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가 유지될 수 있었던 이유
전세는 전 세계에서 한국에만 존재하는 기형적 시스템이다. 이게 한동안 유지 가능했고, 대세로 자리잡았던 이유는 꾸준히 집값이 물가상승률 이상으로 올라왔기 때문이다.
혹자는 고금리 때문이었다고 하는데 고금리만으로는 전세가 다량 공급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집값 상승 + 고금리가 복합되어야만 전세 공급의 유인이 생긴다.
먼저 금리가 높으면 주택매수자는 높은 대출금리를 부담하느니 전세를 놓아 조달금리를 아끼고, 전세금을 받아 예치해 수익을 거둘 수 있다는 논리가 성립한다.
하지만 아무리 금리가 높아도 여윳돈 많은 사람이 굳이 집을 사 전세를 놓을 이유는 없다. 전세금이 집값보다 싸므로 (굳이 취득비용과 보유세를 부담하며 집을 사지 않고) 그냥 그 돈을 은행에 넣어두면 더 많은 이자를 받기 때문이다. 전세라는 레버리지를 끼고 집을 매수한다는 것은 집값이 상승세이며, 주택매수/보유비용과 포기한 이자수입 이상의 시세차익을 확신하기에 매수하는 것일 뿐이다.
보유세, 양도세를 높이면 전세 공급은 오히려 줄어든다
다주택자에게 보유세,양도세 등을 중과하면 무주택자 입장에서 정신승리는 되겠지만, 전세 공급은 더더욱 줄어든다. 그냥 당신이라면 세금 중과당하면서 주택을 복수로 매입하여 전세놓겠는가? 당연히 월세를 놓아서 그 세금과 금융비용, 기회이자수입을 모두 회수하는 수준 이상을 받으려 할 것이다.
집을 살때는 비용이 많이 든다. 보통 집값의 2~5%가 취등록세(1.1~3.3%, 국민주택규모 초과시 농특세 추가됨),공채할인,중개수수료,등기보수 등으로 한방에 들어가고, 집을 들고 있는 것만으로 매년 보유세(재산세,종부세 등)를 납부한다. 건보지역가입자의 경우 건강보험료도 점프한다.
당신이라면 집값+2~5%+보유세 부담해가면서 전세를 굳이 놓겠는가? 2~5%와 보유세 그리고 집을 안사고 은행에 그돈을 예치했다면 받았을 무위험수익률(이자) 를 합산한 금액 이상의 월세를 받아야 손익이 맞는다.
전세입자는 이런 모든 비용에서 해방된다. 이론적으로 전세금이 매매가까지 오른다고 해도 여전히 세입자는 이득이다. 오히려 집을 보유함으로써 드는 비용을 감안시, 집주인이 호구가 아니고서야 전세금이 매매가까지 올라도 굳이 복수의 주택을 보유하여 전세를 놓을 이유가 없다. 월세를 놓는 쪽이 이익이다.
이론적으로 전세금이 상승, 매매가를 돌파해 집주인의 보유비용과 가격변동위험까지를 커버하지 않는 한 집주인이 전세를 놓을 이유는 더더욱 없다.
하지만 전세금이 매매가에 근접하면 세입자 입장에서는 보증금 미회수위험이 생기니 반전세가 대두된다. 집주인은 보유비용,가격변동위험을 반전세의 적은 월세로나마 커버하고, 세입자는 보증금에 대한 신용위험을 커버할 수 있다.
모든 전세입자가 서민이라는 착각
한국의 전세입자는 단순히 배려대상 계층, 서민으로 한정짓기 힘들다. 전세가가 매매가에 가까워진 지금, 다들 먹고 살만한 보통 사람들이다. 또한 그들은 또 다른 의미의 투자자들에 가깝다. 정확히는 집값 하방에 베팅한, 주식으로 치면 풋옵션을 매수했든지 선물을 매도한 쪽이다.
예컨대 강북의 매매가 4억원, 전세금 3억원(전세가율75%)의 아파트를 상정해보자. 해당 아파트에 전세사는 사람은 3억원을 조달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러면 조금 입지or평형or브랜드가 떨어지는 매매가 3억원짜리 아파트를 매수해서 자가거주하면 된다.
