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 이 글은 원래 민주당 싱크탱크인 ‘민주정책연구원’의 청탁을 받아 작성됐고, 2011년 4월 그 소식지에 게재됐습니다. 4년이 흘렀으니 덧대고 고칠 대목이 많지만, 본래 원고의 대부분을 그대로 옮기되, 일부 내용만 첨삭해 다시 ㅍㅍㅅㅅ에 올립니다.
청년층을 푸른 나이라 부르는 것은 ‘위선’이다.
지난 2년여 간 빈곤 취재에 골몰했다. 특히 청년 빈곤에 주목했다. 대형마트에 취업해 청년 비정규직들과 어울렸고, 영구임대아파트 단칸방에 처박힌 빈곤청년을 만났으며, 학교를 그만두고 거리에서 지내는 학업중단 청소년들을 인터뷰했다. 나는 애초부터 ‘청년’이란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모든 스무 살이 푸르른 것은 아니다. 거무죽죽한 일상을 겨우 살아내고 있는 10~30대가 있다.
그들을 그저 ‘푸른 나이’라 부르는 것은 위선이다.
예컨대 한국의 대학진학률은 80%에 이르고, 모든 취업·실업 정책은 이들 대졸자에 맞춰져 있지만, 아예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는 나머지 20%에 대해선 누구도 말하지 않는다. 대학진학률 통계에는 지방대는 물론 전문대, 방송통신대 등도 포함돼 있는데, 이들이 서울 소재 유명 4년제 대학과 같은 반열에서 취급받는 ‘통계적 기만’이 횡행한다.
이보다 더한 ‘통계적 충격’이 있다. 퇴학, 휴학 등으로 학업을 중단하거나 아예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않는 초중고생이 30만~40만 명에 이른다. 그 일부는 조기유학을 떠나는 상류층 자녀지만, 대부분은 빈곤층 청소년이다.
‘학교 밖에서’ 서성대는 그들은 이미 각종 범죄에 노출되어 있다. 뒤늦게 마음잡는다 해도 시급 4천~5천 원짜리 아르바이트로 10대와 20대를 버틴다. 그 궤적을 밟아 사실상 영구빈곤의 궤도에 오른 30대가 역시 수십만 명이다. 물론 이들의 정확한 규모를 알려주는 통계는 없다.
숫자는 진실을 말해주지 않는다: 가리워진 빈곤 청년
그런 통계가 있다 해도 숫자는 진실의 모든 것을 말해주지 않는다. 한국의 빈곤율은 약 15~20% 수준이다. 중위소득 50% 이하일 때 ‘빈자’로 분류되는데, 2인 이상 가구 중위소득이 300만원이고 그 절반이 150만원이므로, 한국 인구의 15~20%는 월 150만원 미만을 버는 가정에서 살고 있는 셈이다.
매년 바뀌는 통계 기준으로 인해 들쭉날쭉하긴 하지만, 절대빈곤층으로 분류되는 ‘기초생활수급권자’는 약 150만 명이다. 사실상 기초수급권자이지만, 아들 또는 형제가 어디선가 돈을 번다는 이유로 혜택에서 제외된 ‘기초수급 경계집단’은 약 400만 명이다. 전체 인구 가운데 열의 하나가 근근이 산다. 그런 가족의 구성원인 10~30대가 마냥 푸른 시절을 보내고 있겠는가.
이런 숫자를 보고 ‘소외받고 가난한 청년들이 참으로 많구나’ 생각한다면, 진실의 절반에도 이르지 못한 것이다. 빈곤 관련 통계의 진정한 파장은 따로 있다. 경제적·사회적으로 배척당한 10~30대가 이렇게 많다면, 그들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왜 우리 눈에는 그들이 보이지 않는가?
외국에서 빈곤의 실존은 ‘슬럼’을 통해 입증된다. 슬럼은 수천~수만 명이 모여 사는 빈곤주거지역이다. 슬럼은 범죄, 마약, 질병, 성매매의 소굴이다. 일단 슬럼으로 소문나면, 농촌과 외국에서 떠나온 가난한 이들이 모여들면서 그 몸집을 불린다.
한국에는 미국, 유럽, 남미의 대도시에 현존하는 슬럼이 없다. 슬럼의 초기 모델이었던 ‘달동네’조차 사라졌다. 도시 개발이 이들을 몰아냈다. 60년대 청계천, 80년대 상계동, 90년대 난곡 등을 거치며 빈민촌의 거의 전부를 도시에서 밀어냈다.
이것이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알 수 없으나, 그 효과는 확실하다. 한국인들은 빈곤을 체감하지 못한다. 몇 블럭 건너 범죄와 마약의 소굴이 있는 뉴욕, 런던, 파리의 부유층과 어딜 가도 (겉보기엔 멀쩡한) 연립주택이 들어선 서울의 부유층은 사회경제적 문제를 인지하는 더듬이가 다르다.
