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란의 중심, 유재흥 장군
현리 전투는 아마 한국군 전쟁사를 기록하는데 있어서 가장 논란이 많은 전투로 알려져 있다. 그 논란의 중심에는 최근에 타계한 유재흥 장군을 둘러싼 논란이다. 유재흥 장군은 1921년 일본에서 태어나 1941년 일본 동경 육사를 졸업하고 근위 보병대 소대장으로 근무 했다. 유재흥 장군을 둘러싼 논란은 그나 한국 전쟁 당시 가장 유명한 한국군 패전에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는 점일 것이다.
1950년 한국 전쟁 발발 당시 의정부 축선을 방어하던 7사단장을 역임하였다가 서울 방어 작전의 실패로 패장이 되었고, 중공군 개입 이후 벌어진 UN군의 대대적인 반격 작전인 청천강 전투에서 자신이 지휘하던 2군단이 괴멸되어 반격 작전 자체가 무산되게 만들었다는 비판을 들었던 점, 그리고 이번에 얘기하게 되는 현리 전투에서 패배, 3군단을 괴멸시켰고, 미군이 한국군의 전시 작전 통제권을 회수하게 하도록 만든 인물이라는 것이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바이다.
심지어 일부에서는 한국 전쟁 당시 최고의 북한군 장군이라고 비꼬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비판에도 불구하고 유재흥 장군은 한국 전쟁 이후 합참 의장과 국방부 장관을 지내기도 했으니 일반적인 비판과는 다른 면모를 가졌던 인물인 것 같다. 유재흥 장군에 관한 논쟁에 대한 기사는 한겨레 기사를 참고하기 바란다.
<링크: 한국전 최악의 패장 국립 현충원에 안장 – 한겨레 2011년 11월 30일자 기사. 기사의 내용중에 조창호 소위와의 면담 거부에 대해서는 진위에 대해서 논란이 많다. >
좌측의 유재흥 장군과 우측의 이승만 대통령. 유재흥 장군은 백선엽 장군과 함께 한국 육군사에서 논란이 가장 많은 장군 중 한명이다. 일본군 소위로 근무하다 해방을 맞이한 뒤 대한민국 국군 군번 3번을 받은 그는 제주도 4.3 사건의 진압 총 책임자로 지휘력을 인정받았다. 이후 서울 지구 방어전의 실패로 비판을 받았지만, 낙동강 방어 전투의 핵심이였던 다부동 전투와 영천 전투의 승리로 미군의 무공 훈장을 받았다.
이후 연합군의 북진 당시 제일 처음 평양에 입성하기도 했다. 이후 청천강 전투에서 2군단장으로 패전, 3군단장 시절 현리 전투에서의 패전으로 한국군의 전시 작전권을 미군에게 넘겨준 원흉이라는 많은 비판을 받았다. 백선엽 장군의 경우 유재흥 장군이 현리 전투에서 전장을 이탈해 도망쳐 한국군의 패전을 기록하게 한 원흉이라 강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하지만 한국 전쟁 기간 동안 가장 오랫 동안 최전선에서 지휘를 한 지휘관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한국 전쟁 이후 이승만 정권시에 선군 작업을 거치면서 퇴역했다가 5.16 이후 국방부 장관에 임명되기도 했다. 유재흥 장군은 노무현 정권 당시 전시 작전권 반환을 추진하자 가장 크게 반대한 퇴역 장군중 한명으로도 유명하다.
현리 전투의 전개와 의미
개인적인 생각으로 현리 전투는 당시 3군단을 지휘하던 유재흥 장군만의 잘못이라기 보다는 현대 전쟁에서 중공군과 같이 침입 – 우회 – 매복 전술을 활용하는 부대에게 이렇게 하면 패전할 수 있다 라는 내용을 보여주는 교과서적인 전투라 할 수 있다. 현대 전에서 화력과 무기의 정확성이 높아 지면서 상대방의 준비된 진지를 향해 전면 공격을 하는 것은 자살 행위에 가깝다는 것은 이미 1차 세계 대전을 통해 잘 알려져 있다.
이런 상황에서 세계 각국은 다양한 전술을 개발했는데, 독일군과 미군이 2차 세계 대전 동안 잘 활용한 전격전, 소련군이 개발한 화력 집중과 보전 합동 공격, 영국군과 미군이 노르망디에서 성공적으로 활용 했던 공수 부대 침투 작전, 그리고 중공군이 개발한 침입 – 우회 – 매복 전술이 그런 전술들이다.이런 전술들의 가장 큰 공통점은 상대방 방어선에 공포를 확산하고, 지휘 체계와 통신을 마비 시켜 상대방의 전투 의지를 상실하도록 만드는 것에 있다.
현리 전투는 중공군의 이런 전술이 가장 잘 드러난 전투로 연합군의 방어선중에 가장 약하다고 생각된 한국군 접경 지역을 집중 공격하여 돌파구를 만들어낸 뒤 소규모 병력으로 아군 지역을 우회 후방 퇴로 및 보급로를 차단함으로써 공포감을 증가 시키고, 이후 지휘 체계가 무너진 부대를 각계 격파하는 전술이 활용됐다.
