. ‘살인율이 50분의 1로 떨어졌다는 사실이 정말일까?’ 같은 의문을 확인해 보고 싶었죠. 그래서 옛날 사람들이 살았던 삶에서 몇몇 삽화들을 가져다가 소개했습니다. 성서 시대나 로마 시대나 중세는 정말로 잔혹한 시절이었다는 사실을 독자들에게 상기시키고 싶었기 때문이죠. 그때 사람들은 바퀴에서 죄수의 몸을 찢었고, 화형을 시켰고, 십자가에 매달았고, 온 마을을 학살하곤 했습니다.
게이츠: 역사가 발전을 향해서 나아갈 잠재력이 있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타락했어, 세상은 늘 더 나빠지는 거야’라고 생각할 때와는 마음 자세가 아주 달라집니다. 저는 세계 보건 문제에 관련된 일을 하는데요, 항상 사람들에게 그동안 믿기 힘든 발전이 이뤄졌다는 사실부터 눈앞에 보여 줘야 한답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처음에는 엄청 놀랍니다.
1960년에는 매년 2천만 명의 아이들이 죽어 갔는데, 지금은 그 수가 800만 명으로 줄었습니다. 우리가 옳은 일을 더 한다면 800만 명이 400만 명으로 더 줄 수도 있겠죠. 이런 진보가 실제로 있었고, 우리는 거기에 동참할 수 있는 겁니다. 그리고 이 사실은 세상을 좀 더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만들죠. 특히 요즘처럼 경제적 상황이나 정부의 개입에 대해서 이런저런 말들이 많은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저는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이런 장기적 트렌드를 이해했으면 좋겠습니다.
핑커: 저도 그런 생각에 깊이 공감합니다. 그런데 그런 시각은 놀랍도록 드물죠. 우선 사람들은 세상이 더 나아졌다는 사실을 잘 깨닫지 못하는데, 왜냐하면 뉴스에서 늘 끔찍한 사건을 접하는 데다가 그런 사건은 저녁 뉴스를 채울 만큼은 늘 충분히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역사적 숫자를 실제로 보지 않으면 알 수 없습니다. 설령 현재의 상황이 나쁘더라도 과거에는 더 나빴고 그동안 실제로 변화가 있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우리의 노력이 정말로 변화를 이뤄 낼 수 있다는 걸 숫자가 보여 주는데 말입니다.
사람들은 잘 깨닫지 못하지만 요즘 사람들은 예전보다 더 오래 살고, 유아기에 사망할 가능성이 더 낮고, 출산 중에 죽을 가능성도 더 낮고, 교육을 받을 가능성이 더 높죠. 이런 숫자를 아는 것만으로도 도덕적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비록 문제를 근절하진 못했을지라도, 폭력이나 질병이나 굶주림으로 죽는 사람이 조금이라도 줄었다면 그것만으로도 많이 달라진 거죠. 우리는 그 숫자들을 조금씩 더 깎아 냄으로써 인류의 번영과 행복의 양을 늘릴 수 있습니다.
기자들은 이런 식으로 보지 않는 경향이 있죠. 그들은 문제를 지목합니다. 제가 볼 땐 그래서 연민의 피로감이 퍼지고 있어요. ‘내가 무슨 도움이 될까? 세상엔 고통이 너무 많아.’ 하고 포기하는 거죠. 하지만 우리는 숫자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러면 아직도 세상에서 좋은 일을 많이 할 수 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습니다.
2. 제 2차 세계대전은 최악의 전쟁이었는가?
핑커: 맞습니다. 물론 이차 대전은 절대적인 사망자 수로 본다면 인류 역사상 최악의 사건이었죠. 하지만 전체 인구 대비 사망자 비율로 본다면 과연 그런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계산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전 세대에도 이 비율에 맞먹는 잔혹한 사건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유럽의 종교 전쟁, 몽골의 침략, 하물며 부족 사회의 전쟁도 이차 대전에서 죽었던 사망자 비율보다 훨씬 더 많은 퍼센트의 인구를 죽였습니다.