빈곤 청년의 거주처: 반지하방, 옥탑방, 고시원
한국에서 가난한 사람들은 투명 인간이다. 그리고 그들의 삶을 지탱하게 해주는 빈곤 노동은 투명 노동이다. 우리는 가난(한 사람)이 없는 것처럼 행동한다. ‘가난이 없다 치고’ 사는 일에 길들여진 것이다. 이것은 태도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의 문제다.
빈자들이 도시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내가 만난 절대 다수의 빈곤 청년은 반지하방, 옥탑방, 고시원 등에 살고 있었다. 연립주택이 들어선 도시 곳곳에 이들이 산다. 200만~500만원의 ‘목돈’이 있으면 반지하방을 구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월세만 내는 고시원에 살아야 한다. (이와 비교해 빈곤 노인은 시골에 주로 산다. 도시에 사는 경우는 쪽방, 찜질방, 고시원 등을 부유한다)
다만 고시원과 반지하방과 옥탑방은 달동네와 다르다. ‘같은 동네 사람’이라는 유대감이 없다. 얇은 벽을 두고 같은 고시원에 살아도 서로 교류하지 않는다. 한국의 빈곤은 더 이상 군집을 이루지 않는다. ‘원자화’된 빈곤의 존재감은 미미하다.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
브라질 월드컵을 앞두고 그 나라의 치안이 불안하다는 지적이 많았다. 실제로 브라질 총기사고 사망률은 세계 최고다. 전시 수준이다. 매년 2억 인구 가운데 3만7천명이 총에 맞아 죽는다. 인구 10만 명당 19명꼴이다. 전쟁 치고도 참혹한 전쟁이다.
그러나 브라질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한국도 월드컵을 치렀는데 뭘.’ 한국에선 매년 인구 10만 명당 31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하루에 43명, 연간 1만5천명이 자살한다. 어느 전쟁이 이보다 참혹한가.
브라질의 총기사고 대부분은 슬럼에서 발생한다. 가난한 자는 가난한 자의 빵을 뺏는다. 혁명은 ‘폭력의 내적 순환’이 단절되면서 시작된다. 왜 우리끼리 빵을 뺏어야 하지? 저 옆 동네 부잣집을 털러 가자. 아니지. 왜 도둑질을 하지? 정당하게 우리 몫을 찾자. 정부를 엎어버리자. 자, 그 총을 같이 들자.
동서고금의 혁명 대부분이 슬럼에서 시작했다는 점을 떠올린다면, 한국은 확실히 빈곤층에 의한 혁명 가능성을 거세했다. 한국의 빈곤층은 슬럼에서 봉기하여 궁전을 장악하는 도적떼가 될 수 없다.
모든 자살을 빈곤과 직결시킬 수는 없지만, 자살은 결국 고립의 결과이고, 고립의 절대다수는 사회경제적 빈곤과 연결돼 있다. 칼을 들어 행인을 찌르는 것과 제 목을 찌르는 것의 차이는 백짓장 한 장보다 얇다. 심리적으로는 물론 물리적으로도 고립된 한국의 빈자는 살인 대신 자살을 택한다. 브라질의 슬럼이 참혹한가, 한국의 지하방이 참혹한가.
공단에서 먹고 자는, 돈 쓸 일이 없는 인생
한국 사회가 달동네만 밀어낸 것은 아니다. 가난한 노동의 공간도 밀어냈다. 그것은 ‘공단’이란 이름으로 수도권 궁벽진 곳에 자리 잡고 있다. 공단에 가면 학업중단 청소년, 전문계고 졸업자, 전문대 졸업자 등을 만날 수 있다.
뒤집어 말해, 공단에 가지 않으면 만날 수 없다. 일삼아 공단에 가서 그들을 만나보는 이가 얼마나 되겠는가. 그들은 공장에서 일하고 먹고 잔다. 이들이 변두리 공단에서 시급 4천원을 감내하는 이유가 있는데, ‘돈 쓸 일은 없고, 오직 일만 하게 하는’ 분위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의 임금으로 감내할 수 있는 소비 규모를 알고 있다. 도심에서 알바하면 도심에서 다 써버린다. 공단에서 일하면 몇 푼이나마 돈을 모을 수 있다. 그들은 스스로 고립되어 지낸다. 옛 청년은 고시 공부를 하려고 스스로를 유배시켰지만, 요즘 청년은 반지하방 보증금을 위해 공단으로 귀양 간다. 그리하여 가난한 노동의 공간조차 우리는 보지 않고 산다.
빈곤 청년을 함께 취재했던 후배 기자가 있다. 그는 안산 공단 난로 공장에서 한 달을 일했다. 그의 가장 큰 불만은 공단을 오가는 버스에 있었다. “너무 오래 기다려야 하고, 항상 만원이고, 정류장은 공장에서 너무 멀다”고 말했다.
샐러리맨을 실어 나르는 도심 버스의 불편함은 어떻게든 언론과 관청에 ‘감지’된다. 그러나 공단 버스 노선에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승객이 많아도 배차 시간은 짧아지지 않고, 정류장 간격이 멀어도 추가하지 않는다. 지하철역이 생기는 일은 절대로 없다. 공단 자체가 중산층의 생활 반경에서 이격된 것이다.
