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쓴 이승만에 관한 글은 나름 친절하게 쓰기는 했습니다만 짜임새가 있는 글은 아닙니다. 예상했던, 아니 그 이상의 파장이 밀려와 꽤나 재밌게 사태의 추이를 보고 있었습니다. 댓글이 생각보다 많이 달리기도 했고 격한 감정을 뿜어내시던 분들도 많이 계셔서 제가 직접 글을 남기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 싶어 굳이 댓글을 남기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어떤 지적은 논의를 확장하는 데 있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 간략하게나마 그에 대해 해명하는 것이 글쓴이로서의 책임을 다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요약: 조선 이후 한반도는 리 공동체라는 전근대적 공동체가 계속해서 분열되면서 원자화 된 인민들이 근대적 시민사회를 이루지 못하고 한국 사회 전체가 지속적인 갈등과 분열에 놓여 있었다. 이러한 인민들을 민주주의에 적응할 “시민”으로 탈바꿈했던 것이 이승만·박정희의 업적이다.
해방 당시 민주주의는 정착이 가능했는가
제가 가장 주의 깊게 봤던 지적은 제 글이 민주주의가 해방 당시에 바로 한국에 정착되기 어려웠으며 시민사회의 성장이 상당히 미숙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정확하게 짚으셨다고 생각되는데 저는 당시의 한국도 그렇거니와 현재의 한국도 시민사회가 상당히 미숙한 상태에 있으며 공동체도 분열될대로 분열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저는 민주주의가 정착되고 나름의 제도로서 운위되기 위해서는 단순히 제도적으로 보장되는 것 외에도 그 사회의 문화적 토대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가 세미나를 하는 것도 아니고 제가 논문을 쓰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이에 대해서는 상당히 소략하게 쓸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글의 문제의식은 저만의 독창적인 것이 아님을 미리 밝혀둡니다.
공동체란 무엇인가
해방 당시의 한국의 시민사회가 상당히 미숙했다는 주장은 최장집 교수님부터 시작해서 상당히 많이 논의되던 것이라 굳이 제가 설명할 필요가 있을지 의문스럽습니다. 그러기보다는 조선사와 식민지사에 관한 지식을 동원해 해방 당시의, 그리고 현재까지의 한국의 공동체라는 것이 상당히 “분열”되어 있다는 제 입장을 밝히는 것이 훨씬 논의를 확장하는데 있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우선 공동체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공동체라는 말을 참 흔하게도 씁니다만 학술적으로는 그리 간단하게 규정되지 않는 개념입니다. 단적인 예로 미국의 사회학자 힐러리(Hillery)에 따르면 1955년에 이미 적어도 94개(!)의 공동체 정의가 존재했습니다. 당연하게도 “구미” 지역의 연구에 한정해서 말입니다.
이에 대해서 이론적으로 논할 여유도 능력도 없기에 저는 이 글에서 이영훈 교수의 공동체 개념을 그대로 받아들여 사용하겠습니다.
여러 공동체 개념을 보아도 최소한 무엇이 공동체라 하기 위해서는 그 자치성과 자율성을 담보하는 가치와 규범이 공동체의 구성원 간에 통용되어 있어야 하고 그것이 사회적, 국가적으로도 승인되어야 합니다. 이렇지 않다면 그 집단은 국가권력에 의해 좌우되거나 구성원을 강제할 수 없어 유동적인 집단이 되어버리고 말기 때문에 저는 이영훈 교수의 정의에 상당히 동의합니다.
조선 사회의 분열과 소농사회
이렇게 공동체를 정의해놓고 몇 가지 연구들을 통해 조선 후기에서 현대까지의 역사를 한번 개괄해보고자 합니다. 17세기 조선은 그 역사 발전에 있어 새로운 전기를 맞이합니다. 이정철 선생님의 연구를 참고하시면 더 자세히 알 수 있지만, 대동법의 시행의 결과 조선왕조의 경제통합에서 시장경제가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게 상승합니다.
