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에 국내 최초 영화관인 단성사 관련 기사가 여기저기 눈에 띈다. 법원경매에서 세 차례나 유찰돼 최저 입찰가격이 감정가의 절반 수준으로 내려갔다는 소식이다.
어떤 신문에선 ‘주인을 찾지 못하는 현 상황’을 ‘잔혹사’라고 표현하고 있다. 인터넷에 떠 있는 낡은 사진 속에 한자 간판 ‘단성사(団成社)’를 단 옛 영화관 건물이 오래 눈길을 끌었다.
‘단성사’ 소식에 단관 극장을 생각하다
물론 나는 단성사 극장을 전혀 모른다. 거기 가 본적은 물론이고 그게 서울 어디쯤에 있는 극장인지조차 모른다. 그러나 7, 80년대 <동아일보> 따위의 일간지 하단을 장식하던 영화 광고에서 본, 한자 약자 ‘단(団)’자를 쓴 이름은 눈에 익었다.
이른바, 멀티플렉스(복합상영관)의 시대 – 관련기사 <‘가설 천막극장’에서 만난 영화와 노래들>가 되면서 이제 옛날식 단관 영화관은 거의 남지 않은 것 같다. 시도별로 한둘씩 있는 예술영화 전용관이 바로 그 구식의 단관 영화관이 아닌가 싶다. 하긴 그런 퀴퀴한 냄새 나는 낡은 시설과 환경으로 신세대 관객을 끌어들이는 것은 어려운 일일 수밖에 없겠다.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시골에서 대구로 유학을 갔고 거기서 나는 10대와 20대를 보냈다. 군대를 다녀와 80년대 초반 대학을 졸업하고 경주 부근의 소읍으로 첫 발령을 받아 떠날 때까지 나는 대구를 떠나지 않았다. 그래서 내 기억 속의 대구는 언제나 70년대의 모습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지하철도 없었고, 오늘날과 같이 도시가 커지지도 않았다. 대구은행 등 몇 개의 금융기관이 도심에 10층 이상의 빌딩을 올리긴 했지만 중심가는 여전히 옹색했다. 민자 역사가 들어서기 전이어서 퇴락한 대구역 앞은 좀 쓸쓸하고 을씨년스러웠다.
단관 시대의 위계, 개봉관-재개봉관-동시상영관
무엇보다도 내 기억 속에 살아 있는 것은 이른바 중앙통 주변에 문을 열고 있었던 영화관들이다. 단관 시대여서 개봉관과 재개봉관, 그리고 동시상영관으로 영화관의 위계가 정해져 있던 때였다. 새 영화를 처음 상영하는 개봉관은 물론 일류극장이다.
당시 대구의 개봉관으로는 중앙로를 사이에 두고 동성로 쪽으로는 한일·제일·아카데미·대구극장 등이 있었고 북성로 쪽으로는 만경관과 아세아 극장이 있었다. 나중에 대구·아세아극장이 재개봉관으로 바뀐 듯한데 그 이유를 나는 알지 못한다.
내가 처음 가 본 개봉관은 한일극장이다. 중학교 1학년 때, 고등학교를 다니던 형이 데려간 그 극장에서 내가 본 영화는 리처드 버튼과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주연한 <독수리 요새(Where Eagles Dare, 1968)>였다. 14살짜리 시골소년이 얼마나 영화에 몰입해 있었던가는 영화를 보고 나와서 화장실에 들렀을 때 세면대 앞에서 고의춤을 깠을 정도였다.
아카데미 극장에선 ‘문화교실’로 <샤이안 (Cheyenne Autumn, 1964)>을 관람했다. 문화교실은 그 무렵 중등학교에서 두어 달에 한 번씩 시행하던, 유명 영화를 단체 할인요금으로 관람하는 제도였다. 영화에 목말라 있던 어린 학생들은, 자리가 없어 대부분 선 채로 영화를 봐야 했지만 아무도 그것을 불평하지 않았다.
스무 살 때, 황석영의 원작을 영화로 만든 <삼포 가는 길(1975)>을 관람한 극장이 만경관이다. 그때 영화를 같이 본 여자친구가 아내다. 그 시절, 다방에서 만나 대폿집에서 막걸리나 마시는 게 고작이었던 가난한 만남에서 영화를 보는 건 꽤 호사스런 데이트였던 것 같다.
만경관에서 본 <삼포 가는 길>
개봉관에 걸려 있던 영화를 받아서 상영하는 곳이 재개봉관이다. 도심인 동성로의 자유·송죽극장, 외곽으로는 동쪽의 중앙·신성·신도극장, 남쪽의 대한·대도극장, 서쪽의 동아극장이 대표적인 재개봉관들이었다.
이들 재개봉관에선 더러 유명 가수들의 콘서트인 ‘리사이틀’을 벌여 관객들을 끌어모았다. 남진과 나훈아, 하춘화 따위의 가수들이 리사이틀을 펼쳤고 배우와 코미디언 등으로 구성한 ‘○○쇼’가 열리기도 했는데 이때 해당 극장 앞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재개봉관 가운데서도 도심에 있었던 자유·송죽극장의 격은 외곽의 극장들과는 달랐다. 관람료가 만만치 않은 개봉관에 가는 대신 많은 젊은 연인들이 동성로에 있던 이들 극장으로 몰렸기 때문이다. 거기서 영화를 보고 나서 양키(교동)시장 쪽으로 가면 비좁은 일자형 좌석을 갖춘 전차식당에서 아주 값싸게 짜장면을 먹을 수 있었다.