이차 대전이 극단적인 사례라는 사실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이차 대전이 끔찍하긴 했어도 그게 많은 사람이 예측했던 것처럼 모종의 트렌드를 대변하는 사건은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예전에 사람들은 일차 대전에서는 1500만 명이 죽었고 이차 대전에서는 5000만 명이 죽었으니까 트렌드가 보인다고 생각했었죠. 그리고 핵무기도 있으니까, 미국과 소련 사이에 삼차 대전이 벌어져서 이차 대전보다 더 대대적인 살육이 벌어질 것이란 예측이 설득력이 있었고, 아예 기정 사실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죠. 앞으로도 벌어지지 않을 거고요. 이런 좋은 소식을 사람들은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차 대전은 어떤 의미로 두 가지 장기적 트렌드의 정점이었습니다. 지난 500년 동안 강대국들이 충돌했던 과정에서, 전쟁의 발발 빈도는 갈수록 줄었습니다. 매년 새로 발생하는 전쟁의 수가 갈수록 줄었죠. 그러나 안타깝게도, 한 전쟁이 일으키는 피해의 규모는 갈수록 커졌습니다. 무기와 군사 조직이 증가했기 때문입니다. 두 트렌드는 서로 반대 방향으로 진행했죠. 이차 대전은 비교적 짧았고 상당히 오랫동안 평화가 이어진 뒤에 터진 사건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어마어마하게 파괴적이었습니다. 이차 대전 이후에는 어떻게 됐느냐 하면, 일단 전쟁이 터졌을 때 매년 각국에서 얼마나 죽는가 하는 전쟁의 파괴력이 오히려 유턴을 했습니다.
그래서 지난 60여 년 동안 우리는 전쟁의 수가 줄어들고 동시에 전쟁이 일으키는 연간 파괴력도 줄어드는 시대를 살아 왔습니다. 이차 대전 이후에 그런 대대적인 변화가 있었던 겁니다.
3. 1960년대의 사회 혁명으로 사람들의 폭력성이 더 늘었는가?
핑커: 맞습니다. 1960년대에 폭력률이 나쁜 방향으로 유턴을 그렸다는 사실도 사람들이 잘 인식하지 못하는 사실입니다. 폭력률은 과거 수백 년 동안 죽 감소하다가 1960년대에 도로 올라갔죠. 중세 수준으로 치솟은 건 아니고 아주 약간 올라간 것뿐입니다만, 그 상태로 60년대, 70년대, 80년대까지 유지되었죠. 그러다가 90년대에 되어서야 다시 낮아졌고요. 솔직히 말하면 왜 60년대에 폭력률이 올라갔고 90년대에 도로 내려왔는지 그 이유를 정확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들 90년대 감소가 자기 덕분이라고 주장합니다만, 그야 어쨌든 그게 분명한 트렌드였던 것은 확실합니다. 우리는 몸소 그 시절을 겪었죠. 뉴욕 사람들은 집 안에 틀어박혀서 지냈고, 센트럴 파크로 나간다는 건 꿈도 안 꿨고, 도시의 타락상을 다룬 영화며 TV 쇼도 많았죠. 정치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보수 정치인들은 범죄에 대한 강경 대응을 선언했는데, 그건 정말로 현실적인 트렌드에 반응한 처사였습니다. 살인율이 실제로 올라갔으니까요.
그리고 저 또한 베이비붐 세대로서 인정하긴 괴롭지만, 그런 혼란상을 부추긴 것이 바로 우리 베이비붐 세대였습니다. 단순히 우리 세대가 인구가 많았기 때문은 아닙니다. 1946년에 베이비붐이 시작되었고 원래 젊은이는 범죄를 더 많이 저지르는 법이니까 베이비붐 세대가 범죄에 취약한 나이가 되면, 그러니까 15세에서 30세 사이의 연령이 되면 그 때문에 범죄율이 올라가겠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죠. 그런데 그걸로는 15퍼센트 증가는 설명할 수 있겠지만, 실제로는 그게 아니라 150퍼센트나 증가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단순히 청소년과 청년이 많아져서 생긴 현상은 아니었단 겁니다. 그리고 아까 언급하셨듯이 경제는 좋았고, 불평등도 적었고, 사회 프로그램도 많았고, 그랬단 말이죠. 그러니까 참 수수께끼입니다.
그래서 저는 문화적 설명에 일말의 진실이 있다고 봅니다. 당시의 문화가 권위에 반항했던 탓이란 거죠. 당시에는 공동체에 적응한다거나, 결혼해서 가정을 부양한다거나 하는 자기 절제의 모든 미덕들이 밀려나고 그 대신 자기 표현, 권위에 대한 반항, 직업이나 가족 공동체에 얽매이지 않는 삶이 전면에 부상했습니다. 그 결과 젊은이들이 떼 지어 어슬렁거리게 되었고, 그건 말썽으로 이어집니다. 이런 문화적 변화들은 정확히 측량하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성숙함보다 젊음을 찬양하고, 냉정함보다 광란성을 찬양하고, 그런 분위기가 모두 폭력률을 높였던 건 사실입니다.