1951년 5월 15일, 중동부의 전 전선에 걸쳐 공산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전투는 공산군의 예상과 다소 다르게 흘러간다. 국군 3군단(3사단, 9사단)의 좌측을 담당한 중공군 20,27군은 국군 5, 7사단의 방어선을 가볍게 돌파했지만 3군단 우측을 돌파하기로 했던 인민군 2군단은 국군 1군단(수도사단, 11사단)의 저항에 막히고 말았다. 홍천 방면의 미군을 공격하기로 한 중공군 15, 60군 역시 미군이 완고하게 버텨 홍천으로의 진출에 실패.
예비대를 투입할 정도의 돌파구는 열지는 못했지만 국군 5, 7사단이 빠르게 뒤로 물러나는 바람에 3군단 왼쪽 옆구리 휑하게 비는 일이 생긴다. 이 와중에 국군 3군단의 퇴로를 차단하고자 계곡으로 빠르게 기동한 중공군 20군의 1개 중대가 17일 새벽에 오마치고개를 점령했다. 오마치고개는 현리 인근에 주둔하고 있던 국군 3군단의 3,9사단의 유일한 퇴로였다.
당연히 우선적으로 방어되어야 할 요충지였지만 미10군단과 국군 3군단의 책임지역 경계로 지휘 혼선을 겪다가 무방비로 노출되었다. 오마치고개가 점령당한 사실을 17일 아침이 되어서야 알게 되었고 사단에 철수 명령을 내린다. 이렇게 현리에 3군단 예하 두 개 사단의 병력이 모여들어 인원과 장비가 빼곡하게 쌓이게 된다.
17일 오후 유재흥 군단장과 9사단장 최석 장군, 3사단장 김종오 장군은 현리에서 중공군의 돌파를 위한 작전 계획에 돌입하고 유재흥 장군은 9사단장 최석 장군에게 30연대를 동원하여 오마치를 일단 돌파하고 김종오 장군의 3사단은 18연대로 이를 지원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와 함께 유재흥 장군은 3사단과 9사단의 포위망 돌파를 위한 지원 작전을 위해 항공기를 이용 군단 사령부가 있던 하진부리로 날아 갔다.
하지만 오마치 고개 돌파를 명령받은 3사단장이였던 최석 장군은 유재흥 장군만큼 논란이 있었던 인물로 성격이 급하고 즉흥적으로 통솔해 부임당시 참모장으로 있었던 박정희 대령 (후에 5.16 이후 대통령에 된 분이 맞습니다.), 작전 참모 박춘식 중령, 인사 참모 이춘식 중령등이 병을 이유로 보직에서 물러났고 사단의 난맥상을 알고 있던 유재흥 군단장은 상부에 최석 준장의 사단장 해임을 건의하기도 했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30연대는 오마치 고개 공격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예하 대대와 통신이 두절되었고, 사단 본부 역시 연락이 되지 않게 되자 자체적으로 공격을 포기하고 퇴주하기 시작했다.(기록에 따르면 당시 최석 준장이 어디에 있었는지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이후 유재흥 장군은 최석 장군이 전투 이전에 적전 이탈한것으로 보고 패전의 책임을 최석 준장에게 돌렸다.)
한편 이와 같은 상황에서 미 군사 고문관은 현리를 3사단만의 병력으로도 고수 방어 하자는 건의 했지만 3사단장 김종오 준장은 이미 현리 주변 고지가 중공군에게 피탈되기 시작했고, 현리 전역을 사주 방어하기에는 3사단 병력으로는 부족하다고 판단 역시 사단 전체에 현리 남쪽 방대산을 통해 하진 부리로 퇴각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러는 사이 3군단의 목줄인 오마치 고개에는 중공군 60사단의 전 병력이 배치되었다. 여기에 중공군은 3군단이 오마치 고개를 탈환하고 돌파 할 것에 대비해 오마치 후방 5킬로미터 지점의 침교 일대까지 중공군 27군 81사단이 진출, 5월 17일 밤에 국군3군단은 중공군의 2중 포위망에 완전히 갇히게 되었다.
한편, 퇴각 명령이 내려진 상황에서 중공군에 완전히 포위됐다는 소식이 9사단과 3사단 병력에 전달되고, 사병들과 예하 부대에 “유재흥 군단장이 도망쳤다.”라는 소문이 돌면서 3사단과 9사단의 지휘 체계가 붕괴하고 조직적인 퇴각과 엄호도 없는 병사들 개별 후퇴가 시작되었다. 3군단은 모든 장비를 현리에 그대로 두고 퇴각을 해버렸고, 중공군의 추격부대에 쫓기면서 70km를 후퇴 하진부리에서 겨우 집결하게 된다.
