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초부터 왜 갑자기 ‘이승만’인가 했다.
이승만에 대한 긍정적인 재평가를 주도하고 있는 인사가 국사편찬위원장으로 발탁되었지만, 박근혜 정부에서는 이승만을 두 팔 벌려 찬양하기가 쉽지 않았다. 박정희의 군사정권이 자신들의 쿠테타를 정당화하기 위해 <한국군사혁명사>를 편찬하면서 이승만 정권의 무능과 부정부패를 지탄했기 때문이다. 비록 4.19 혁명이 일어나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렸지만 미완성의 혁명이었기에 군부 자신들이 들고 일어나 혁명을 완수했다고 설명했다.
이승만 정부의 무능과 부정부패를 극심하게 그리면 그릴수록 쿠테타의 정당성을 더더욱 확보할 수 있었다. 요컨대 이승만과 박정희는 제로섬 관계였기에 박정희의 후광으로 집권한 이 정부가 이승만을 대대적으로 칭송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그런데 이 시점에 뜬금없이 웬 이승만 재평가인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찾아봤다. <ㅍㅍㅅㅅ>에 오른 햄벨스 님의 글은 애초에 자신의 페북에 자신의 역사 지식을 대중들에게 알리겠다며 썼던 것이었다. 자칭 ‘역덕’이라는 이가 새해를 맞이해서 식민지, 이승만, 박정희 등의 주제 중 하나를 물으면 답해주겠다며 올린 글을 <ㅍㅍㅅㅅ>가 받아서 게재한 것이다.
햄벨스 님의 글은 이승만에 대한 진보진영의 역사인식을 교정하기 위해 이승만의 업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바를 짚어보려던 것이었다. 그러나 <ㅍㅍㅅㅅ>를 통해 공식적으로 발표되자 글의 뉘앙스가 많이 달라졌다. 같은 글이지만 페북에 새해맞이 역사지식 소개 정도로 썼을 때와 인터넷 이슈 매거진에 공식적으로 게재했을 때 읽히는 방식은 확연히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이하 존칭 생략)
역덕을 위한 제안 1 : 막대구부리기를 넘어 근대성 비판으로
햄벨스는 진보진영이 덮어놓고 이승만을 비난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한다.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했던 <백년전쟁> 같은 자료를 생각해보면 그러한 우려에 공감할 수 있다. <백년전쟁>과 같은 자료들은 한국의 근현대사를 ‘협력자’와 ‘저항자’ 사이의 투쟁으로 축소시켜버리기 때문이다.
물론 제국주의에 협력해서 제국의 과실을 따먹고, 식민지 경험을 오히려 자신들의 시초축적 계기로 삼은 이들이 아직까지 호가호위하며 살고 있기도 하다. 반면에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를 주장하면서 식민정권을 상대로 싸웠던 운동가들의 자손들은 어려운 형편을 이어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협력과 저항의 이분법으로는 식민주의를 제대로 성찰할 수 없다. 식민지 조선의 대표적인 인권변호사였던 허헌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그는 어떻게 식민지의 인권변호사가 될 수 있었을까?
그의 인권의식이나 변론 능력과 동시에 판사가 그의 변론을 듣고 조선인 운동가들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던 형법 체제도 고려해야 한다. 도면회 선생은 일본의 식민주의가 근대적 형법체제라는 무기로 조선에 대해 문명의 우월함을 주장할 수 있었다고 분석했다.
식민주의자들은 형법체제의 근대성을 내세워 자신들이 식민지민들을 계도하고 훈육해서 문명으로 이끌어야 할 역할을 맡을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그들이 내세웠던 근대의 문명은 군주통치의 자의성을 법적 논리라는 합리성으로 대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식민주의자들은 식민지민들이 문명의 온전한 혜택을 입기에는 ‘민도(民度)’가 떨어지는 족속이라고 선을 그었다. 그러면서 식민자들이 식민지민들을 계도하고 훈육할 역할을 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에 따라 식민주의자들이 식민지 조선에서 운용한 형사재판은 근대적 합리성과 태형 같은 전근대성이 섞여있었다. 이처럼 식민지배의 합리성과 폭력성이 동전의 양면처럼 결합하고 있었기 때문에 허헌과 같은 이가 재판을 통해 식민자들과 싸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햄벨스가 진보진영의 역사인식을 교정하고자 할 때 이 정도의 정황을 설명하는 데에서 멈추는 것이 문제다. ‘진보진영은 여지껏 식민지배의 합리성을 인정하지 않았다!’라고 말하고 마는 것이다.