드물지만 도심 한복판에 들어온 가난한 노동 공간이 있긴 하다. 구로 디지털 공단은 서울 도심에 있다. 겉으로 보기에 그것은 번듯한 빌딩의 밀집 지대다. 빈곤을 티내지 않는다. 공단 안에 들어가면 상황이 달라진다. (물론 거기 들어 가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대부분 전자부품을 만드는 소공장이다. 납을 비롯한 각종 화학약품이 가득한 곳에서 환기와 냉난방 시설도 부족한 가운데 20대 청년들이 일하고 있다. 그들이 일하는 모습은 절대로 도시인들에게 보여 지지 않는다. 그들의 폐와 혈관에 축적되는 중금속도 절대로 보여 지지 않는다.
서비스업 종사자: 일상에 융화된 가난
각종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청년들 역시 도심 곳곳에서 우리와 함께 있긴 하다. 그들은 편의점, 대형마트, 커피전문점, 백화점, 주유소 등에서 일한다. 그래도 우리는 그들을 가난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그들은 ‘가난의 표식’을 지니고 있지 않다.
서비스업종에서 일하는 모든 청년 노동자의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유니폼을 입는다. 유니폼은 빈곤을 탈색시킨다. 예부터 귀족은 하인들이 제 옷을 입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불쾌하기 때문이다. 가정부는 주인이 마련해준, 레이스가 달려 보기에 좋은 ‘메이드 드레스’를 입는다. 이제 빈곤 청년은 기업이 마련해준, 화려하여 금세 눈에 띠는 유니폼을 입는다.
우리 곁에서 일하는 빈곤 청년은 자신의 가난을 ‘화장’한다. 화장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들을 곁에 두지 않는다. 아름다운 용모에 짙은 화장을 하고 단정하게 유니폼을 입은 백화점 화장품 매장 직원의 거의 전부는 시급 4천 원짜리 계약직이다.
가난이 사라진 시공간에서 가난한 사람들은 더 이상 가난한 모습을 하고 있지 않다. 70년대엔 빨간 벽돌로 지은 이층집의 골목마다 런닝셔츠 차림으로 연탄을 배달하거나 리어카 행상을 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렇게 입고 다니면 가난한 사람이었다. 뒤집어 말해, 가난은 중산층의 일상 곳곳에서 ‘가시화’됐다. 2000년대엔 실업자도 와이셔츠를 걸친다. 지금 한국에서 가난은 일상에 융해돼버렸다.
이제 가난은 좀체 추출되지 않는다. 우리는 가난이 보이지 않는 시공간에 익숙해져 버렸다.
간혹 가난을 마주쳐도 시선을 돌린다. 가난한 사람을 보지 않고, 그저 통계로 가난을 추상한다. 빈곤 청년은 통계만으로 입증되지 않고, 더구나 체감되지 않는다. 그것은 개별적이고 구체적이다. 그들의 상당수가 가난하다면, 그 가난이 대부분 체감되지 않는다면, 그 효과는 간단하다. 우리는 그들이 누구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부모의 빈곤으로, 낮은 학벌로, 그리고 빈곤으로
빈곤 청년의 생애사를 추적하면 반드시 그들 부모의 빈곤이 있다. 크게 세 부류가 있다. 70·80년대 시골에서 상경했으나 끝내 중산층에 합류하지 못한 경우, 1997년 외환위기를 전후해 임금생활자 대열에서 탈락한 경우, 2000년대 카드대란 이후 사업(주로 자영업)이 망한 경우 등이다.
그들의 자식 세대가 오늘날 청년 빈곤을 대표한다. 이 대목에 이르러 독재-민주 정부의 경계가 사라진다. 그들의 아버지 가운데 일부는 박정희·전두환 때문에 가난해졌고, 또 다른 일부는 김대중·노무현 때문에 가난해졌다. 그들의 아버지는 때로 박정희를 욕하고, 때로 노무현을 욕한다. 그런 아버지 밑에서 자라난 10~30대는 민주 정부를 지지할까, 독재 정부를 그리워할까. 아무 의미 없는 질문이다.
지방으로 내려가면, 청년의 일자리는 대기업 공장에서 비롯한다. 현대·삼성·LG·SK·포스코 등 재벌이 운영하는 각종 제조업 공장들이다. 그런데 이들 공장에선 90년대 후반 이후, 사실상 정규직을 추가로 채용하지 않았다. 대신 사내하청 방식의 용역을 통해 비정규직만 채용했다. 지역 경제를 쥐락펴락하는 조선소와 제철소와 자동차 공장에 가보면, 정규직은 40대 이상이고 30대 이하는 모두 비정규직이다.
