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란 현재와 이어지는 ‘연속적’인 시간이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는 그것을 ‘단속적(斷續的)’인 시간, 때로는 화석화된 것으로 이해하기 쉽다. 엄정한 역사의 현장이 아닌, 교과서나 이론으로 배우는 역사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때로 우리는 특정한 시간과 공간을 통해서 역사의 실체를 손에 닿는 것처럼 느끼기도 한다. 교과서 속의 역사가 지금, 현재의 시공으로 이어지는 살아 있는 시간이라는 걸 말이다. 그것은 기왕의 앎 따위를 뛰어 넘는 명징한 깨달음으로 다가오기도 하는 것이다.
난징에서 만난 일본군 위안소
어쨌든 지나간 역사의 자취를 찾아 떠난 길이기는 했다. ‘청년백범’에서 실시한 제4기 답사,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김구의 발자취를 따라’ 길을 나선 서른여덟 명의 대원들이 인천공항을 떠난 것은 1월 23일 정오가 가까워서였다.
상하이에서 하룻밤을 묵고 우리는 김구를 비롯한 임정요인들이 일제의 추격을 따돌리며 옮아간 고장들을 차례로 쫓아왔다. 자싱(嘉興), 하이엔(海鹽)을 거쳐 항저우(杭州)에서 다시 하룻밤을 묵은 뒤 난징(南京)으로 들어온 우리는 백범이 장제스를 만났던 호텔 ‘중앙반점’에 여장을 풀었다.
중앙반점에서 이틀째 묵고 난 아침이었다. 나는 끊어졌다가 이어지곤 하는 와이파이(Wi-Fi)를 달래가면서 스마트폰으로 인터넷 뉴스를 훑다가 황선순 할머니의 부음을 읽었다. 1월 26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할머니가 전 날 오전에 여든아홉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었다.
황선순 할머니는 1943년 열일곱 살 때 부산의 고무공장에 취직시켜준다는 말에 속아 남양군도로 끌려갔다. 그이는 나우루 섬 위안소에서 2년 동안 성 노예 생활을 강요받았다. 1945년 11월에 조국으로 돌아온 할머니는 가난 속에서 2남 4녀를 낳아 길렀다. 만년에 대상포진, 뇌경색, 신경질환 등과 투병해 오던 할머니가 마침내 타계한 것이었다.
아침을 먹고 로비에 모이자, 인솔자는 일정을 일부 바꾸어 근처에 있는 ‘위안소’를 들를 예정이라고 알려주었다. 예정에 없던 일정으로 황 할머니의 부음과 어떤 인과로 이어져 있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은 교과서 속의 역사가 현재의 시공으로 이어지는, 역사의 ‘연속성’을 아주 자연스럽게 깨닫게 해주었다.
리지샹의 ‘긴스이루’와 박영심 할머니
난징 시 리지샹(利済港) 2호에 있는 ‘긴스이루(樓)’는 호텔에서 지척이었다. 큰 길가에 서 있는 허물어져 가는 건물은 문을 닫아걸고 외부인의 출입을 막고 있었다. 2003년까지 아파트로 사용되었던 이 건물은 난징 시의 도시계획으로 재건축이 결정되어, 철거될 예정이었다. 그러다 위안소 유적지 보존 운동이 일어나면서 공사가 중단되어 있는 상태라고 했다.
리지샹 위안소는 면적이 6700㎡로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이 아시아에 세운 위안소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가장 온전하게 보존된 위안소 유적이다. 한때 방치돼 쓰레기장으로 쓰이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 뒤, 2014년에 장쑤성(江蘇省)의 ‘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었다.
시멘트 담장과 가림막으로 가려놓은 낡고 황량한 대형 건물 7동이 뉴스의 조명을 받게 된 것은 이곳이 일본군 위안소였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2000년 5월, 한 일본 자유기고가의 추적에 힘입어 여기서 성노예 생활을 강요당했던 조선인 위안부의 생존 사실이 확인되면서 이 유적이 뉴스의 초점으로 떠오른 것이었다.
그이가 당시 북한에 생존해 있었던 박영심(1921~2006) 할머니다. 평안남도 출신의 할머니는 1939년 17살 때 일본인 순경에게 속아 난징의 위안소로 끌려왔다. 그이는 긴스이루에서 ‘우타마루’라는 이름으로 3년 동안이나 위안부 생활을 해야 했다. 그 뒤에 버마를 거쳐 중국 윈난성 등지로 끌려다니다 전쟁이 끝나면서 할머니는 중국군에게 붙잡혀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다.
1944년 연합군이 촬영한 일본군 위안부 포로 사진에 임신한 모습으로 찍힌 이가 바로 박영심 할머니다. 사진 속에서 부른 배 때문에 힘겹게 서 있는 젊은 날의 자신을 알아본 할머니는 당시 인터뷰에서 “사진에 나와 있는 임신한 여성이 바로 나다. 아기는 포로수용소에서 유산됐다”고 확인해 주었다.
