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플러스와 이마트, 롯데마트 등은 이제 더 이상 대형마트가 아니다.”
웬 흰소리냐고? 서울 고등법원의 판결에 따르면 그렇다. 서울고법 행정8부(재판장 장석조)는 지난 12일, 이마트와 홈플러스 등 6개 대형마트가 서울 동대문구청과 성동구청을 상대로 낸 영업시간 제한 등 처분 취소 소송에서 원심을 깨고 원고의 손을 들어주었다.
홈플러스, 이마트, 롯데마트 등은 대형마트가 아니다?
이들 대형마트는 각 구청이 2012년 11월, 조례에 따라 밤 12시부터 아침 8시 사이에는 영업하지 말고 매달 둘째·넷째 일요일을 의무휴업일로 정하라고 통보하자 이에 불복하는 소송을 냈다. 원심은 “대형마트의 매출 감소폭이 적지 않겠지만, 중소유통업자나 전통시장 매출 증대에 큰 영향을 미쳐 공익 달성에 매우 효과적일 것”이라며 영업시간 제한이 적법하다고 판시했다.
대형마트가 지역별로 주요 상권을 장악하면서 전통시장과 영세 상인들은 매출감소로 큰 타격을 입었다. 이에 대형마트 규제가 논의되던 2012년 봄, 전국 각지의 지자체에서 상생(相生) 조례안을 공포하게 된다. 이 조례안은 대형마트에 대해 영업시간 제한과 월 2회 휴무를 의무적으로 강제하는 것이었다. 이 제도는 중소 상인은 물론 대형마트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휴식권과 건강권도 보호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됐다.
이 제도의 시행에 대해 중소상인들은 상생의 길이 열렸다며 환영했다. 우여곡절 끝에 2013년 유통산업발전법이 개정되면서 조례가 규정한 ‘영업시간 제한과 의무휴업’은 법적 근거를 갖기에 이른다. 그러나 그동안 일부 보수언론에선 이 제도가 실제로 중소상인들에게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식의 여론을 조성하기도 했었다.
서울고법 재판부가 원심을 깬 이유는 “유통산업발전법은 영업시간 제한 명령 대상을 ‘대형마트’로 규정했는데, 홈플러스 등은 이 법상 대형마트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유통산업발전법에서는 대형마트를 ‘매장 면적이 3000㎡ 이상으로 점원 도움 없이 소매하는 점포 집단’이라고 정하고 있는데, 소송에 참여한 대형마트들은 ‘점원의 도움 아래’ 영업이 이뤄져 대형마트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골목상권 보호, 상생’ 등 입법취지의 실종
유통산업발전법 제2조 3항과 별표에 규정된 ‘대형마트’는 매장 면적의 합계가 3천㎡ 이상, 식품·가전 및 생활용품 중심, 점원의 도움 없이 소비자에게 소매하는 점포를 말한다. 그런데 서울고법 재판부는 이 가운데 ‘점원의 도움 없이 소비자에게 소매하는’ 이라는 조건을 문제 삼은 것이다.
재판부는 대형마트에 납품하는 중소상공인들이 입을 피해와 지역 주민들이 겪을 불편에 대해 충분히 검토했다는 증거가 없다고 보았다. 또 “영업시간을 제한하지 않으면 노동자들 건강권이 실제로 침해되는지도 충분히 따져보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재판부는 또, 홈플러스와 같은 외국계 업체에 대한 영업시간 제한은 세계무역기구(WTO)의 서비스거래에 관한 일반협정(GATS)과 한-유럽연합 자유무역협정(FTA)에 위배된다고도 했다. 이 협정들은 생명이나 건강 보호를 위한 경우가 아니면 서비스 영업 규모를 제한할 수 없다고 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번 서울고법의 판결은 골목상권 보호나 상생 등을 목적으로 한 유통산업발전법의 실질적인 입법취지를 고려하지 못했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그 대신 재판부는 대형마트 영업규제가 소비자 선택권을 과도하게 제한하는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얼핏 보면 다수 소비자의 이해를 앞세운 듯 보이기도 하지만, 정작 이 판결의 결과로 인한 이득은 소비자에게가 아니라 대형마트를 운영하는 자본에게로 돌아갈 듯싶다. 판결은 맞벌이 부부의 증가로 야간이나 주말이 아니면 장보기가 어렵고, 일반 가정도 편의시설이 열악한 전통시장 이용에 불편을 겪는다는 걸 근거로 내세웠다. 그러나 ‘곳곳에 크고 작은 마트’가 들어선 현실에서 대형마트가 아니면 장보기가 불편하다는 주장이 얼마나 설득력을 갖는지는 의심스럽다.