그래서 청년의 대학과 청년의 일자리는 다음의 쌍을 이룬다. 서울 소재 유명대학을 졸업한 소수는 이들 대기업의 사무직에 취업한다. 나머지 중위권 이하 또는 지방대를 졸업하면, 대기업의 하청업체에서 사무직 또는 관리직으로 일한다. 전문대 졸업자는 그 하청업체의 비정규직이 될 것이다. 그보다 못한 학력이라면, 대기업과 하청기업 노동자들을 상대하는 각종 서비스업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할 것이다.
이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오직 위만 본다. 그 아래로 뻗어가는 먹이사슬에는 별 신경 쓰지 않는다. 진보정당과 민주노총은 노동의 먹이사슬 구조 가운데 최상층에 기초해왔다. 그 사슬 아래에서 버둥거리는 빈곤 청년 대부분에게 민주노총과 진보정당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한 청년의 이야기
내가 만난 어느 스물두 살 청년이 있다. 그의 아버지는 수억 원짜리 주상복합 아파트에 살 정도로 부유층이었으나, 외환위기가 터지면서 사업이 망하여 집을 통째로 날렸다. 남은 돈으로 맥주집을 차렸으나 카드 대란으로 망해버렸고, 지금은 구청이 제공하는 자활근로로 근근이 먹고 산다.
그런 아버지를 둔 스물두 살 청년은 대학 진학의 꿈을 접은 대신 고등학교 때 만난 여자 친구와 결혼해 아이를 낳았다. (결혼과 출산의 순서가 반대였다고 쓰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이제 부부는 도너츠 매장에서 일하며 돈을 번다.
아침 7시, 젊은 엄마가 먼저 출근한다. 아침 9시, 젊은 아빠는 세 살과 두 살짜리 아들을 어린이집에 보낸 뒤 같은 매장으로 일 나간다. 오후 5시, 퇴근길에 젊은 엄마가 아이를 찾아온다. 저녁 11시, 젊은 아빠는 매장 문을 닫고 퇴근한다. 엄마와 아이는 이미 잠들어 있다. 아이가 보채어 잠을 설치게 되면 젊은 부부는 짜증을 섞어 싸움을 시작한다. 주말에도 매장은 문을 닫지 않고, 부부는 각자의 피곤을 어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그렇게 일하여 두 사람은 월 200만원을 번다. 그래서 일체의 복지혜택에서 제외된다. 보증금 200만원에 월 20만 원을 주고 지하 단칸방에 살고 있다. 단칸방 앞에 화장실, 주방, 세탁실을 겸하는 1평의 공간이 있는데, 어차피 식구가 모여 밥 먹는 일은 희귀하다. 그나마 지금은 사정이 좋은 편이다. 둘째 아이를 낳고 일주일 만에 마땅한 거처도 없이 거리로 나앉았다. 찜질방에서 갓난아이를 포함한 네 식구가 한 달을 지냈다.
나를 처음 만났을 때, 도너츠 매장에서 일하는 젊은 아빠는 맥도널드 매장에서 아이들의 아침을 해결하고 있었다. 으깬 감자를 먹으며 콧물 흘리는 두 아이를 두 팔에 안고 그는 나에게 말했다. “다른 건 모르겠고, 잠을 좀 잤으면 좋겠어요.”
그가 더 나은 직업을 갖고, 더 나은 집에서 살려면, 교육을 더 받아야 한다. 그러나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부유층과 중산층의 자식은 대학원 진학, 공무원 시험, 대기업 취업 등을 위해 2~5년씩 틀어박혀 미래를 준비할 수 있지만, 이들에겐 당장 오늘이 문제다. 오늘의 문제를 누군가 해결해주지 않는 한, 스물두 살짜리 도너츠 매장 직원에게 검정고시, 방송통신대, 직업교육, 그리고 노동운동과 정치행동은 모두 말장난에 불과하다.
대를 이어나가는 가난과 빈곤의 악순환
가난한 집에서 자란 청년은 고등학교 진학 무렵부터 가계 부양의 압박을 느낀다. 부모가 이혼했거나 실직자이거나 알코올 중독 상태이거나 질병을 앓고 있으므로, 자식들은 용돈을 마련하기 위해 돈을 벌어야 한다.
중학교 때부터 여러 종류의 아르바이트를 경험한 그들은 고교 졸업(또는 학업중단)과 동시에 또 다른 비정규직을 얻어 일하는 것에 아무런 저항감과 반발심을 느끼지 않는다. 그것 말고 무슨 선택이 가능하겠는가. 그들에겐 정말이지 미래를 위해 투자할 단 1년의 여유가 없다.
더 중대한 사태가 진행중이다. 이들이 속속 결혼하고 있다. 가난하면 불안해지고, 불안하면 자존감이 사라지고, 자존감이 없으면 사태를 강압·폭력으로 해결하려 든다. 폭력과 결손의 가정이 생겨나는 대부분의 원인은 빈곤에 있다.
그런 부모 아래서 자란 아이들은 배신감과 고립감에 휩싸인다. 자신을 존중해줄 누군가가 간절한데, 학교에는 그런 사람이 없다. 사랑에 굶주린 아이들은 거리에서 만난 이성에게 빠져들어 몰두한다. 그들은 중산층의 또래보다 더 빨리 더 깊이 더 대담하게 사랑한다.