이헌창 선생님의 연구에 의하면 전체 경제의 무려 30%를 차지할 만큼 상승합니다. 대동법이 시행되고 동시에 어떠한 이유에서인지 매우 짧은 기간에 노비의 가격이 폭락해 노비제가 해체됩니다. 그 결과 국가체제 자체도 경제적 변화에 대응해 새롭게 바뀝니다. 다름 아닌 국가 관료제적 행정체제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영훈 선생님의 연구에 따르면 이 체제가 역사의 전면에 나타나게 된 계기는 1663년부터 강화된 국가의 호구조사였습니다. 이전의 80만 호였던 전국의 호총이 1750년까지 150만 호로 팽창하였습니다. 물론 인구의 증가도 무시할 수 없겠습니다만 무엇보다도 비독립적 가호로 양반들에게 예속되어 있던 노비 가구가 독립호로 조사된 것이 급격한 호구 증가의 원인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또한 1675년에는 흔히 오가작통법이라 부르는 새로운 조치가 실행됨에 따라 전체 사회가 군-면-리-통으로 재편되기 시작했습니다.
15~16세기까지만 해도 군 밑에 특별한 행정영역이 따로 존재하지 않았었고 넓은 지역을 리里가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행정관료제의 확장은 막연하게 통합되어 있던 농촌을 세분화했습니다. 가령 경상도 적성현의 경우 1606년까지만 해도 고작 6개의 리가 있었을 뿐인데, 1720년에는 그것들이 모두 6개의 현으로 재편되고 그 밑에 무려 63개의 새로운 소규모 리가 성립했습니다.
이렇게 새롭게 형성된 사회를 나카무라 사토루, 미야지마 히로시, 이영훈 등은 “소농사회”라 부릅니다. 그에 따르면 소농사회란 농노제의 해체, 자립적 생산단위로서의 소농, 그들의 촌락공동체인 리里공동체, 관료제, 사적 토지소유와 지주제, 그리고 일정 수준의 시장경제(경제 생활의 2~3할 정도를 담당하는) 등을 주요소로 하는 후기 중세사회를 칭합니다. 이때 소농들은 혼자만의 힘으로는 소농경영에 필요한 사회적 조건들을 창출할 수 없기에 공동체를 형성합니다. 가령 수리시설 같은 것은 개별 가구가 만들기 어려운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단기간에 대규모 노동력을 동원할 수 있는 노동공동체의 탄생이 매우 중요해집니다. 이러한 까닭에 17세기 한국 사회에는 친가 중심의 친족공동체와 앞서 말한 리공동체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사회적 위험으로부터 개인들을 막아주는 안전판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갈등을 해결하지 못했던 조선과 해방 당시 대한민국
그러나 이러한 리공동체는 과연 그 이후의 역사에서도 꾸준히 존재하며 한국 시민사회의 형성을 위한 밑거름이 되었던가? 정석종 선생님의 연구에 의하면 그렇지 않아 보입니다. 경상도 울산부의 사례를 통계적으로 정리한 것을 참고해보자면, 6개 면의 리里 개수는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습니다.
가령 청량면의 경우에는 14개(1720년)에서 21개(1765년), 29개(1810년), 36개(1864년)로 거의 2배가 넘게 증가했습니다. 또한 리명里名이 변하지 않는 경우는 한 면의 사례를 제외하고는 모두 감소하는 추세를 보여줍니다. 이는 공동체의 분열을 뜻합니다.
가령 모촌母村에서 어떤 리가 분리되어 나왔다면 모촌의 이름을 바꿀 이유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름이 바뀌는 경우가 증가한다는 것은 공동체의 분열을 뜻하는 것이라 봐도 무리는 아니라 생각됩니다.
이는 당시 리공동체의 구조를 보면 더 잘 이해가 됩니다. 리공동체는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힘이 있는 양반의 상계上契가 그 하나이고 상민들로 이뤄진 하계下契가 바로 다른 하나입니다. 이 이원적 구조를 잊지 마세요! 뒤에 다시 나옵니다. 어찌됐든 이 이원적 구성에서 상계는 압도적인 힘으로 하계를 지배하고 있었고 그 지배력을 바탕으로 리공동체는 유지되어 갔습니다.