이번 판결은 유통재벌들의 영업 규제가 ‘전통시장이나 소상공인 보호를 위한 공익적 측면’이 존재한다고 보고 이를 적법하다고 판단해 온 원심의 판결과는 배치되는 것이다. 이에 대한 대법원의 최종 판결이 어떻게 나올지는 예단하기 어렵지만, 다시 좌절감에 빠질 영세 상인들을 생각하면 씁쓸하기 짝이 없다. 대통령 선거의 이슈로 떠올랐던 ‘경제민주화’는 이제 법원에서조차 외면받고 있는 것일까.
사람들은 법을 잘 모른다. 일상 속에서 “그런 법이 어디 있어?”라고 말할 때, 법이란 일종의 상식적 ‘법 감정’에 불과하다. 그래도 법의 구속을 받지 않고 선량한 시민으로 잘도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법이 자신의 삶을 규제할 수 있는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것이라는 걸 깨달을 때쯤엔 이미 법은 그들의 편이 아니기 쉽다.
“법대로 하자”고?
도덕규범 가운데 사회생활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최소한 불가결하며 강제적으로라도 준수시켜야 되는 것이 법규범이라 하여 ‘법은 도덕의 최소한’이라고 불린다. 따라서 이 ‘강제적으로라도 준수시켜야 되는 법 규범’은 정의에 입각하여야 하며 약자의 편에 서는 것이어야 한다.
사법부가 ‘정의의 최후 보루’인 것은 법관이 독립하여 오로지 법과 양심에 따라 판결한다는 전제 위에 서 있는 수사다. 재판은 당사자의 신분이나 계급, 종교, 사상 등의 사회적 지위와 관계없이 불편부당하게 이루어지므로 약자에게도 ‘정의를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가난한 서민들이 마땅한 구제 수단을 갖지 못할 때 ‘법대로 하자’고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거기에는 법은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 무관하게 공평무사할 것이란 믿음이 존재한다. ‘법대로’를 외치는 것은 자신의 정당성에 대한 믿음이 법의 정당성의 신뢰로 이어질 때에만 가능한 주장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법이 복잡하게 얽힌 이해의 조정자 구실을 도맡게 되어 버린 오늘, 법은 더 이상 본래적 의미에서 ‘도덕의 최소한’이지 않다. 법이 사회적 약자에게도 선을 실현시켜 줄 것이란 기대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법전 속에 잠자고 있는 ‘사법적 정의’
법은 언젠가부터 강자, 부자의 것이 되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경구는 자본과 권력의 편이 되어 버린 오늘의 사법적 정의란 ‘법전’ 속에 잠자고 있을 뿐이라는 강력한 반어다. 오늘의 법은 서민의 소박한 정의에 대한 믿음 따위엔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엄청난 액수의 수임료와 성공보수와 내로라하는 전관예우, 한정 없이 길어지기만 하는 재판 과정 따위와 감히 대결할 수 없는 사회적 약자들에겐 법은 더 이상 정의의 실현 과정일 수 없게 된 것이다. 그것은 결과적으로 사회적 기득권을 추인하면서 약자의 무력감을 확인하는 걸로 기능하기도 한다.
