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미생〉은 만화 〈미생〉을 본 이들에게 그리 매력적인 드라마는 아니다. 원작만화의 틀과 캐릭터를 이용하되 영상이라는 매체에 적합한 방식으로 변형하려는 여느 드라마와 달리 드라마 〈미생〉은 거의 기계적으로 만화 〈미생〉을 쫓아가기 때문이다. 눈이 빨갛지 않을 뿐 모든 캐릭터를 만화에서 그대로 가져왔고 갈등구조도 똑같다.
괜한 위험을 안기보다는 원작의 화제성과 이야기적 가치를 이어가는 합리적 선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영상창작자로서의 자부심을 느낄 수는 없지만 말이다. 첫 장면에서 독백이라는 형식을 영상에서 그대로 구현한 것은 꽤 뚝심 있는 선택이라 생각했지만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만화를 추려낸 듯한 드라마는 고민이 담기지 않아 뭔가 느슨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러니까 사실 내가 굳이 볼 필요는 없는 드라마였다. 그럼에도 이 드라마를 보게 된 이유는 만화 〈미생〉과 그에 대한 열광을 의미하는 ‘미생 현상’에서 느꼈던 가볍지 않은 불편함을 좀 더 구체화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좋은 마음으로 뚝심 있게 열심히 잘 만든 만화라는 것에 이의를 달고 싶은 생각은 없다. 하지만 왠지 〈미생〉이 정답처럼 여겨지는 바로 지금, 여기, 대한민국이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 지점이라고 느꼈다.
〈미생〉을 보며 꺼림직했던 부분은 대기업 노동자의 부심(자부심) 자극 이야기에 묘하게 모든 사람이 이끌려 들어간다는 점이다. 사실 우리가 이 이야기를 고운 시선으로 보게 되는 이유는 장그래라는 고졸 출신 비정규직의 존재가 있기 때문이다. 도달할 수 없는 문을 향해 필사적으로 한 수 한 수 놓아가는 장그래를 향한 애정 어린 작가-독자의 시선 앞에서 삐딱한 생각을 가지기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장그래가 아니라 사실상 오 과장이라는 사실이다. 장그래는 사랑방 손님의 옥희고 그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관찰자 혹은 존재할 수 없는 자로서의 어색한 지위를 무마하기 위함이다. 쉽게 이야기하면 극적으로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고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장그래의 채용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어쩌면 장그래의 모든 통찰력과 끈기는 여러 가지 차원에서 성립되지 않을 판타지의 일이다.
그렇지만 종합상사 속의 오 과장은 어떠한가? 그는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이에 도덕률을 입힌 사람이다. 한 가족의 책임감 있는 가장이며 사내 정치보다는 일의 실질을 추구해나가는 인간미 넘치는 사람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 이야기의 사회적 의미는 오 과장의 도덕적 우위가 현저하다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사는 대로 생각하지 말라
‘사는 대로 생각하지 말고 생각하는 대로 살아라’는 말이 있다. 생각을 하며 자기 주도적인 삶을 살라는 말로 읽힐 것이다. 하지만 ‘사는 대로 생각하지 말고’라는 말을 좀 더 곱씹어보면 재미있다. 아무리 삶이 하찮을지라도 사람은 자신의 삶이 의미 있기를 바란다. 자부심을 가지고 살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이고 그 순간부터 삶에 대한 정당화, 의미부여가 시작되는 것이다.
좀 더 확대해서 생각해보면 이 시대에 사는 대로 생각하면 그것이 시대의 이데올로기가 된다. 어쩌면 세상이 쉽게 개선되지 않는 이유는 모두가 사는 대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현대사회에서 영화, 드라마 같은 미디어의 영향력은 매우 중요하다. 그것이 진정 엔터테인이 되는 이유는 시청자가 자신의 삶을 드라마 한구석에 집어넣어 스스로에게 서사를 부여하게도 만들기 때문이다.
〈미생〉이라는 이야기는 화이트칼라 대기업 고임금 노동 층이 자신을 집어넣기에 무척 편리하고 유용한 서사다. 우선 존재할 수 없는 고졸 비정규직 장그래를 극에 집어넣어 공감하고 배려함으로써 도덕적 부담감을 덜 수 있다. 그것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실제 그들은 어떠한가?’ 라는 말을 반복하며 그리지 않았던 그들 간의 관계를 떠올리기만 하면 충분할 것이다.
또한 그들이 처한 일의 내적 치열함을 박진감 있게 그림으로써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자부심을 형성한다. 무역 상사라는 낡은 상징은 많은 직종에서 개인의 일이 점점 부품화되어가는 것과 비교하면 일의 아우라를 형성하는 데 적절한 설정이다. 무엇보다 가상의 장그래가 오 과장을 존경하게 됨으로써 장그래와 비슷한 사람 모두가 이야기로 끌려 들어와 자발적으로 오 과장의 입안에 들어가버린다.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은 극단적인 경쟁 속에 살아가는 한국 사회에서 많은 사람이 대기업 노동자에게 부러움을 품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 이야기는 묘하게 고학력 대기업 노동자의 자부심을 극대화하고 ‘대기업 사무직이 더 교육받고 더 어려운 일을 하니 육체노동 층보다 더 많은 돈을 받을 만하다’는 나머지 계층의 내적 구분을 정당화해버리는 기능을 한다는 것이다.