‘전세금 2억짜리는 어쩌라고!’ 라는 반응이 있던데, 강북에는 아직도 2억짜리 아파트들이 널려있고, 1억짜리 다세대도 널려 있다. 집값이 올랐다고는 해도 일부가 집중적으로 많이 올랐지, 전반적으로 크게 올랐다고 보기는 힘들다.
이들이 이렇게 하지 않는 이유는 크게 2가지이다.
- 집값이 오르지 않을 것 같아서. 선대인, 우석훈과 같은 이들이 널리 펼치는 논리인데, 어찌 보면 이들이야말로 투기자에 가깝다. 집을 거주하는 곳이 아닌 시세변동하는 투자대상으로 보기 때문이다.
- 취등록세, 복비, 보유세 부담하며 집을 구입하고 싶지 않으면서, 구매력 이상의 집에 살고 싶기 때문이다.
참고로 반포에는 전세입자가 집주인보다 여유있는 곳도 많다. 15억짜리 반포래미안의 전세금이 11억이다. 이 경우 집주인은 집에서 4억원만의 순자산인데, 세입자는 11억원의 전세금을 조달했다는 거다. 보통 한국 사회의 ‘전세는 서민’이라는 이상한 통념을 이용해 증여세 등을 회피하려고 부유층이 신혼자녀에게 강남의 고가전세를 얻어주는 경우가 많다.
2억원주고 집을 매입한 사람과 3억원주고 전세를 사는 사람중 전자는 부자이고 후자는 빈자인가? 강남에서 8억원 전세를 사는 사람은 과연 서민인가? 물론 여기에서도 전세자금 대출, 혹은 저가 전세 등 다양한 요인이 존재한다. 하지만 ‘전세’가 서민의 것이라는 착각에서는 벗어나야 할 때임은 분명하다.
우리가 원하는 전세가 유지될 수 없는 이유
자꾸 매매가 대비 전세가 비율이 높아서 위험하다고 한다. 허나 보증금채권 확보가 불안하면 반전세를 사시든가 월세를 살면 된다. 어디에나 얻는 것이 있으면 리스크가 있다.
정부가 전세를 공급하라고 한다. 하지만 공공주택 확대는 가뜩이나 빚더미인 LH에 더 큰 손해를 보게 한다. 이미 위태로운 국민연금을 넣으라는 이야기는 더욱 비현실적이다.
전세가를 안정시켜 달라고 한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사실이 있다. 전세가 없어지는건 당연하다는 것이다. 전세를 굳이 시장에서 늘리고 싶다면 방법은 간단하다. 다주택자 중과세 모두 없애고 집값이 더 뛰게 해주면 모두가 집을 사서 전세를 공급할 것이다. 하지만 이야말로 모두가 경계하는 버블이 아닌가.
좋든 싫든 답은 분명하다. 한국 역시 전세제가 사라질 수밖에 없으며 글로벌스탠더드인 월세시대의 도래를 당연한 것으로 맞아들이고, 그에 대처해야 한다.
외국도 다르지 않은 현실
전세라는 기형적 시스템과 낮은 월세전환율에 힘입어 한국의 소득대비 주거비용은 OECD국가중 저렴한 편에 속해왔다. 이런 불균형은 애초에 지속할 수 없는 것이었다. 집값이 오르지 않는다면 집을 매수한 사람들이 왜 굳이 전세를 두겠는가.
이러한 상황을 이용해 선정적 주장을 펼치는 이들도 문제다. 우석훈은 1억원 이상 대출해서 집사지 마라고 하는데, 대관절 세계 어느 나라의 중심도시에서 젊은이가 레버리지 없이 자기자본만으로 집을 사서 살 수 있는지 모르겠다. 집살돈 몇억씩 현찰로 쥐고 있는 젊은이는 한국에서도 외국에서도 금수저 외엔 드물다.
사실 중심도시에 사는 저성장 시대의 외국 젊은이들도 마찬가지다. 이들도 월세를 내든지 장기모기지로 집을 사든지 선택한다. 월세와 모기지 금액을 비교해 부담이 안 가는 액수로 주거형태를 결정한다는 말이다. 월세는 사라지는 비용이지만, 모기지는 월세내듯 매달 원리금을 장기간 상환하다 보면 자기집이 된다. 이들은 한국의 대출끼고 집사는 사람보다 자기자본비율은 낮고 레버리지는 많다.
세계 어느 나라의 중심도시에서도 1억원(10만불)대출이 불안하다면 집을 살 수 없다. 그리고 그 귀결점은 그냥 월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