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국립한글박물관’ 한글날에 개관한다
모레가 한글날이다. 세종 임금이 훈민정음을 창제하여 반포한 1446년(세종 28년)을 기준으로 568돌이다. 이번 한글날은 1990년 공휴일에서 제외되었다가 다시 공휴일로 지정되고 나서 두 번째로 맞는 날이다.
한글날이 국경일에서 다시 국가 지정 공휴일이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정작 한글날을 기리는 일은 예전 같지 않다. 몇 해 전만 해도 인터넷에 독립된 ‘한글날 사이트’를 마련하여 한글날을 기리고 각종 행사 등을 소개하더니만 요즘은 그것도 눈에 띄지 않는다. 국립국어원에 가보니 한글날에 ‘국립한글박물관’(관장 문영호)이 개관한다는 소식이 걸려 있다.
‘한글의 역사와 가치를 일깨우는 전시와 체험, 배움의 기회를 제공하’고자 용산구 서빙고로 139번지 국립중앙박물관 부지에 문을 연 한글박물관(아래 박물관)은 연면적 1만 1,322㎡로 지하 1층 및 지상 3층 건물과 문화행사·전시·교육 등이 가능한 야외 잔디마당과 쉼터를 갖추고 있다. 1층에는 한글누리(도서관), 2층에는 상설전시실, 3층에는 기획전시실, 어린이를 위한 한글놀이터, 외국인을 위한 한글배움터 등이 들어서 있다.
개관기념 전시도 다채롭게 열린다. 상설전시실에서는 ‘한글이 걸어온 길’이라는 주제로 한글의 과거와 현재를 돌아보고 미래를 생각하는 전시가, 기획전시실에서는 한글을 창제하여 독자적인 우리 문화의 기틀을 세운 세종대왕을 주제로 한‘세종대왕, 한글문화 시대를 열다’가 마련된다고 한다.
2. 관람은 무료, 각종 행사도 푸짐
박물관은 훈민정음 창제 전후에서부터 현재까지 한글의 상징성과 역사성을 대표하는 자료 1만 여 점도 소장하고 있다. ‘훈맹정음’(한글장애인을 위한 점자책)과 ‘논어언해’ 등 기증 자료 7,500여 점에다 ‘정조어필 한글편지첩’, ‘김씨부인 상언’, ‘무예제보’(조선 최초의 한글 무예서) 등 구입 자료도 2,500여에 이른다.
용산가족공원과 산책로로 연결되어 있는 박물관의 관람은 무료다. 관람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개관 당일에는 한글 디자인 ‘타요버스’가 박물관 앞에 정차하며, 버스에 탑승해서 한글 문제를 맞히면 선물을 증정하는 행사가 열린다고 한다.
이밖에 시인 신달자, 한글 디자이너 안상수의 책사람(휴먼북) 행사(10.9.), 한글 주제 음악극 공연(10.11.), 기획전시 참여 작가 10인과의 대화(10.11.) 등 다채로운 문화행사가 마련되어 있다고. 서울과 수도권에 사는 이들은 휴일 나들이로 박물관을 선택하는 것도 좋겠지만, 지방 사람은 그냥 누리집이나 구경하는 걸로 아쉬움을 달랠 수밖에 .
3. ‘시간이 걸리십니다’?
아무데나 높임의 선어말 어미 ‘-시-’자를 넣는 ‘높임 과잉’의 문제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블로그에 <‘높임과잉’?, ‘기사님식당’과 ‘전화 오셨습니다’>를 쓴 게 2009년인데 5년이 지난 지금, 이 문제는 손쓰기 어려운 지경에 다다르지 않았나 싶다. 일상적 의사소통보다는 주로 상품을 사고파는 과정에서 상인들에 의해 주도되는 이 괴상한 높임말은 마침내 글로도 쓰이기 시작한 듯하다.
인터넷 쇼핑몰에서 우연히 발견한 글이다. 어떤 고객의 질문에 대한 어느 회사의 답인데 ‘-시-’가 넘치고 있다. 디자인이 ‘다르신’ 제품에 문제도 ‘발생되신’다. 상품 발송에는 시간이 ‘걸리시’고, 연락도 ‘가시’는 것이다. 울림현상도 ‘생기시’고 현상도 ‘나타나신’다. 신속한 안내도 ‘가능하실’ 것이란다.