리지샹 위안소에는 박영심 할머니가 있었던 ‘긴스이루(樓)’ 외에도 일본인 위안부가 있었던 ‘동운루(東雲楼)’도 있었다. 당시 일본군 제15사단 군의부 위생업무 기록인 난징과 쩐장 등 4개 지역의 위안부 검사연인수에 따르면 조선인은 159명이었다. 위안소를 이용했던 옛 일본군 병사의 증언이다.
“난징에는 위안소가 있어서 나도 갔다. (……) 조선인 여성도 있었다. 군표로 지불했다. 위안소는 큰길에 많이 있었다. 요금은 싸서, 한 달에 2번이나 3번은 갔다. 장교 전용의 위안소가 따로 있었고, 거기는 조선인 여성이 있었다.”
– 아키야마 겐치(秋山源治·제16사단 보병 제33연대 제1대대)
해방이 되면서 고향으로 돌아온 할머니는 위안부 생활의 피해 후유증으로 자궁을 들어낸 데다 심장판막 이상과 신경쇠약으로 투병해야 했다. 2000년 12월 일본군의 전쟁범죄 행위를 단죄하기 위한 ‘여성 국제전범 법정’에 참석하는 등 피해 실상을 알리는 데에도 적극 나섰다. 할머니는 평남 강서군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2006년 8월, 향년 85세를 일기로 영면했다고 한다.
굳게 잠긴 위안소 유적 앞에서 우리는 관련 역사적 사실에 대한 설명을 듣고, 망국의 역사에 희생된 여성들을 기리며 오래 묵념했다. 나라 잃은 백성으로 강도 일본에게 인권을 유린당해야 했던 할머니들의 고통스런 역사를 이역만리, 낯선 나라에서 확인하는 마음은 아리고 아팠다. 해방 70년, 청산하지 못한 역사는 이국땅에서 시방도 ‘현재형’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일본군 ‘위안부’, 우리 역사의 소수자들
‘정신대’, ‘종군 위안부’ 등의 이름으로 불리어 온 일본군 ‘위안부’는 우리 민족의 식민지 시기 역사에서 가장 아프고 부끄러운 부분이다. 그들은 나라 잃은 백성이 져야 했던 오욕의 세월을 고스란히 온몸으로 감당해야 했던 우리 역사의 소수자였고, 희생자였기 때문이다.
이들을 부르는 공식 명칭은 “일본군 ‘위안부'”다. 영어로는 ‘일본군 성 노예(Military Sexual Slavery by Japan)’. 위안부에 따옴표가 들어가는 이유는 여성들이 스스로 부른 이름이 아니라 일본군에 의해, 일본군의 문서로 불린 이름이기 때문이다. 또 범죄 주체인 ‘일본군’이 반드시 들어가야 하는 이유는 강제성과 국가차원에서 저질러진 범죄임을 표현하기 위해서다. 결국 이 까다로운 이름 속에 일본군 ‘위안부’의 역사적 성격이 담겨 있는 것이다.
여행에서 돌아온 지 나흘 만인 1월 31일, 황선순(1926~2015) 할머니가 가신 지 닷새 만에 또 한 명의 ‘위안부’ 피해 할머니가 세상을 떠났다(관련기사 : ‘사죄 못 듣고…’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 또 별세).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아래 정대협)의 발표에 따르면 지난 1월 31일, 한국 정부에 등록된 위안부 피해자인 A할머니가 입원했던 병원에서 지병으로 운명했다는 것이다.
할머니의 부음이 낯선 영문 이니셜(A)로 세상에 알려진 것은 당신과 그 가족들이 ‘피해 사실이 공개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함은 물론이거니와 다른 어떤 정보도 알려지지 않은 할머니의 부음 앞에서 우리는 말을 잃는다. 이로써 정부에 등록된 위안부 피해자 238명 가운데 살아남은 이는 53명으로 줄었다.
한 여성의 삶을 송두리째 유린당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는 당사자로서도 그것을 공개적으로 밝히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자기 삶의 실존을 걸고 일제의 만행을 처음으로 알린 고 김학순(1924~1997) 할머니의 증언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고백'(정대협 윤미향 대표)이라고 한 뜻은 거기에 있다.
1991년 8월 14일, 김학순 할머니의 공개 증언으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공론화되고 일본의 책임과 배상을 요구하는 각종 활동이 시작되었다. 이듬해 1월에는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첫 수요시위가 벌어졌고, 이후 일제의 반인류적 범죄행위를 규탄하는 국제연대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그리고 20년이 흘렀다. 2011년 12월 14일, 위안부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1000차 수요시위 때 일본대사관 건너편에 ‘평화의 소녀상’이 세워지고 유엔에서도 ‘위안부 결의안’에 추진되는 등의 변화가 있었지만 일본의 변화는 여전히 눈에 띄지 않는다.
