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진보당은 죽었어, 이젠 없어!
헌재의 결정 요지를 보면, 해산(인용) 의견과 해산 반대(기각) 의견이 공감하는 지점이 하나 있다. 이석기가 미쳤다는 것이다. 갈리는 점은 그 다음이다. 그래서 그 미친 놈이 통합진보당을 대표하는가.
인용 의견은 이석기(와 그 일파)를 통합진보당의 주도세력으로 본다. 이석기가 통합진보당의 주류인 경기동부연합의 수장이며 그가 주도한 내란 관련 회합에 참가한 자들 역시 그 주요 구성원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또한 이들이 부정경선, 폭력 사태, 관악을 여론조사 조작 등을 통해 비민주적으로 특정 인물의 당선을 기도했다는 사실, 이석기 사건에서 통합진보당이 당의 역량을 결집하여 “전당적으로” 그를 옹호하고 비호했다는 사실 역시 그 근거로 들고 있다.
해산? 참 쉽죠
흥미로운 지점은, 인용 의견이 이런 연결고리를 이어가며 계속 사용하는 ‘피청구인(주: 통합진보당) 주도세력’이란 표현이다. 이는 이석기를 위시한 종북 성향 세력, 즉 과거 민혁당 등에서 활동하며 북한과 연계되어 활동하고 주체사상을 추종했던 세력을 칭하는 것이다. 인용 의견은 통합진보당 자체의 대외적 활동이 아니라 이 ‘주도세력’의 활동이 위헌적인 이유를 밝힌 뒤, ‘주도세력’이 정말로 통합진보당을 ‘주도하고’ 있음을 논증함으로써 이 당을 해산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린다.
반면 기각 의견은 이 점에 있어 매우 엄격하다. 정당해산의 요건은 어떤 논리적 오류나 비약도 있어선 안 된다. 이 의견에 따르면, 통합진보당에 대외적으로 드러난 활동 외에 은폐된 목적이 있다는 점이 엄격하게 증명되었다고 볼 수 없다. 진성 당원의 수만 3만에 이르는 정당에서 구성원 일부의 정견을 정당 전체의 정견으로 확대 적용하는 것 또한 무리다.
따라서 기각 의견은 ‘피청구인 주도세력’이란 표현을 배제하고 철저히 ‘피청구인’이란 표현을 사용한다. 통합진보당(피청구인)을 해산하기 위해선 바로 그 통합진보당이 실제로 위헌적인 행동을 보였는지가 근거로 제시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런 건 없다.
게다가 통합진보당을 민혁당 잔존세력이 장악했다 볼 증거가 없고, 이석기의 회합도 통합진보당의 기본노선에 반하여 이뤄진 것이며, 통합진보당이 그 회합을 적극적으로 옹호했다고 볼 수도 없다. 거기 더해 부정경선, 여론조사 조작 등도 지속적이고 조직적으로 이뤄졌다 볼 수 없음을 기각 의견은 지적한다.
동작 그만, 밑장빼기냐?
통합진보당의 강령에 대해서도 살펴보자. 인용 의견도 통합진보당의 ‘진보적 민주주의’ 강령이 그 자체로 특정한 내용을 담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말하고 있다. 다만 이것은 강령이 원래 워낙에 추상적인 물건이기 때문이라 보고, 강령이 도입된 맥락을 적극적으로 해석에 이용한다. ‘통합진보당 주도세력’의 종북 경향이라는 맥락에서 볼 때 통합진보당의 ‘진보적 민주주의’는 북한의 ‘대남 혁명전략’과 유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난 인용 의견이 그렇게 엉터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석기는 미친 놈이다. 아무리 봐도 통합진보당 주도세력이고, 최소한 그 일파이긴 하다. 그 연결고리가 증명된다면 정말 해산이 이뤄져도 할 말이 없다고 본다. 하지만 이건 의심일 뿐이다. 그 고리를 결정적으로 증명할 증거가 없다.
“뻔할 뻔 자 아냐?” 같은 얘기는 필부의 술자리에서나 통할 얘기지, 기각 의견이 밝히는 바처럼 엄격한 증명이 필요한 법정에서 통할 얘기가 아니다. 실제로 헌법재판소에서 이 점이 얼마나 제대로 증명되었을지 의심스럽고, 인용 의견의 요지도 이 연결고리를 충분히 엄격하게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오직 정황이 있을 뿐이고, 헌재의 추론이 있을 뿐이다.
이상한 나라의 헌재
어떤 사람은 헌재의 보수화를 얘기한다. 하지만 나는 보수성 자체가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세상의 진보를 바라는 입장에서는 아쉬움이 될 순 있겠지만. 우안컨데, 진짜 문제는 헌재의 보수 ‘정치세력’화다.
과거 행정수도 논란 때, 헌재는 성문헌법과 성문법이 뻔히 있는 상황에서 관습헌법이라는 초유의 논리로 성문법을 깔아뭉갰다. 그 관습이 정말 있기나 한 건지는 결국 헌법재판관들의 머리속에서만 증명될 수 있을 것이다. 이건 정치의 영역이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헌법을 위시하였으나, 결국 한 정당을 없애버리는 데 이용된 것은 엄밀한 증거와 법적 논리가 아니라, 정황과 그 정황을 기반으로 한 재판관들의 추론 뿐이다. 그리 엄밀하지도 않은 추론 말이다. 이것이 정말 헌법의 영역인지 의심스럽다.
누군가는 이걸 박근혜 당선 2주년 선물이라는 위악적인 농담을 던진다. 쓴웃음이 나오는 까닭은, 당연히 그럴 리 없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정말 이 이상한 나라의 높으신 분들 사이에서는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상상 때문이다.
이상한 나라구나, 정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