올해 사회적 쟁점이 된 재판에 대한 법원의 판단은 그런 현실에 대한 유쾌하지 못한 방증이다.
쌍용자동차의 노동자들이 2심에서 거둔 승리는 대법원에서 간단히 뒤집혔다. 25명 노동자의 죽음을 불러온, ‘정리해고는 유효하다’는 판결은 5년 동안의 힘겨운 싸움에 지친 노동자들의 다리를 걸어 넘어뜨린 것과 진배없다.
대법원은 “해고를 단행할 긴박한 경영상 필요가 존재했다”고 판시하여 헌법에 명시된 ‘노동권’ 대신 자본 편에서 주장한 ‘경영권’의 손을 들어주었다.
“보수일색 대법원은 권력엔 약하고 약자엔 강하다”(곽노현)거나 “같은 사실 관계를 두고 재판관의 시각에 따라 유무효가 달라진다면 그게 제대로 된 법이냐”는 지적을 법원이 겸허하게 들어야 하는 이유다.
6년에 걸친 YTN 해직기자들의 싸움도 대법원이 이들의 상고를 기각하며 해고가 정당하다는 판결로 허망하게 막을 내렸다. ‘YTN 경영진 구성과 경영주 대표권은 사용자의 본질적이고 핵심적 권리’라는 대법원의 논리는 ‘정권의 언론장악을 정당화한 판결’이라는 언론인들의 반발이 결코 무리하지 않음을 증명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민간인 학살과 사법살인 등에 대한 국가 배상책임을 인정하던 판례가 어느 날부터 ‘금액 과다’를 이유로 원심을 파기하는 사례가 줄을 잇고 있다. 이미 지급한 배상금의 이자가 너무 많다며 배상금을 줄여 피해자 유족들이 국가의 채무자로 전락하는 만화 같은 현실도 대법원의 작품이다.
사법부의 판결 가운데 무리한 법리 적용의 단연 백미는 2004년, 헌법재판소의 ‘신행정수도법 위헌 확인 결정’이다. 헌법재판소는 이 소송에서 서울의 ‘관습헌법론’을 제시하여 세간의 웃음거리가 되기도 했던 것이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만든 억지 논리라는 세간의 평가는 그러나, 그들의 결정을 되돌리지는 못했다.
법을 상징하는 ‘정의의 여신’은 그리스 신화에선 디케(Dike), 로마신화에서는 유스티티아(Justitia)다. 정의를 뜻하는 영어 ‘저스티스(justice)’는 이 여신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디케는 칼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지고, 유스티티아는 여기에 저울이 더해졌다. 저울은 ‘형평(衡平)’을 지킨다는 의미다.
칼은 정확한 판정에 따라 정의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하다는 뜻, 저울은 엄정한 정의의 기준을 상징한다. 정의의 여신은 비록 서구에서 유래한 상징에 불과하지만, 그것이 환기하는 본질적 의미는 시대와 국경을 넘어 읽힌다.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엄정하고 공평하게 적용되지 않는다면 법과 정의는 사회적 약자에겐 가장 위험한 폭력이 될 수 있다는 경고이기도 하다.
법원이 유통재벌의 영업규제가 위법하다고 판결한 다음 날, ‘긴박한 경영상 필요’로 ‘정당하게 해고된’ 쌍용자동차의 노동자 둘이 70미터 굴뚝에 올라 세 번째 고공농성에 들어갔다. ‘더 이상 죽이지 말라’며 이들이 굴뚝에 오른 날, 또 한 명의 해고 노동자가 세상을 떠났다. 2009년 정리해고 이후, 벌써 26번째 죽음이다.
저무는 2014년의 끝자락에 서서 우리가 잘 알지도 못하는 법과 정의의 행방을 가늠해 보는 까닭이 여기 있는 것이다.
출처: 이 풍진 세상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