일본 총리 아베 신조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책임자 처벌과 배상을 요구한 유엔의 권고’를 무시하겠다는 방침을 공공연하게 밝히고 있다. 그는 유엔의 권고에 대해 ‘사실 오인에 기반을 둔 일방적인 것으로 법적 구속력이 있지 않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것이다. 전쟁과 반인류적 범죄에 대한 책임과 배상을 거부하는 아베와 일본의 태도는 전후 책임과 배상을 다하고 유럽에서 지도적 지위를 인정받는 독일과 비교되곤 한다.
전후 책임과 배상, 독일과 일본
A할머니가 세상을 떠난 날, 독일의 전 대통령 리하르트 폰 바이체커(Richard von Weizsäcker, 1920~2015)도 유명을 달리했다. 그는 1984년 7월 대통령에 선출된 이후 10년 동안 대통령직에 있으면서 독일 통일을 이루어낸, ‘독일의 양심’으로 불리는 정치가다.
바이체커는 독일 패전 40주년이 되던 1985년 5월 8일, 의회에서 ‘광야 40년’이라는 제목의 기념연설을 했다. “오늘은 독일의 패전이라는 점에서 우리에게 슬픈 날이지만, 우리 독일민족이 히틀러 정권에서 해방된 날이다”로 시작되는 이 명연설은 세계 20여 개국에 널리 알려졌다.
“우리는 과거 역사를 오늘의 시점에서 되돌아보고 그런 슬픈 역사는 되도록 빨리 잊어버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과거 역사를 덮어두게 되면 우리는 오늘의 역사를 보지 못하는 장님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아프더라도 과거의 쓰라린 역사를 마음속으로 끊임없이 되새겨서 그것이 확실하게 기억되도록 합시다.”
– 강원룡, ‘바이체커에게 배울 점’에서 재인용
바이체커가 대통령이 되어서 가장 먼저 한 일은 폴란드를 방문한 것이었다. 폴란드는 히틀러 정권에 가장 먼저 피해를 입은 나라였는데 그는 독일을 대표해 폴란드 사람들에게 진심의 사과를 전했다. 퇴임 후인 1995년 8월에 일본을 방문해 바이체커가 행한 연설도 진실을 외면하고 있는 일본 사회에 경종을 울리는 것이었다.
“우리 독일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과거의 사실에 대해 공개적으로 비판, 토론하는 것은 필수불가결한 일이며 진실에 입각한 판정을 내리는 것이 아프고 어려운 일이지만 결국에는 스스로에게 좋은 것이라는 것을 확실히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과거의 사실에 대한 올바른 비판과 역사적 평가는 한 국가가 나아가야 할 올바른 방향을 제시해주기 때문입니다.
한 국가의 행위에는 일반 시민들 간의 행위원칙이 그대로 적용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가끔 다른 사람에게 사과를 하거나 사죄를 해야 할 경우가 있습니다. 이때의 사과는 ‘진심에서 하는 사과라야만이 상대방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이루어져야 합니다.”
2월의 첫 수요일에도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는 지난 23년 간 그랬던 것처럼 수요시위가 열릴 것이다. 1163차 집회다. 정대협은 남은 생존 피해자들이 여생을 편안히 보낼 수 있도록 일본에 조속한 문제해결을 촉구했다. 그러나 일본 대사관은 창에 블라인드를 친 채 여전히 이 절체절명의 요구를 외면하고 있다.
닷새 간격으로 세상을 떠난 두 분 할머니의 명복을 빌면서 경북 칠곡 출신의 위안부 고 심달연(1927~2010) 할머니가 그린 그림을 물끄러미 들여다본다. (사)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 모임의 브랜드 ‘희움’이 제작한 그림엽서다. 푸른 하늘을 바탕으로 날개를 활짝 편 새 한 마리가 그려져 있고 삐뚤삐뚤한 글씨가 씌어 있다.
“내가 새가 된다면 날아가고 싶다. 천리만리.”
심달연 할머니는, 아니 그동안 한스런 젊음, 그 오욕의 역사와 싸우다 떠난 일백여든다섯 분의 할머니들은 소망대로 새가 되었을까. 길은 멀고 상황은 결코 녹록지 않다.
그러나 고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고백’이었듯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이 외치는 당당한 희망”은 여전히 뜨겁다. 호주와 유럽, 미국 의회를 움직인 것은 진실을 구하는 이들의 용기였고, 세계의 인권과 평화를 위한 이들의 간절한 소망이었다. 그것은 역사를 바로잡는 것은 총칼이 아니라 진실에 기초한 용기와 낙관이라는 믿음을 거둘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원문 : 이 풍진 세상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