그러나 하계의 사회경제적 성장과 함께 양반들의 힘의 약화는 리공동체의 이런 이원적 구성을 해체시키는 촉매 역할을 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반드시 기억해야할 점은 이 이원적 구조 사이의 “갈등”이 향후 한국 사회의 발전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냐는 것입니다. 그 갈등을 지혜롭게 해결할 수 있는 사회적 기반을 한국 사회가 갖고 있었던가.
미리 말씀드리자면 저는 단언컨대 그런 능력이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참혹한 결과를 우리는 한국전쟁 중에 만나게 될 겁니다. 어찌됐든 다시 돌아와서 이영훈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리공동체 뿐만 아니라 가장 강력한 결속력을 지닌 친족공동체 또한 19세기에 걸쳐 족계 재정이 악화되자 분열하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지금까지도 명절날 보는 경제 위기에 따른 친족 내부의 분열은 이미 19세기 조선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었습니다.
이렇듯 17세기에서 19세기에 이르는 2세기에 걸쳐 한국 사회는 끊임없이 분열되고 있었습니다. 더 큰 문제는 이 분열 과정에서 쌓이는 사회적 갈등을 해소할 정치적, 제도적 기구가 없었다는 점입니다. 국가 관료제를 통한 강력한 억제만이 한국 사회를 지탱하는 힘이었습니다만 조선왕조의 행정력은 개항 이전에 이미 모래성 무너지듯 와해되고 있었습니다.
당연하게도 이렇게 와해된 사회적 능력으로는 근대화에 필요한 힘을 모을 수 없었고 한국 사회는 식민지화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그렇다면 식민지기 한국 사회의 공동체는 어떠한 변용을 거쳤을까요?
공동체 분열이 이어진 식민지기 한국 사회
김익한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식민권력에 의한 지방행정 통폐합은 그 이전의 리공동체의 약화된 권력을 극명하게 드러냅니다. 통폐합 이전의 전국의 리는 총 63,845개였으며 평균 51호의 규모였으나, 통폐합 이후에는 28,283개에 평균 120호의 규모였습니다.
만약 리공동체가 강한 결속력을 지니고 있었다면 이와 같은 통폐합 과정은 수많은 저항을 불러 식민통치 비용을 증대시켰을 것입니다. 그리고 식민권력 입장에서도 인민에 대한 강한 장악력을 보여주는 리공동체를 굳이 통폐합시킬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이용해 통치의 안정화를 꾀했겠죠.
게다가 서구 사회에서 보이듯이 근대적 관료제는 기존의 공동체의 여러 기능들을 흡수합니다. 공동체는 사실상 거주지로서의 의미만 갖는 공허한 집단으로 변해 갑니다. 게다가 앞서 말했듯이 리공동체의 약화된 장악력과 이원적 구조는 식민지기 하에서 하계에 속하는, 그러니까 예층적 신분을 지니고 있던 이들을 다른 지역으로 빠져나가게 만듭니다.
신분제가 폐지됨으로써 나타난 사회 유동성의 증가가 그 원인입니다. 결과적으로 식민지기를 거치면서 수많은 리공동체들은 동일 신분의 친족 집단으로 단순화되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경향성과 함께 족보의 대규모 발간에서 드러나듯이 족계가 강화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경향은 공동체의 결속력이 강화되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공동체 전체가 분열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점차 혈연적 관계가 없는 이들과의 관계보다는 자신과 혈연적 관계가 있는 이들과의 관계를 중시하고 그들에 대한 신뢰성으로 사회를 살아나갑니다.
고황경 선생님의 연구에 의하면 선생님께서 “누구를 가장 신뢰할 수 있느냐”라 질문했을 때 응답자의 53.8%가 친족이라 대답했던 것이 1950년대의 상황입니다. 참고로 이 통계에서 신뢰할 수 있는 사람으로 이웃을 꼽은 사람의 비율은 14%정도에 불과합니다. 이는 식민지기 형성된 자율적 공동체라고는 친족집단밖에 없었던 한국사적 맥락을 배제하고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해방 이후의 한국 사회의 시민사회 수준이 필리핀 이상이었다느니 민주주의를 운위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느니 하는 많은 반박들이 얼마나 허황된 것이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 얼마나 허황된 주장들입니까. 자율성을 지닌 공동체라 할 만한 것은 오로지 친족집단밖에 없었는데 대체 시민사회가 어디에 있으며 그들을 통한 민주주의의 정착이라는 것은 대체 어떻게 가능한 것입니까?