편향을 바로잡기 위한 ‘막대 구부리기’시도하고 있다고 이해해볼 수도 있다. 하지만 햄벨스의 글을 읽다가 보면 왠지 모르게 뉴라이트처럼 느껴진다는 생각을 떨쳐내기도 어렵다. 기존의 역사인식을 교정하기 위해 일부러 반대 사실을 강조해버리고 말면서, 정작 문제화해야 할 것을 놓쳐버리기 때문이다. 식민지배의 다면성을 강조하기만 하고 식민지배를 움직이는 가장 중요한 요소인 ‘근대성’을 문제 삼지 못하니 이러한 문제가 생긴다.
예컨대 나치 독일 시절 유대인 정책에 대한 일상사적 연구를 수행한 이안 커쇼가 나치 지배에 대해 문제제기하는 방식을 참조해볼 수 있다. 커쇼가 나치 독일 시기의 일상을 연구하면서 유대인들에 대한 인종 학살을 가능케 했던 요소로 발견한 것이 바로 유대인 문제에 대한 독일인들의 ‘무관심’이었다. 악명 높은 홀로코스트가 예상과는 다르게 열광적인 증오와 혐오보다는 무관심 위에서 벌어진 폭력이었다는 것이다.
당시의 독일인들은 유대인에 대한 방화, 폭행 등의 폭력이 불법적으로 벌어지면 규탄했다. 그러나 유대인을 공공연히 차별하는 뉘른베르크법이 제정되고 여기에 입각한 폭력이 행해지자 독일인들은 비로소 폭력을 지지했다. 그래서 커쇼는 “아우슈비츠로 가는 길은 증오로 건설되었지만, 무관심으로 포장되었다.”라고 결론지었다. 법의 근대성에 대한 강력한 믿음이 식민지배와 인종학살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에서 헌법재판소를 통해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이 나자 ‘종북’ 몰이가 대중적인 힘을 받는 현실을 성찰하기 위해서 근대적 사법체제에 대한 문제제기가 필요하지 않을까?
역덕을 위한 제안 2 : 인물을 넘어 사건과 관계로
햄벨스가 이승만에 대한 진보진영의 역사인식을 교정하겠다고 나설 때 넘지 못하는 또 하나의 문제가 바로 인물에 대한 집착이다. 이승만을 국부로 세우겠다는 뉴라이트 세력이나 그들을 비판하기 위해 이승만의 치부를 드러내겠다는 <백년전쟁> 같은 비판물들이 역설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부분도 이승만에 대한 집착이다.
그러나 특정 인물만을 역사연구의 대상으로 삼기는 곤란하다. 대통령중심제 국가이기에 대통령이 당대 사회를 모두 움직였을 것처럼 보이곤 하지만 현실이 작동하는 방식은 그보다 훨씬 복잡하다.
어떤 시대를 움직이는 것이 구조냐 주체냐를 묻는 논쟁은 오래 전부터 이어져왔다. 그러나 모든 문제를 계급 구조의 법칙이나 개별 주체의 의지 문제로 환원해서는 당대를 파악하기가 어렵다.
이러한 문제 때문에 최근에는 사건사가 대안으로 제시된다. 사건을 강조하는 이유는 어느 시기의 사회적인 현상에서 행위자의 판단과 장기적으로 지속되는 구조의 문제, 그리고 무엇으로 환원하기 어려운 삶의 우연성과 독특성의 문제를 모두 시야에 넣기 위해서이다. 이 과정에서 역사적 맥락과 여러 행위자들이 맺는 관계가 매우 중요한 문제로 부각된다.