이상하게 중산층 여성의 자기 상처 극복을 위해 가상의 사형수가 동원 및 희생된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의 불쾌함이 상기된다. 장그래가 왠지 동원되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는 것이다.
좋은 이야기, 사회와의 괴리
작가의 좋은 마음과는 배치되는 이런 사회적 기능들은 바로 작가의 이야기 작법에서 출발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야기는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일까? 책 수십 권을 써도 모자랄 주제이지만 단순화해 생각해보자.
많은 시나리오 작가가 오랜 시간을 들여 이야기를 밀고 나가는 힘이 무엇인지, 사람들이 어떤 부분에서 감동하는지, 혹은 극적 긴장감을 유지하는 방법이 무엇인지 연구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연구를 실제로 실현해보고 결과를 축적한다면 이야기를 만들기 위한 구성요소의 리스트를 발견해 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하나 쌓아 올려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걸 이야기의 관습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런 관습적 작법은 근본적으로 대중이라는 반응할 대상에 대한 의존성에서 출발한다. 그렇기에 아무리 좋은 마음으로 출발했다더라도 그 사회 구성원들이 가지고 있는 구조적 모순이 고스란히 담기는 것이다.
‘어떤 소재의 이야기를 다루는가’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도 그만큼 중요하다. 내가 보기에 윤태호는 뚝심 있고 훌륭한 스토리텔러이다. 그는 열심히 취재했고 우리 시대의 장그래에게 공감하고 용기를 주고 싶은 이야기를 만들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거지 같은 한국 사회의 카르텔을 어떻게 그려야 하는지는 고민이 없었던 것 같다(그보다 그의 관심이 집중된 부분은 ‘열심히 일하는 상사맨의 열기’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 여느 대중적인 이야기처럼 그냥 대중이 좋아하는 이야기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 대중이 건강한 사회 속의 존재라면 문제가 없겠지만 이야기에 대한 욕구는 병리적인 환경에서 만들어진다.
그래서 〈미생〉에서 여성 노동자의 고충이나 비정규직의 애환을 그리는 것이 근본적으로는 소재주의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 결과 오히려 더 많은 사람이 작은 소재에 이끌려 들어와 사회의 나쁜 서사를 강화시키는 결과를 낳아버린다는 것이다. 이야기가 재미있게 잘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미생〉과 〈테이큰〉
이야기 작법에 대한 말이 추상적으로 느껴진다면 예를 하나 들어보겠다. 미국 영화 〈테이큰〉은 요약하면 전직 스파이였던 주인공이 여행을 떠났다 인신매매범에게 납치를 당한 딸을 추적해 구출해내는 이야기다. 딸을 사랑하는 절박한 마음과 스파이라는 설정으로 이야기는 충분히 힘을 얻어 진행된다. 내 마음을 움직인 부분은 이야기를 끌고 가는 감정적 동기인 딸을 사랑하는 마음을 그리는 초반부이다.
주인공은 국가에 헌신했지만 가정에 충실할 수 없었고 이혼상태이다. 딸은 부자와 재혼을 한 부인이 기르고 있다. 딸은 아버지를 사랑하고 있다. 주인공은 생일에 딸이 좋아하는 가라오케 기계를 가져가고 딸은 무척 좋아한다. 그런데 그 순간 저 멀리서 한 마리의 말이 걸어 들어온다. 새아빠의 선물인 것이다. 딸은 그 순간 ‘oh my god’을 연발한다. 딸은 말을 향해 달려가고 아버지는 그런 딸을 지켜만 본다.
그 순간이야말로 주인공이 놓인 쓸쓸한 순간이다. 딸이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어린 딸, 혹은 인간은 쉽게 압도적인 물질의 매혹에 빠져버린다. 다른 부분은 전형적인 할리우드 이야기였지만 그 부분만큼은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와 명민한 감각 없이 나올 수 있는 장면이 아니었다(그래서 장편 상업영화에서 주제의식은 서브플롯에 담긴다는 얘기가 있는 것 같다).
〈미생〉을 잘 짜인 이야기라 생각하고 재미있게도 읽었지만 이처럼 마음을 확 잡아끄는 장면은 없었던 것 같다. 그가 상사맨을 고른 취향이 고도 경제 성장기의 뚝심 있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의 덕성과 닿은 것도 우연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는 우리 사회의 주류와 다른 정치적 성향을 가졌지만, 그들과 마찬가지로 치열하게 일하고 가정에 충실한 산업역군에 대한 로망 또한 가진 것 같다.