이들은 곧잘 20대 초반에 동거를 시작한다. 젊음의 호르몬은 계획에 없던 자녀의 탄생으로 이어진다. 이들의 아이는 그 조부모 또는 부모와 완전히 다르다. 아이들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한때 중산층이었거나 적어도 안정적 임금 생활자였다. 아이들의 젊은 아버지와 어머니는 적어도 그들의 부모가 한때 그랬던 것처럼 안정적 생활기반을 꿈꾼다.
그러나 그들의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조부모와 부모의 가난을 목도한다. 아이들의 주변에는 ‘역할 모델’을 할 수 있는 이가 아무도 없다. 아이들의 유전자에는 중산층에 대한 동경과 희망이 아예 없다.
그러니까 1997년 외환위기를 전후해 빈곤층으로 전락한 40~50대가 이제 환갑을 넘겼고, 그 아이들은 20~30대가 됐고, 그들이 다시 자녀를 낳고 있는 것이다.
이들의 일생을 지배하는 것은 계급 분리가 고착화된 ‘1997년 체제’인데, 이들 가족에서 자라나는 어린 아이들은 ‘완전한 빈곤의 세대’를 대표하게 될 것이다. 현재 7살 미만의 (가난한) 미취학 아이들은 5~10년 뒤 정규 교육 과정에 진입한다. 그 무렵이 되면, 빈곤 청년을 넘어 빈곤 아동의 문제가 폭발하지 않을까, 나는 두렵다.
취업도, 자영업도 불가능한 누군가
고립된 빈곤 청년을 만나보면, 그들의 공통점을 발견하게 된다. 이들이 공유하는 관념 또는 정서가 있다. 그들은 하나같이 ‘가게를 차려 장사하는 꿈’을 꾼다. 빵가게, 호프집, 치킨집 등이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임금생활자가 되는 길을 가능성에서 제외한다. 대신 소규모 자영업자가 되는 꿈을 꾼다.
그것은 불가능한 꿈이다. 각종 자영업의 기반은 서비스업의 대형화와 함께 붕괴했다. 그들이 일하는 대형마트와 프랜차이즈가 동네 작은 가게를 모두 망하게 했다. 그들이 작은 가게에서 돈을 벌려면 대형마트가 망해야 한다. 그런데 마트와 편의점과 커피전문점이 망하면 그들은 당장 오늘을 먹고 살 돈을 벌지 못한다. 그들의 꿈은 뫼비우스의 띠에 올라 있다.
이들은 종종 “끈기가 없다”는 말을 듣는다. 실제로 그들은 정시에 출근하지 않거나, 너무 쉽게 일을 그만둔다. 성실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것은 반쪽짜리다. 그들로선 성실해야할 이유를 찾을 수가 없다. 어딜 가든 그들은 월급 80만~130만원을 번다.
마트·백화점 등에서 판촉 영업을 하는 스물네 살 여성을 만난 적이 있다. 그는 고등학교만 졸업했다. “전문대를 나와 사무실에 취직해도 커피·복사 심부름하면서 120만원을 받는다”고 그는 말했다. 학력을 높여봐야 소용없다는 것이다.
서울 소재 유명대학을 졸업할 수 있는 게 아니라면, 그들의 월급은 매양 그 수준이다. 착실히 공부하여 착실히 대학을 졸업한 뒤, 착실히 직장생활을 해야 하는 이유를 그는 아직 찾지 못했다. 그들은 거리를 헤매는 히치하이커처럼 걸리는 대로 아무 직업이나 갈아탄다.
그들이 정치에 관심을 갖지 않는 이유
그 모든 일을 바꾸는 힘이 정치에 있다는 것을 그들은 믿지 않는다. 이들은 투표를 하지 않는다. 투표일에도 일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들이 일하는 사내하청업체, 공단내 소공장, 백화점, 대형마트 등은 투표일에 쉬지 않는다.
투표일에 이들 업체가 모두 쉰다 해도 그들은 부족한 잠을 자게 될 가능성이 크지만, 어쨌건 그들은 일체의 정치·사회적 ‘의사표현’에 무관심했다. 정부에 대한 불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정당 전체에 무심했다. 언론 또는 노조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었다. 그들의 인생을 통틀어 정부·정당·노조·언론이 버팀목이 됐던 기억을 갖고 있지 않았다.
대신 이들은 ‘힘 있는 사람’을 믿는다. 세상을 향해 제 의지를 관철하는 다른 인물을 일찍이 접한 적이 없으므로, 이들이 믿고 따르는 ‘힘 있는 사람’은 자신이 일하는 업체의 사장이다. “우리 사장님은 그래도 착한 분”이라는 말을 취재 과정에서 수도 없이 들었다.