사건사의 관점에서 햄벨스의 역사인식 ‘교정’을 분석해보자. 햄벨스는 이승만의 업적으로 민족사회주의, 교육율 증가, 농지개혁, 민주주의적 선거 정착 등을 제시했다. (‘개신교 국가화’는 다소 뜬금없는데, 이승만이 ‘미국화’를 지향했다고 강조하기 위해 끼워 넣은 것 같다.)
우선, 민족사회주의를 지향했다는 대목을 살펴보자. 제헌헌법에 나타난 사회민주주의적 요소를 이승만의 업적으로 이야기하기는 곤란하다. 제헌헌법은 제헌국회에서 헌법기초위원회를 구성하여 만들었기에 이승만 정권의 업적이라고 말한다면 삼권분립에 어긋나는 말이 된다.
정부수립이 제헌일보다 느리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또한 굳이 어느 인물의 업적으로 이야기하려면 이승만이 아니라 헌법기초자인 유진오의 업적이라고 말하는 편이 더 적절하지 않을까?
사실 햄벨스의 이승만론은 근거로 인용하는 선행연구들의 입장과 매우 큰 모순을 보인다. 햄벨스가 제헌헌법의 사회주의적이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고 인용하고 있는 박명림의 경우 제헌헌법이 ‘사회적 시장경제체제’를 지향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1953년 8월 미대표단의 방한을 계기로 시장경제체제적 헌법 개정이 이루어졌다고 분석했다는 점이다.
게다가 박명림은 이승만의 업적을 운운하는 햄벨스의 주장과 정반대로 한국의 국민국가 형성에서 초국적 조건과 관계를 통해 분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남북 간의 체제경쟁을 고려하기 위한 ‘대쌍관계동학’과 냉전체제에서 좌파 공산체제와 우파 파시스트체제라는 양쪽의 한계선을 설정한 ‘미국의 범위’를 고려하자고 제안했다.
박명림은 이러한 관점에서 해방 직후 좌파와의 헤게모니 투쟁과 미국의 현실 판단이 제헌국회의 사회적 시장경제체제 성격을 창출했다고 분석했다. 반면 한국전쟁 직후에 국내 정치구도와 미국과의 관계 등이 변하면서 헌법의 개정도 이루어진 것으로 설명했다. 이처럼 박명림이 강조하고 있는 것이 ‘관계망’이다. 이는 이승만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파악할 수 없는 맥락들이 있음을 의미한다.
햄벨스의 이승만론은 교육율 증가와 농지개혁의 문제에서도 맥락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우선, 1950년대 초등교육이 급속하게 팽창했으나 이를 이승만의 업적으로 환원하기는 어렵다.
이 시기의 초등교육 팽창을 연구한 김기석과 강일국은 정부의 정책의지보다도 학부모의 재정 부담에서 그 원인을 찾고 있다. 먹고 살 길이 막막했던 당시에 대중들은 교육을 유일한 신분상승의 길로 여겼다. 적어도 매뉴얼은 해독할 수 있을 기초 노동자들을 양산하려던 정부는 높은 교육열에 편승했지만 학부모들에게 부담을 떠넘겼다.
초등교육은 의무교육이었음에도 학부모들은 사친회비의 형식으로 학교 운영비를 책임져야만 했다. 사정이 이렇기에 중장년의 구술생애사에서 ‘사친회비를 내지 못해서 학교를 다니지 못했다’는 언급이 나오곤 한다. 또한 일선 현장교사들을 중심으로 미국식 자유주의 교육을 시행하려는 새교육운동도 일어났지만, 한국전쟁 이후 반공국가주의를 강조했던 이승만 정부에 의해 좌절되기도 했다.
교육문제는 농지개혁의 성과와도 연결된다. 햄벨스는 김일영을 인용하여 농지개혁을 둘러싼 신화를 해체할 것을 주문한다. 햄벨스의 주장처럼 이승만 정권기의 농지개혁이 한국의 자본주의 발달과 교육수준 증가에 큰 영향을 주었다는 것은 최근 학계의 정설로 굳어가고 있다.