그렇기에 그가 투표를 어느 당에 하더라도, 아무리 비정규직에 대한 안타까움을 가졌더라도 지금 현재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후려칠 상상력을 가질 수 없다. 결국은 능력주의의 덫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능력주의는 현 체제에 대한 더 근본적인 내적 긍정이다. 그런데 〈미생〉을 보는 많은 사람은 장그래가 존재하는 것만으로, 여성 노동자의 고충을 그린 부분만으로 너무 관대해진다. 그것이 바로 동정의 역설이자 간교함이다.
두 국민 전략
아주 오래된 전략이지만 노동자들의 파업에 대해, 그것이 특히 공기업처럼 상대적으로 처우가 나은 노동 층의 것일 때 국가와 언론은 종종 그들의 임금을 전격 공개한다. ‘그렇게 많은 돈을 받는 사람이 웬 파업이냐’는 이 전략은 꽤 잘 먹혀드는 편이다. 대부분의 생활인이 가진 계급 감정을 잘 이해하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을 ‘질투의 정치학’이라 부르고 싶다.
어차피 사회 지도층은 그들의 비교 대상이 아니다. 도달할 수도 없고 그 구조를 바꾼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 구조를 바꾸기 위한 노력이 얼마만 한지, 그 성과가 어떠한지 역사적으로 학습한다면 끼어들지 않는 것이야말로 실존적으로 행복을 위한 합리적인 선택일 수 있다. 결국 한국인은 자신의 눈에 보이는 범위, 자신이 도달할 수 있다 여기는 범위 안에서 무한 경쟁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담뱃값 인상과 관련된 여론조사에서 50%가 넘는 사람이 담뱃값 인상을 찬성한다는 결과를 보았다. 표본의 한계는 있겠지만 담배를 피지 않는 절반이 넘는 사람들이 그것이 서민 증세인 것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나만 아니면 돼’ 정신을 가진 것이다. (물론 길빵당한 비흡연자의 감정적 반응도 있었겠지만) 사회적 문제에 대한 연대감이 극도로 떨어져 있음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아마 지배계층은 이런 감정을 이용해 끊임없이 시민을 두 개의 국민으로 쪼갤 것이다. 경쟁은 그 자체로 유희일 수 있겠지만 현실적으로는 우열의 감각을 광범위하게 형성한다. 그런데 한국 사회에서 눈에 들어오는 ‘다소 우위’의 집단이 바로 고학력 대기업/공기업 노동 층이다.
적대적 질시의 계층을 피지배계층 내부에 형성해 나가는 것은 계급 적대에 대한 완충재로서 사회를 조절해나가는 데 매우 유용하다. 크게 보면 〈미생〉에 비판의식을 가질 필요는 이런 맥락에 있다. 그 체제의 일부에게 굳이 면죄부까지 줄 것도 없는 것은 물론이다.
‘미생 현상’과 한국 사회의 모순
마지막으로 언급해두고 싶은 부분은 ‘쉬운 정답에 대한 갈망’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대기업 독점 경제가 가진 문제점이나 비정규직의 2등 국민화를 통한 삶의 황폐화 문제처럼 우리들이 이 땅에 살아가면서 느끼는 한국 사회의 모순은 점점 고도화한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시작된 문제인지 알 수 있는 분석력도 문제를 풀어나갈 현실적 힘을 가지는 것도 너무나 힘든 일이다. 그 순간이 바로 우리가 서사에 기대는 순간이다.
2014년의 안철수 현상이야말로 가장 좋은 예라고 생각한다. 쉬운 대답에 대한 갈망이 손쉽게 가질 수 있는 정답 같아 보였던 안철수 서사에 쏠린 것이다. 하지만 안철수 현상에서 우리는 이미 보았다. 단순 명쾌하고 늘 옳은 말을 하는 서사가 얼마나 무의미하고 얄팍한 것인지 말이다. 이것이 ‘관습적 옳음’이라고 하는 것의 실체다. 극도로 복잡한 세상에서 단순한 답을 찾는다는 것 자체가 이미 종교적이며 그 자체가 사회적 참사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드라마 〈미생〉에서 울컥했던 한 장면은 오 과장이 비어있는 장그래의 자리를 보며 안절부절 미안해하는 부분이었다. 장그래에게 문서유출에 대한 책임을 추궁했지만 그가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야기의 감동은 인간성 그 자체에서 출발한다. 〈미생〉이라는 우리 사회의 이야기는 많은 사람이 다른 사람을 염려하고 부조리를 느낀다는 것에서 출발하는 좋은 사람의 이야기다. 어쩌면 우리 사회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염려스러운 점은 그것이 익숙한 자기 사랑의 서사로 귀결되어 버릴 것 같다는 것이다. 나쁜 서사 안에서 좋은 사람인 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그것이 바로 우리가 〈미생〉을 향한 열광에서 한발 물러나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