자연스레 ‘사장님’의 철학과 신념까지 그대로 수용하는데, 대표적인 것이 ‘경기 부양’ 신화다. 빈곤 청년은 신문 따위 읽을 생각도 시간도 없다. 이들이 보수화되는 것은 <조선일보> 탓이 아니다. 월급 80만~130만원을 받으려면 가게에 손님이 많아야 되고, 손님이 많아지는 것은 경기가 좋을 때라는 말을 이들은 사장으로부터 매일 듣는다. (물론 사장은 그런 신념체계를 <조선일보>에서 배운다)
그들의 생애와 생활을 들여다보면, 그들이 보수 정당에게 몰표를 주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보수 정당은 “경제를 살리겠다”고 공약한다. 선거운동원들은 “경기가 좋아질 것”이라고 그 말을 번역한다. 진보 정당은 “복지를 강화하겠다”고 공약한다. 선거 운동원들은 “공평한 세상이 될 것”이라고 그 말을 번역한다.
가난한 사람들은 복지와 공평에 대해선 아는 바도 겪은 바도 없다. 경기가 좋아지는 게 무엇인지만 안다. 빈곤 청년은 자신에게 떡고물을 나눠줄 힘 있는 자를 인정하고 수용한다. 그들이 큰 떡을 다 먹는다고 비난하지 않는다. 월급 100만원을 확실히 보장받을 수 있다면, 사장이 한 달에 수억 원을 번다해도 상관없다. 떡고물을 준다는 데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빈곤 청년의 기억: 복지는 없고 일자리만 사라졌다
아마 사회보장 또는 복지에 대한 믿음이 있다면 상황이 달라질 것이다. 국민연금·기초생활보장·국민의료보험·노령연금보험·보육비보조 등 거의 대부분의 복지 제도는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기에 도입됐거나 완성됐다.
그러나 빈곤 청년의 절대 다수는 이들 정부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거의 없다. 그런 정도의 보장제도로는 간에 기별도 가지 않을만큼 일상을 유지하는 비용이 엄청나게 늘어났기 때문이다.
100만원의 기초생활보장이 아니라, 200만 원짜리 일자리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빈자들은 생각한다.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일자리가 없어진 것은 민주 정부 시절의 일이다. 이들에겐 복지가 늘어난 기억은 없고, 일자리가 줄어든 기억만 남아 있다. 이 대목에 이르러 민주정부 시기 복지 제도의 확장은 자취 없이 사라진다. 복지 정치의 연대가 구축될만한 기초도 사라진다. 복지에 대한 기억이 없으니 복지를 지지할 까닭이 없다.
복지의 허울
홀어머니를 모시고 영구임대아파트에 사는 30대 초반의 청년을 만난 적이 있다. 그는 전문대를 졸업했다. 그러나 취직은 어려웠다. 그가 얻을 수 있는 최선의 일자리는 휴대폰 매장의 비정규직 영업직이었다.
그의 어머니에겐 정신지체 장애가 있다. 어머니를 혼자 집에 둘 수가 없다. 곧잘 밖으로 나가 길을 잃어버린다. 간병인을 구하려면 한 달에 80만원을 줘야 한다. 그런데 그가 얻을 수 있는 최선의 일자리는 월급 100만원 안팎의 일이었다.
그는 집에서 어머니를 돌보며 돈 벌 수 있는 ‘재택 노동’을 궁리했다. 인터넷으로 주식투자를 했다. 200만원을 날렸다. 그 돈을 갚을 길이 없어 신용불량자가 됐고, 이후 취직은 더 어려워졌다. 소식 끊긴지 오래된 형님이 어디선가 돈을 벌고 있다는 이유로 기초생활수급권도 인정받지 못한다.
너무 딱하여 나까지 갑갑해졌다. “그렇다고 노인 장애인에 대한 혜택이 전혀 없겠어요?” 그 물음에 그는 옛 동사무소, 오늘의 주민센터에서 받아온 ‘복지 알림장’을 보여줬다. 간병인을 소개해주지만, 비용은 스스로 부담해야 한다. 자동차 기름 값을 지원해주지만, 그 자동차는 직접 사야 한다. “이런 게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주민센터 담당 공무원은 어차피 할 일이 태산이어서 기초생활수급 신청 서류를 결재하기도 벅차다. 그가 찾아가 이것저것 상담한들 귀찮아 할 뿐이다. 주민센터 직원의 인성 탓이 아니라, 어떤 규정과 제도를 들여다봐도 나라가 도와줄 방도가 없기 때문이다.
이들 모자가 사는 아파트에 빈곤층을 위한 복지관이 따로 있긴 하다. 같은 영구임대아파트 단지인데도 1단지는 기독교 계통, 2단지는 불교 계통의 재단법인이 복지관을 운영하고 있다. 재단에 따라 복지사의 근무환경이 다르고 이들이 제공하는 복지서비스의 질도 다르다.
