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월 23일은 21세기 역사에 꽤 중요한 날로 기록될 가능성이 크다. 아마도 후일 사가들은 이날을 기점으로 애플의 운세가 기울고 삼성이 대신 그 자리를 꿰어찼다고 기록할 듯싶다. 이날 애플은 2012년 사사분기 실적을 발표한다.
2009년 말 아이폰이 국내에 들어오기 전부터 나는 아이폰 예찬론자였다. 블로그에서 여러 달콤한 논리를 포스팅하기도 했고, 몇 개 포스팅은 KT를 자문하기도 했던 이찬진 씨가 퍼 날라 꽤 유명해 진 적도 있다.
아이폰이 한국에 처음 나오던 날 3GS 검은색, 흰색 모델 두 대가 집에 도착했고, 아이폰4도 출시 첫 날 내 손에 있었다. 지난 해 말 아이폰 5도 마찬가지… 누가 봐도 앱등이애플 빠다. 원래 빠가 그렇듯이, 초기 빠라는 자부심도 있었다.
스마트폰 생태계에 긍정적인 역할을 한 아이폰, 그 역할은 끝났다.
하지만 나는 아이폰4가 나올 무렵부터 주위에서 무슨 스마트폰을 살지 물어오면 아이폰이든 안드로이드 폰이든 맘에 드는 것으로 사라고 조언하기 시작했다. 아이폰을 마치 IT 진보의 상징처럼 여기던 당시 국내의 목소리와는 좀 시각이 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한국에서 아이폰의 역할은 처음부터 ‘이이제이(以夷制夷)’였다. 우선은 국내의 닫힌 무선인터넷 시장을 열어젖히는 트로이의 목마로서 환대를 받았고, 일단 스마트폰 시장이 열린 이후로는 독점적 지배력을 누리는 삼성을 견제하는 수단으로서 여전히 그 역할이 유효하다.
아이폰이 들어온 지 3년이 막 넘은 2013년 시점에서 돌이켜 보면 이 두 가지 목적은 거의 달성된 것 같다. 폐쇄적이던 무선인터넷 시장은 활짝 열렸고 삼성과 이통사, 포털의 횡포 아래 질식해 가던 혁신의 분위기도 제한적이지만 살아나고 있다.
그렇게 아이폰의 역할이 끝나가고 있으니 이제 미련 없이 떠나보내도 좋을까? 뭐 굳이 내 손으로 떠나보내지 않아도 이미 아이폰 시대는 저무는 것 같다.
아이폰 시대의 종말 1 : OS가 아닌 단말기의 시대
아이폰 시대가 저무는 첫째 이유는 요즘 스마트폰에서 OS가 사라지고 단말기만 보이기 때문이다. 안드로이드가 자리를 잡기 전만 해도 도무지 아이폰의 OS 경쟁력을 따라잡기 어려울 듯싶더니, 두 OS의 수준이 이제 거의 근접하면서 소비자가 체감하는 OS 존재감도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러니 결국 남는 것은 단말기다. 스크린 사이즈, 카메라 화소, 쿨한 디자인 등이 강력한 차별화 요소로 떠오른 것이다.
삼성이 지난 한 해 스크린 사이즈가 5인치에 달하는 갤럭시 노트와 갤럭시 S 시리즈를 수천만 대 팔아치우면서 나타난 가장 큰 변화는, 스마트 폰 시장의 게임의 룰이 스크린 큰놈들과 작은놈들 사이의 전쟁으로 변해버렸다는 것이다.
이러니 애플이 아무리 고급스러운 알루미늄 바디를 들이밀어도 소비자들 눈에는 스크린 사이즈만 보이기 시작했다. 애플은 이 시점에서 완전히 다른 혁신을 내놓아 삼성이 만들어 놓은 스크린 사이즈란 게임의 룰을 뒤집었어야 했는데, 오히려 길쭉한 스크린을 내놓으며 삼성이 차려놓은 이 불리한 경기장에 발을 들여놓고 말았다. 그것도 제대로 큰 것도 아닌 어정쩡한 사이즈의 화면으로…미국에서는 아이폰5의 키다리 스크린을 두고 무슨 리무진이냐는 비아냥을 하기도 한다.
아이폰 시대의 종말 2 : 유니바디 공정
애플이 저지른 두번째 실수는 유니바디 공정을 아이폰 5에 도입한 것이다. 유니바디 공정으로 제작한 맥북이나 아이폰을 보면 굉장히 고급스러워 보인다. 애플은 스위스 시계 같은 장인정신을 느낄 수 있다고 자랑하는데… 그런데 말이다. 이것 사실 비즈니스 측면에서만 보면 문제가 많다.