게이츠: 저는 당신과는 달리 55년에 태어났기 때문에, 약간 늦은 셈이었죠. 고등학교 때 사람들이 도로를 봉쇄하고 코뮨을 만들고 그러기에, 저는 와, 정말로 재미있겠구나 했는데요, 대학에 갔더니 이제 사람들이 본부 건물을 점거하고 그러지 않더라고요. 재미있는 일이 다 끝났달까, 베트남 전쟁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고요. 그런데 이 책에서 당신은 더 큰 그림을 보여주었습니다. 젊은 세대에게 강요되었다고도 할 수 있는 그 가치들이 그들에게 어떤 효용이 있었다기보다는 그들이 같은 세대로서 유대감을 맺는 데 도움이 되었다는 거죠. TV도 있었고, 징병도 있었고, 그런 다양한 것들 때문에 그들은 스스로를 일종의 이해 집단처럼 여기게 되었고, 자신들이 부모 세대의 가치 중에서 공허한 것들을 일부 거부하고 있다는 걸 스스로 깨우쳤고, 심지어는 행동 면에서도 거부하는 태도를 보였고, 그래서 상황이 좀 지나치게 나아간 면도 있었는데, 그러다가 결국에는 그들도 가령 옷 입는 방식 같은 건 이제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게 되었지만, 인권에 대해서나 사람들이 서로를 대하는 태도에 대해서나 그런 면에서는 다행스럽게도 장기적 트렌드로 복귀했다는 거죠.
핑커: 그렇습니다. 그게 바로 1960년대와 베이비붐 세대의 역설이지요. 한편으로는 진보적인 조치들이 취해져서 몇몇 종류의 폭력이 줄었고, 반전 정서가 주류 정치 운동이 되었죠. 이전에는 오직 몽상가나 채식주의자나 누드주의자나 히피만 신경 쓰는 일이었는데, 이제 그들이 주류가 된 거죠. 그래서 여성에 대한 폭력, 동성애자에 대한 폭력, 아이에 대한 폭력, 소수 인종에 대한 폭력을 타파하게 되었죠. 그런 건 분명 1960년대의 유산이었고, 진보적이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개인 대 개인의 폭력은 오히려 늘었습니다. 사람들이 사회, 직장, 가족, 공동체 등등의 구속을 덜 느꼈기 때문이죠. 그 외생적 요인이 무엇이었는지는 당신이 잘 짚었다고 봅니다. 당시는 역사상 처음으로 한 세대가 일종의 응집력 있는 단체처럼 결속된 시절이었습니다. 역사를 되짚어서 정확히 어떤 특정한 시점에 특정한 세대의 아이들이 자라서 상황을 바꾸게 되었는지 꼬집어 말하기는 어렵겠지만요.
저는 그게 여러 요인의 복합적인 결과였다고 봅니다. 베이비붐 세대의 인구 구성상 젊은 인구가 많았던 데다가, 그들은 텔레비전이나 트랜지스터 라디오 같은 신기술 덕분에 십대와 십대 사이의 수평적 연결을 맺을 수 있었죠. 그 관계는 십대와 성인 사이의 관계라는 기존의 관계를 끊어 놓았죠. 그래서 그 세대는 자신들이 결속된 덩어리라고 여겼고, 나이 든 세대들이 가하는 제약에서 탈피할 힘이 있다고 느꼈죠. 실제로 젊은 세대는 언제든 사회화를 겪어야 하는 법이고, 청년들은 늘 소동을 일으키길 좋아하는 법이고, 냉정한 나이 든 세대들이 그들을 생산적인 시민으로 바꿔야 하는 법입니다.
그러니 대규모 청년 인구가 나이 든 세대들의 사회화 영향력에서 벗어나서 자신들이 하고 싶은 대로 한다면, 자연히 더 많은 혼돈과 혼란이 오기 마련이고 더 많은 폭력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4. 명예가 나쁜 것이 될 수 있는가?