개봉관과 재개봉관을 거치면서 낡은 대로 낡은 필름을 돌리는 곳이 동시상영관이었다. 이들 영화관에서 입장권을 사면 영화 두 편을 이어서 볼 수 있었다. 칠성동의 칠성극장, 달성동의 달성극장, 내당동의 미도·남도극장, 비산동의 오스카극장 등이 이런 삼류영화관이었다.
이들 영화관은 대체로 변두리에 있는데다가 시설도 열악했다. 관객들도 휴일을 죽이러 나온 날라리 고교생들이나 공단의 어린 여성노동자들이었던 것 같다. 필름 상태나 관람 환경 등 영화의 질보다는 영화를 보는 게 중요했던 우리 악동들은 가끔씩 어울려 동시상영관을 찾곤 했다.
개봉관 이하의 극장들은 따로 지정좌석제를 운영하지 않았던 것 같다. 특히 동시상영관의 경우는 거기 근무하는 직원과 가까운 이들은 그곳을 공짜로 출입할 수 있었다.
영화관 입구에서 표를 받는 이들을 ‘기도’라고 했는데, ‘기도(木戶)’는 일본어로 ‘극장이나 유흥업소 따위의 출입구, 또는 그곳을 지키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친척 형이 어느 극장의 기도라고 하는 아이를 우리가 무척 부러워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1980년대 중반에 나는 대구를 떠났다. 그리고 경북 동부와 북부지역을 거쳐 몇 년 전에야 비로소 대구 인근으로 다시 돌아왔다. 30년이 훌쩍 지나는 새, 스물아홉의 청년은 예순의 초로가 되었다. 물론 대구는 몰라볼 만큼 변했다. 어쩌다 들르는 대구의 번화가에서 가끔씩 내가 길을 잃은 기분이 되기도 할 만큼.
초라했던 대구역은 민자 역사로 탈바꿈했고, 주변의 극장들은 없어지거나 멀티플렉스로 바뀌었다. 한때 ‘키네마극장’이었던 한일극장은 결국 리모델링 끝에 ‘CGV대구한일’이 되었고, 만경관도 ‘MMC만경관15’를 거쳐 ‘CINEMA 1922 만경관’으로 이름을 바꿔 단 복합상영관이 되었다.
한일극장은 1938년 ‘대구키네마구락부’라는 이름으로 세워진 영화 전용극장이었고, 만경관은 1922년 조선인 이재필이 현재의 위치에 세운 ‘조선관’이었다. 조선관은 당시 대구에서 조선의 자본으로 설립한, 최초의 서구식 연극 극장이었다. 시대의 물결 앞에 변신하는 이들 오래된 극장들을 바라보는 마음은 좀 쓸쓸하다.
영화, 꿈과 추억의 판타지
재개봉관으로 인기를 누렸던 자유극장은 문을 닫았고, 송죽극장은 공연예술 공간인 ‘송죽 시어터’로 바뀌었다. 대구극장은 헐려 주차장이 되었고, 나머지 대부분의 극장은 없어졌다.
이로써 일제 강점기 때 세워져 서구식 연극을 공연하던 극장들, 대구좌(대구극장, 1917), 조선관(만경관, 1923), 영락관(자유극장, 1930), 신흥관(송죽극장, 1932) 가운데 송죽 시어터만이 공연 공간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셈이다.
경북만 해도 영화관이 없는 시군이 적지 않지만, 내가 살고 있는 지역은 공단을 낀 도시여서 복합상영관이 다섯 군데나 있다. 그래서 언제든지 최신 영화를 쾌적한 환경에서 관람할 수 있다.
그러나 관객이 드는 영화는 상영관마다 넘치게 상영하는 대신, 이른바 독립영화, 예술영화 같은 다양성 영화를 보는 것은 여전히 어렵기만 하다.
그래서 나는 가끔씩 대구 동성로에 있는 예술영화 전용관 동성아트홀을 찾는다. 지난해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영화진흥위원회의 예술영화관 지원 사업대상에서 탈락한 이 영화관은 지금 주로 동호인들을 중심으로 간신히 꾸려가고 있는 모양이다.
시설 개선은 엄두도 못내는 형편이니 낡고 불편한 관람 환경을 탓할 수 없다. 많지 않은 관객들은 그러나 멀리서 가까이서 이 영화관을 찾아와 상업 영화관에서 볼 수 없는 다양성 영화를 보고 즐긴다. 나는 지난해 11월, 이 극장에서 <다이빙벨>을 관람했다.
보도에 의하면 지난해 9월, ‘실버영화관’이 인근 포정동에 문을 열고 추억의 영화들을 상영하고 있다고 한다. 노인들에게 실버영화관이 얼마만한 호응을 받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거기서 추억의 옛 영화를 즐기는 이들에게 영화는 여전히 ‘꿈’과 ‘추억’을 환기해 주는 판타지 구실을 하고 있음은 틀림없을 것이다.
원문 : 이 풍진 세상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