평균 2년이면 갈아치우는 IT 기기가 스위스 시계의 아우라를 풍긴다는 사실, 애플은 심각하게 고민해 봐야 한다. 구입한 지 4년이 넘어가는 내 맥북은 지금 봐도 막 산 것 같아서 새 노트북을 사고 싶은 생각이 별로 들지 않는다.
IT 기기가 2년이 지나도 고장 나지 않으면 왜 이 녀석은 어서 장렬하게 전사해 신상 제품을 구입할 구실을 주지 않는지 주인에게 구박을 받기 시작한다. 실제로 주변에 맥북을 바꿔야 하는데 고장이 안 나서 마누라 허락을 못받았다는 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다. 결과적으로 휴대폰 사용 주기가 길어지고 애플의 이익에 도움이 될지는 의문이다.
제조공정 측면에서도 유니바디 공정은 문제가 많다. 심지어 애플조차도 부담을 느낄 만큼 유니바디 제조라인은 허리가 휘청거릴 정도로 막대한 투자를 해야 한다. 따라서 애플은 그동안 쏟아부은 돈 때문에라도 알루미늄을 테마로 한 지금의 디자인 방향을 쉽게 돌이키기가 어렵다. 교체주기가 빠른 스마트폰 시장에서 자칫하면 ‘낡은 디자인’으로 여겨질 수 있다.
스위스 시계는 자자손손 물려 쓰는 것을 자랑으로 여긴다. 하지만 휴대폰은 그렇지 않다. 애플은 앞으로 몇 세대에 걸쳐 새 모델이 나올 때까지 유니바디 제조라인을 쉽게 포기하지 못할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다 또 얼마나 많은 중요한 시장기회를 놓치게 될까?
아이폰 시대의 종말 3. 애플의 엄청난 성공
애플의 마지막 문제는 아이폰이 너무 엄청나게 성공했다는 것이다. 그것도 무려 6년 전인 2007년부터… IT 세계에서 6년이면 한 세기나 다름없다. 지금 막 스마트폰 시장으로 유입되는 청소년들 시각에서 보면 아이폰은 이름과는 달리 이제 엄마폰, 아빠폰이 된 것이다. 이렇게 지루한 브랜드라니…
스마티 팬츠 영 러브의 조사를 보면 애플 아이폰은 청소년들 사이에서 여전히 브랜드 선호도가 1위지만, 삼성의 갤럭시 브랜드가 22%로 바짝 뒤를 따르고 있고 심지어 이제 망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블랙베리, 마이크로소프트가 아이들 사이에서 다시 각광을 받는 형편이다.
승자의 저주다. 아이폰은 너무 일찌감치 성공해 “올드”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쿨함은 언제나 새로움을 내포한다. 하지만 너무 성공해서 모두가 가져버린 아이폰은 점점 쿨함을 잃어가고 있다.
애플빠의 충성심 : 그래도 애플에 거는 기대.
물론 부자 망해도 3년 간다. 특히나 애플의 아이패드는 앞으로도 쉽게 왕좌의 자리를 내 놓지는 않을 것이다. 애플이 아이패드 사업만 떼어내어 회사를 따로 차려도 미국 11위의 IT기업이라는데 뭘…
그럼에도 잡스 없는 애플이 망조가 든다면 나는 슬플 것이다. 삼성이 아무리 날고 긴다 해도 애플처럼 혁신을 선도하는 기업문화를 쉽게 만들어내지는 못할 테니까.
애플이 아이폰을 들고 나오기 전까지 세상은 얼마나 지루했는가? 과연 애플이 퇴조한 시장에서 삼성은 이전처럼 재미있는 세상을 보여줄 수 있을까? 그래서 ‘아이폰 이이제이(以夷制夷)론’은 여전히 유효하다.
스마트폰 시장의 화두가 OS에서 단말기로 변해버렸다면, 애플은 iOS 업그레이드나 하는 대신에 하드웨어 측면에서 경천동지할 새로운 폼 팩터(form factor)를 발굴해내야 할 것이다.
삼성이 올해 CES에서 선보인 휘어지는 OLED 스크린은, 그래서 앞으로 언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역할을 할 가능성이 크다. 부디 애플이 삼성을 대신할 다른 디스플레이 공급사를 빨리 찾아내 눈이 튀어나올 새로운 단말기 디자인, 그리고 그에 걸맞은 새로운 OS를 만들어내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