핑커: 바로 그렇습니다. 인류학자들이 ‘명예의 문화’라고 부르는 문화에서는 개인이 자신의 지위를 영구적으로 잃지 않기 위해서는 하찮은 모욕에도 반드시 폭력으로 보복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런 문화는 폭력적입니다. 전통적인 미국 남부 문화는 바로 그런 명예의 문화였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자신의 평판을 굳세게 지켜야 한다는 분위기 말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미국 남부의 살인율이나 그 밖의 폭력적 소동 발생률은 북부 주들보다 훨씬 더 높습니다.
저는 토머스 홉스의 말이 옳다고 봅니다. 그는 리바이어선, 즉 폭력을 독점하는 정부라는 제삼자의 존재가 아마도 인류가 발명한 폭력 감소 기법 중에서 가장 효율적인 기법일 것이라고 말했죠. 정부는 내가 내 이웃에게 공격을 가하면 나를 처벌하겠지만, 한편으로 나는 정부가 내 이웃도 똑같이 처벌할 것이란 사실을 알기 때문에, 이웃이 나를 공격하지 못하도록 억제하기 위해서 호전적인 마초적 태도를 취할 필요가 없습니다. 정부가 대신 해줄 테니까요. 마찬가지로, 설령 내가 공격적인 행위 때문에 처벌을 받더라도, 내게 벌금형이나 투옥을 지시하는 상대가 정부라면 나는 적들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는 건 아니죠. 그래서 공평무사한 제삼자에게서 받은 판결은 받아들이기가 더 쉽습니다.
그 때문에 저는 무정부 상태야말로 세계적으로 가장 걱정스러운 폭력 위험 요인이라고 봅니다.
5. 폭력은 남자들의 일인가?
핑커: 정확히 그렇습니다. 저는 폭력을 줄이는 장기적 트렌드 중 하나로 여성화를 지목했죠. 달리 말해 여성에게 더 많은 힘을 주고 여성의 권리를 더 많이 인식하는 현상입니다. 여성화는 여러 메커니즘으로 영향을 미칩니다. 그중 하나는 단순하게도 폭력이 상당 부분 남자들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진화적으로 완벽하게 이해되는 이유가 있죠. 남자는 번식에 걸린 문제가 더 많기 때문에 서로 경쟁합니다. 전통적으로 어떤 남자들은 여자들을 독점하곤 했고, 그러면 다른 남자들은 짝이 없을 수밖에 없었죠. 그래서 남자들은 말 그대로 여자를 놓고 경쟁합니다. 여자를 납치하는 문제, 결혼 계약 문제, 아니면 여자를 얻게 해주는 지위나 권력이나 경제적 부를 놓고 경쟁합니다. 그래서 남자들은 자신의 명예, 평판, 마초적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 여자보다 더 기꺼이 폭력을 사용합니다.
여자는 결코 폭력적이지 않다는 말은 아닙니다. 폭력에는 여러 동기가 있고, 우세 경쟁은 그중 하나일 뿐이니까요. 만일 여성이 나라를 이끄는 위치에 올라서 전쟁을 좋아하는 다른 나라들 사이에서 자기 나라의 안보를 지켜야 한다면, 틀림없이 그녀는 나라를 지키는 데 필요한 일들을 기꺼이 해낼 겁니다. 그중에는 전쟁도 포함될 겁니다. 하지만 한심한 폭력에 대해서라면, 가령 결투나 도로에서의 경쟁, 주차 공간 때문에 사람을 죽이는 일 따위에 대해서라면, 그런 건 분명 좀 더 남성적인 일입니다. 따라서 여성에게 더 많은 힘이 부여된다면 폭력 자체를 위한 폭력은 덜 발생하겠죠.
그런데 또 다른 메커니즘도 있습니다. 여성이 자신의 생식력을 직접 통제하게 되면, 그러니까 자신이 원하는 사람과 자신이 원하는 때 결혼하고, 피임 기술을 사용하게 되면, 아이를 적게 낳는 경향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남자들은 여자가 아기 공장이 되기를 바라는 편이기 때문에, 여자가 자신의 몸에 대한 통제력을 갖고 있을 때는 아이를 덜 낳는 편이죠. 그렇다는 건 곧 위험스러운 청년 인구 폭발이 발생할 가능성이 낮다는 겁니다. 여러 개발도상국에서는 15~30세 인구가 아주 많은데, 이건 말썽의 소지가 됩니다.
여성이 자신의 생식력을 직접 통제할 때는 그런 현상이 덜 벌어지는 겁니다.
원글 : intîme by starl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