5월 20일에 집결한 3군단의 병력은 전체 병력의 37%였고, 모든 장비를 상실해 UN군은 버려진 장비를 파괴하기 위해 현리에 폭격을 가하는 웃지 못할 일도 발생한다. 이 무렵 3군단이 완전히 와해되고 군단 사령부를 포함해서 군단 내부의 각급 사단의 지휘 체계가 완전히 붕괴된 상황으로 한국군 지휘부에 의한 부대 수습이 어려워지자, 밴 플리트 장군은 유재흥 장군을 소환, 3군단을 해체를 명령하게 된다.(이 당시 유명한 벤 플리트 장군과 유재흥 장군과의 당시 대화 내용에 대해서는 위에 링크 기사를 참조하기 바람)
다행히 5월 23일부터 시작된 UN군의 반격으로 3군단의 붕괴로 발생한 돌파구는 회복 되지만, 3군단은 장비의 70%, 병력의 30%를 상실하였고, 이 전투 이후 미군은 한국군이 비상 상황에 대한 대처 능력이 떨어지는 것으로 판단 한국군의 작전 통제권을 몰수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현리 전투의 패전은 그 사후 결과를 놓고 보았을 때 의정부 축선 방어 전투의 실패나 대전 전투, 덕천 전투와 같은 큰 패전들이 가지고 왔던 전쟁 전체에 미치는 영향력은 작았던 전투이다. 하지만 전투 수행 과정에서 지휘 통신 체계가 붕괴 되고 사병과 장교, 심지어 장군들까지 계급장을 떼고 패잔병으로 삼일간을 도망치고, 이후 수습 과정에서도 혼란을 빚었던 모습은 치욕스럽다는 표현이 가장 잘 어울리는 전투이다.
하지만 많은 전쟁에서 큰 패전이 있는 경우 – 현대전도 마찬가지로 – 대부분의 군대가 지휘체계가 붕괴되고 통제가 되지 않으면서 대규모 투항이나 전선 전반에 붕괴가 나타나는 것은 일반적인 일이긴 하다. 그렇다면 현리 전투에서 이와 같은 현상이 발생한 이유는 무엇일까?
현리 전투의 특성과 교훈
가장 먼저 7사단과 5사단이 담당한 우측면이 붕괴하는 과정에서 3군단과의 유기적인 협조와 통신이 이루어지지 않은 점이 있다. 미군 10군단이 담당하고 있던 지역이던 국군 7사단과 5사단이 붕괴하면서 3군단 우측면에 폭 20Km의 돌파구가 발생하였고, 이를 통해 오마치 고개에 대한 방어가 뚫림으로써 3군단이 포위가 되는 형국이 발생했다.
또한 오마치 고개에 방어진지를 구축하지 못한 이유가 되었던 10군단과 국군 3군단 사이의 책임 경계선 분쟁 역시 패전에 문제로 지적될 수 있다. 이런 책임 경계선 분쟁이 발생 했을 경우에 있어서 전략적 중요 지점에 대한 방어를 위한 상호 협력이나 또는 별도의 방어 계획이 수립되었어야 하는데 3군단은 이런 부분에서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아 혼란을 야기했다. 이점에서 유재흥 장군의 책임이 있다고 보인다.
여기에 결정적으로 3군단이 포위되고 나서 현리에 모여든 3사단과 9사단 그리고 군단장 유재흥 장군의 미온적인 조치에 대해 말을 안 할 수가 없다. 유재흥 장군의 경우 특히 9 사단장인 최석 장군에 대해 보직 해임을 건의할 정도로 신뢰를 하지 않았다면, 군단이 포위된 상황에서 3사단에게 포위 돌파의 임무 자체를 부여하지 말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오히려 개전 초기 춘천 – 홍천 지구 전투에서 북한군을 막아내어 한국군 최초의 승전을 이끌었던 김종오 장군에게 돌파 임무를 맡기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다.
여기에 17일 아침에 현리에 모두 모여든 3군단의 병력이 그대로 방치 되어 있어, 부대의 군기가 무너진 것 역시 지휘부의 책임이라 할 수 있다. 돌파 작전이 준비 되기 이전 부대가 후퇴를 해서 퇴로가 막힌 상황이라면 상식적으로 진지 구축을 준비하면서 사주 방어 태세로 우선 전환하는 것이 우선이고, 반격 작전은 그런 준비 과정을 진행하면서 최단 시간내에 결정하여 최소 17일 오후에 실시 되었어야 하는 것이 상식이다.
그러나 당시 3군단 예하 3사단과 9사단의 지휘부는 그런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다 중요한 시간을 모두 허비하고 말았다. 또한 이와 같은 진지 구축과 준비 상황을 거치면서 유선 통신을 비롯한 통신 개통이 이루어 짐으로써 지휘 체계에 혼선이 오는 상황을 미연에 맊을 수 있었지만 이 역시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국 3군단장 유재흥 장군과 3사단장, 9사단장 모두 당시 하루라는 아주 중요한 시간을 허비함으로써 충격적인 패전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항상 모든 상황에 대처할 준비를 할 수 있을 때 예상하지 못한 혼란을 미연에 방지 할 수 있는 것이다.
원문 : 로빈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