홀어머니와 함께 사는 30대 초반 청년은 이들 복지관에 찾아가 상담한 적이 없다. 그 복지관에서 직접 찾아와 상담을 제안한 적도 없다. 이들 복지관 재정은 지자체에서 대고 있다. 복지관은 그 재정 규모에 맞춰 독거노인 무료급식 등 ‘실적’이 분명하고 일처리가 명쾌한 분야에 주력한다.
그 모자에게 민주정부 시기 이룩한 복지 제도는 허울이다. 복지는 법률에서 존재하지만, 전달 과정에서 희미해졌고, 현실에선 존재하지 않는다. 복지 정치는 전달의 마지막 단계에서 민간의 ‘자율’ 또는 ‘방치’에 의해 무력화된다.
자기 탓을 하며 경쟁 논리를 받아들이는 청년들
그래도 빈곤 청년들은 ‘탓’을 하지 않는다. 정부·정당·노조·언론에 기대를 걸지 않는 동시에 그들에게 제 인생을 책임지라고 요구할 생각이 없다. 부모 사업이 망해버렸으니, 학교 다닐 때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으니, 좋은 학교를 졸업하지 않았으니, “어쩔 수 없다”고만 말했다.
고교 졸업 뒤 낮에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밤에는 졸린 눈을 부비며 공부하여 전문대를 졸업했지만, 여전히 대형마트에서 계약직으로 일하는 스물여섯 살 점원의 말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세상은 공평한 거 같아요. 저는 공부를 못했거든요. 그래서 이렇게 된 거죠.”
빈곤 청년들은 ‘경쟁’을 내면화하고 있다.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는 열성은 없지만, 경쟁에서 낙오했으니 어쩔 수 없다는 열패감을 자연스레 수용한다. 그들의 열패감 또는 무력감을 기성세대가 탓하는 것은 적반하장이다. 그들을 그렇게 만든 것은 이른바 ‘386세대’ 또는 ‘민주세력’이다.
‘산업역군’이라는 정치적 호명조차 없던 민주정부
한국 공교육의 큰 틀이 바뀐 것은 김영삼 정부 때다. 그 전까지 아이들은 ‘국민교육헌장’을 외웠다. 인생의 목표가 나라와 민족의 영광을 위해 헌신하고 충성하는 데 있다고 배웠다. 나의 인생은 ‘우리’와 관련될 것일 때 비로소 가치를 얻는다고 배웠다.
그래서 80년대까지 최고의 대학은 법대였고, 아이들의 장래 희망은 정치인 또는 법조인이었다. 원론적으로 법과 정치는 공공의 가치를 다룬다. ‘우리’에 대해 고민하는 학문이다. 군사독재가 주도하는 국가주의에 오염된 것이긴 했지만, 과거의 우리는 공동체에 대한 관념이 있었다. 여공들조차 ‘나라를 위해 일하는 노동의 가치’를 믿었다.
민주화 이후, 민주세력은 교육의 틀을 완전히 바꿨다. 1992년부터 시작된 교과과정 개편은 1997년 무렵 완성됐다. 그 결과 탄생한 현재의 교육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인생의 목표는 세계화 시대에 살아남을 수 있는 각자의 경쟁력을 기르는 데 있다고 가르친다. 여기서 ‘우리’의 자리는 사라져 버렸다.
90년대 이후 최고의 대학은 경영대가 차지했고, 아이들의 장래 희망은 펀드 매니저가 됐다 (가난한 어른들의 꿈조차 로또 당첨이다). 그 학문을 폄훼할 생각은 없지만, 경영학은 ‘보다 효율적으로 남을 부려먹는 방법’을 배우는 공부다. 그것을 공부하여 얻게 되는 최상의 직장인 주식, 금융, 은행 또한 근본적으로 도박과 관련돼 있다. 큰돈을 가진 사람이 더 많은 돈을 번다.
그리하여 현재의 우리는 공동체에 대한 관념을 교육 과정에서부터 거세한다. 비록 열악한 노동현장을 은폐하는 이데올로기에 불과했지만, 군사정권은 노동자를 ‘산업역군’이라 불렀다.
민주화 이후 어느 정권도 각별한 의미를 담아 가난한 노동자를 ‘호명’하지 않았다. 과거의 가난한 노동자였던 빈곤 노인층이 김대중 또는 노무현 대신 박정희와 전두환을 추억하는 것은 그다지 이상할 것이 없다. 그들에게 다가와 그 삶의 의미를 불러준 ‘정치적 호명’은 군사정권 시절의 일이었다.
복지는 공동체를 전제하지 않으면 성립 불가능한 개념이다. 공동체의 관념이 있어야 비로소 빈곤은 ‘우리 모두’의 문제가 된다. 오늘날의 빈곤 청년들은 복지를 기대하거나 요구할 논리적·정서적 근거를 갖고 있지 않다. 그것이 그들의 잘못이겠는가.