그러나 농지개혁을 앞두고 자신의 자산을 지키고자 했던 지주들은 교육재단을 창립하거나 토지를 기부할 수 있었다. 이는 현재의 한국 교육계에서 사학(私學) 재단의 여러 문제들을 만든 원인이 되기도 했다.
또한 농지개혁이 자작농 창출에는 성공적이었지만 한계 또한 명확했다. 김동노는 농지개혁 직후부터 1정보 이하의 영세 빈농이 전체의 77%였다고 분석했다. 1950년대 후반으로 가면 정부의 정책 실패와 미국 잉여농산물 유입으로 소작농이 증가하는 추세를 보이기도 했다.
장상환은 이러한 문제 때문에 1950년대 중반에는 머슴의 숫자가 다시 늘어나기까지 한다고 비판했다. 햄벨스가 “농지개혁의 결과로 농민들은 민주주의에 적응할 수 있는 시민으로 탈바꿈”했다고 단언할 때 이러한 빈농들과 머슴들의 존재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만다.
마지막으로 민주주의적 선거를 정착시켰다는 평가를 살펴보자. 햄벨스의 설명과 달리 이승만은 정치를 불신하여 선거를 최대한 피하려고 했다. 제헌국회는 임기가 2년이었기 때문에 1950년 5월 말까지 선거를 치러야 했다. 정부수립 후 첫 총선이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11월로 연기하겠다고 밝히는 등 선거를 회피하려고 했다. 반면 미국은 자신들이 점령했던 지역에서 안정적인 국민국가를 세웠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총선의 안정적 실시가 필요했다. 1950년 총선에 미국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선거는 정착되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1952년 개헌 당시에는 군대가 국회를 포위한 뒤에 공개적으로 기립하는 투표를 진행하여 166명 중 찬성 163표, 기권 3표로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이승만의 재선을 위한 직선제 개헌이었다.
이 때 헌병대가 야당 의원들을 버스에 실어 사라졌다. 이처럼 한국전쟁 중에는 이승만이 극도의 독재체제로 치닫자 제거 계획도 세웠다. ‘에버레디 계획’이 바로 그것이다. 이승만의 반공국가주의 독재는 미국의 냉전 구상에 위협이 될 정도였다.
“이승만은 미국식 대통령제를 도입했으며 민주주의의 정착을 위해 나름대로 노력했다”고 말하는 햄벨스의 설명은 근거가 없는 주장에 불과하다. 오히려 “아시아적 전제”라고 표현했던 최인훈의 말이 이승만의 통치 성격을 더 여실히 보여준다.
‘결코 무시해서는 안 될’ 문제의식
나 또한 햄벨스처럼 진보진영의 역사인식이 더 풍부해지기를 원한다. 오늘날 우리의 삶이 놓인 세계가 어떤 과정을 통해 형성되어 왔는지를 살펴볼 폭넓은 시야가 필요하다. 식민주의 문제나 냉전질서의 잔존처럼 이 지역에서 살아갈 때 접하게 되는 역사적 문제들이 많다. 역사적 비판은 이승만이나 박정희를 악마화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그러한 점에서 햄벨스가 가진 문제의식에 공감한다.
그러나 햄벨스의 ‘교정’을 스스로가 교정할 필요도 있다. 이승만의 업적이라고 할 만한 것들을 애써 찾는다고 막대를 구부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특정인의 공과를 묻는 질문에 대한 가장 급진적인 대답은 당대의 관계성에 놓인 권력관계를 보다 풍부하게 드러낼 때 찾을 수 있다.
‘식민지’, ‘이승만’, ‘박정희’ 같은 키워드를 쪼개서 지식을 드러낼 것이 아니라 식민주의와 냉전이 길항작용을 했던 당대의 권력관계를 끈덕지게 묻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예컨대 최현숙 선생이 진행하고 있는 노년 빈곤층의 구술생애사 같은 작업이 그러하다. 이러한 문제의식이 이승만의 업적보다 더욱 ‘결코 무시해서는 안 될’ 요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