갈등 해결의 기반이 없던 시민사회의 미약함
이렇듯 시민사회가 매우 미약했던 한국 사회의 가장 큰 문제점은 집단 간의 갈등을 해결할 정치적, 제도적, 문화적 기반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식민지의 유산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겠습니다만. 이러한 기반의 미미함은 전쟁이라는,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가장 폭력적인 상황에서 유감없이 드러납니다.
박찬승 선생님의 <마을로 간 한국전쟁>은 이러한 모습을 아주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앞서 위에서 누누이 강조했듯이 리공동체는 이원적 구조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양반을 중심으로 한 촌락과 상민을 중심으로 한 촌락으로 나눠져 있었고 이 후자의 사회경제적 성장은 전자의 지배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했습니다만 동시에 둘 사이의 갈등을 증대시켰습니다.
게다가 식민통치동안의 촌락의 친족집단화는 양반 마을과 상민 마을의 갈등을 “혈족”끼리의 갈등으로 만들었습니다. 내 가족, 내 선조를 무시하는 촌락과 내 가족, 내 선조의 지배를 받던 촌락 사이의 무의미한 자존심 대결이나 갈등은 한국전쟁동안에 서로를 학살하는 것으로 폭발했습니다.
한 가지 사례만으로 충분하다 생각합니다. 부여군의 두 동족마을의 사례를 보면, 제도로서의 신분제가 없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양반마을 주민들은 공공연히 상민마을 주민들을 하대하며 천시하고 심지어 그들의 노동력을 착취하기까지 했습니다. 결국 이러한 갈등과 불만은 한국전쟁동안 폭발하여 두 촌락은 서로를 학살했습니다. 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요.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무시하고 단순히 1945년의 건준위 움직임이라든지 이런 단편적인 것만을 보고 한국에도 시민사회가 존재했으며 그를 통한 민주주의의 운위가 가능하다는 주장을 할 수 있다면, 감히 박수치며 그 용기를 칭찬하고 싶습니다.
역사에 도약은 없다
흔히 하는 말이지만 역사의 도약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이렇듯 분열되고 갈등으로 가득한 사회가 해방이 되었다고 바로 민주주의를 향유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요? 이렇게 분열되고 연고 없는 개인들을 하나로 묶고 통치한 것은 바로 강력한 국가 행정권력이었습니다.
주지하다시피 그레고리 헨더슨 선생님은 그의 저서 <소용돌이의 정치>에서 “원자화 된” 사회가 국가권력에 의해 통합되는 과정에서 어떠한 이성적 성찰도, 여야 간의 타협도, 정책을 위한 진지한 토론도 불가능하게 만드는 “소용돌이”를 만들어 낸다는 것을 밝혀냈습니다.
어떻습니까? 민주화 이후의 한국 사회는 이러한 역사 유산을 극복했을까요? 개인적으로는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 목표는 언제나 더 나은 민주주의를 위한 대표성의 증대와 시민사회의 형성입니다. 좋은 사회를 위한 좋은 정치는 이러한 역사적 맥락을 냉철하게 인식함으로써만 가능해질 것입니다. 특히나 보수와 진보 양 세력 간의 지나칠 정도의 적대감을 저는 이번 제 글을 통해서도 또한번 통감했습니다. 이 사회의 분열을 말이죠.
이러한 적대감을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상대를 악마화하는 역사관의 변혁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제 이승만 관련 글은 그것을 위한 나름의 시도였으나 제 능력의 부족도 있으나 한국 사회의 분열의 역사적 깊이가 제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더 깊었던 것 같습니다.
여기까지 읽으신 분들이 계시다면, 바로 여러분이 앞으로 한국 사회가 좀더 관용적인 사회로 가는데 필요한 밑거름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고 싶은 말은 더 많으나 이것으로 마치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좋은 하루 보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