그들에게 더 나은 ‘물질적 풍요’를 약속할 수 없다면, 이들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사회적 호명’이라도 필요하다. 사회적 호명은 공동체의 복원에서 시작한다. 공동체를 새롭게 정의하는 데서 출발한다. 그들의 삶이 충분히 의미가 있다고 누군가 도닥여주어야 한다. 혜택을 주지 못하면, 의미라도 제공해야 한다. 국가주의, 군사주의의 껍질은 벗기되, 새로운 민주적 공동체의 의미를 담아 그들의 가난한 삶을 우리 모두가 가슴 아파하고 있다고 누군가는 말해야 한다.
중산층 청년들의 공포와 가망 없는 저항: 노량진의 풍경
그래야 하는 또 다른 이유를 7·9급 공무원 시험 학원이 밀집한 노량진에 가보면 알 수 있다. 그 곳에 밀집한 한국의 중산층 청년들은 빈곤층으로 추락할 것이라는 공포에 맞서 가망 없는 저항을 벌이고 있다.
오늘날 중위권 대학 이상 4년제 대학생의 꿈은 공무원이 되는 것이다. 일련의 시험 과목 강의를 학원에서 모두 들으려면 적어도 1년이 걸린다. 대부분은 이 과정을 1년 더 반복하여 2년 동안 학원을 다닌다. 수업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이어진다. 공강 시간에는 근처 독서실에서 공부하고, 잠은 고시원에서 잔다.
이 기간 동안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국 1~3년 동안 부모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학원비·생활비 등을 더해 한 달에 적어도 50만원이 필요하고, 고시원에서 생활한다면 여기에 30만원을 더 보태야 한다.
이런 후원이 가능한 것은 오직 중산층이다. 중산층 자녀가 아니라면 공무원 시험을 준비할 수 없다. (따라서 중산층 이상 부유층이라면 3~5년이 걸리는 사법·행정고시를 준비할 수 있다. 뒤집어 말해 부유층 자녀가 아니면 고급 공무원의 꿈을 꾸지 못한다)
중산층에서 태어난 이들은 대기업조차 안전한 일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대기업을 다닌 그들의 부모가 온 몸으로 그렇게 증언해왔기 때문이다. 이미 회사에서 밀려났거나 곧 밀려날 처지인 그들의 부모가 갖고 있는 마지막 자산은 자신의 청춘을 바쳐 마련한 중소형 아파트 또는 그 아파트로 빌린 은행 빚이다. 그 ‘자산 가치’가 아직 남아 있는 동안, 어떻게든 자식을 (회사원이 아닌) 공무원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그들의 부모는 직감하고 있다.
아이들은 중산층 부모의 두려움을 성장과정에서 똑똑히 지켜보았다. 자칫하면 중산층의 안정적 생활기반이 부모 세대에서 끝날 것임을 그들은 알고 있다. 그들이 공무원이 되려는 것은 ‘공공’에 대한 열정이 아니라, ‘개인’에 대한 공포다. 그런데 공무원 시험의 경쟁률은 말 그대로 100대 1이다. 99명은 공무원이 되지 못한다.
한국 중산층 청년의 미래를 보려면, 노량진에 가면 된다. 빈곤은 소수가 아닌 다수 청년의 문제다.
복지의 시작은 소통으로
정치는 소통이다. 무릇 정당이라면 이들 청년 세대와 교감하고 싶을 것이다. 기자인 나는 그런 방법까진 모르겠다. 다만 그들을 취재할 때, 질문부터 하지는 않았다. 가능하면 오랜 시간 동안, 함께 밥 먹고 일하고 어울렸다. 세상이 남긴 상처 때문에 그들에겐 수많은 가시와 방패가 있는데, 그걸 스스로 거둬들일 때까지 섞이고 스미려 애썼다. 대화는 그 다음에야 가능했다.
놀랍게도 그들은 대화 자체만으로 즐거워했다. 비록 나의 기사는 그들의 삶에 거의 도움이 되지 못했지만, 그들은 함께 일하며 밥 먹는 기자를 좋아해주었다. 그들은 인격과 인격으로 만나는 일을 진정으로 반겼다.
경기부양의 신화가 (사장이라는) 인격을 통해 전파된다면, 사회보장의 신화 또한 (복지사라는) 인격을 통해 확산될 수 있다. 복지 정치를 하겠다면, ‘엄청나게 더 많은 복지’를 ‘개별적이고 인격적으로’ 실현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초중등 교육과정, 취업과정, 실직위기 등의 국면마다 누군가 등장해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복지 상담을 해줘야, 그들이 복지 정치의 실체를 알게 될 것이다. 그래야 복지의 ‘수혜자’ 집단이 형성되어, 그들이 복지 정치의 ‘적극 지지자’가 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지금 정치에 필요한 것은 통계로 분석하고 문자로 선언하는 일이 아니라, 현장에 스며드는 일이 아닐까 한다. 그들이 정치적으로 두려워하는 이는 대통령이 아니라 주민센터 직원이고, 도움을 청하는 곳은 정당이 아니라 복지관이며, 진심으로 신뢰하는 이념은 언론이 아니라 사장에게서 비롯한다. 주민센터 직원, 복지사, 사장의 자리에 정치인이 가면 된다. 복지정치의 스타트 라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