4. 디자인이 ‘다르시’고 ‘현상도 나타나신다’
그나마 “여기 아메리카노 나오셨구요. 거스름돈이세요. 시럽은 옆에 있으시구요.”(김선우, <한겨레> 9. 28)보다는 나은 셈인가. 도대체 왜 말이 이렇게 망가지고 있는가. 어법을 무시해 버린 괴상한 높임말을 통해 사람들이 얻으려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
고객의 지갑을 열기 위해 상인들이 처음 시도한 것은 고객의 호칭을 높이는 일이 아니었나 싶다. 고작해야 ‘아저씨, 아주머니’로 부르던 고객의 이름이 ‘사장님, 사모님, 선생님’ 따위로 격상된 것은 꽤 오래된 일이다. 이런 호칭이 정착한 걸 보면, 그걸 민망스레 여기는 사람들보다는 나쁘지 않게 받아들이는 이들이 더 많았던 것 같다.
그리고 고객을 사로잡기 위한 장사꾼들의 노력은 드디어 위와 같은 괴상한 높임말을 일상으로 빚어내고 있다. 이 높임말은 고객의 행위를 높이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고객에게 파는 상품을 높이고 관련되는 모든 상태와 동작을 죄다 높이는 형식이다. ‘높이는 데 나쁠 건 없다.’다. 그러는 새에 우리 어법은 엉망진창이 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상황에 마땅한 해법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온 국민을 대상으로 교육을 실시할 수도 없다. 망가져 가고 있는 우리말을 복원하기 위해서 신문·방송 등 매스컴을 통한 대규모의 우리말 바로쓰기 캠페인이라도 벌여야 하는 것일까.
5. 여대생은 맞춤법 틀리는 남자를 ‘좋아하지 않는다’
한글과 관련하여 씁쓸함을 더하면서 한편으로는 그나마 위로가 되는 뉴스도 있다. 대학내일20대연구소에서 전국 대학생 389명을 대상으로 한글에 대한 인식과 한글 맞춤법 이해 실태를 조사한 결과가 그렇다.
응답자의 91%가 ‘맞춤법을 빈번하게 틀리는 이성에 대한 호감도가 감소한다’고 답해 ‘맞춤법’이 이성에 대한 호감도에 일정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게 드러난 것이다. 호감도 감소는 남성이 86.7%가, 여성은 95%로 나타나 여성이 남성보다 맞춤법 오류에 민감하게 반응했다고.
사귀는 상대와 메시지나 메일, 드물게 손 편지라도 주고받으면서 거기 맞춤법에 맞지 않는 글자를 발견하는 기분이 어떠할지는 미루어 짐작할 만하다. 행여 그 틀린 글자를 못 알아보면 다행이겠지만 그게 유난히 눈에 쏙 들어온다면 상대방에 대한 호감이 곤두박질 치는 건 자명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 조사가 전해주는 위로는 여기까지다. 나머지 조사 결과는 마치 오늘날 한글과 우리말의 위상을 날것으로 드러내는 것 같아서 씁쓸하고 민망하다. 한글날의 정확한 날짜를 묻는 문항엔 전체 응답자의 21.7%가 오답을 했다. 다섯 명 중 하나는 이태째 공휴일이 된 한글날이 언제인지 모른다는 얘기다.
6. 다시 태어나면 선택하고픈 모국어는 영어>한국어
맞춤법 시험을 실시한 결과도 민망하긴 마찬가지다. 대학생들은 한글 맞춤법보다 영어 맞춤법에 더 밝았다. 각각 단어 5개를 두고 시험을 치른 결과 평균 점수는 한글이 75.2점, 영어가 81.0점이었다. 워낙 영어가 행세하는 세상이니 취업과 스펙을 위해서 죽자고 영어를 파는 형편임을 감안하면 영어 점수가 높게 나온 게 당연할지도 모른다.
‘다시 태어나면 선택하고 싶은 언어’를 묻자, 49.9%는 영어를 꼽았고, 한국어를 선택한 학생은 43.2%였다. 저학년(영어 46.3%, 한국어 45.7%)에 비해 고학년(영어 53.2%, 한국어 40.8%)이 영어 선택 비율이 높은 것은 취업을 앞둔 특수성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오늘 아침, 2학년 수업에 들어가서 이 설문결과를 들려주었더니 아이들은 이구동성으로 ‘당연하지요!’를 합창했다. 모든 부문에 영어 능력이 요구되는데 그럴 수밖에 더 있냐는 것이었다. 나는 아이들의 반응에 다소 실망하여 ‘좋다. 그러나 당연한 거하고 ’옳은 것‘은 다르지 않니?’하고 되받았지만, 뒷맛만 씁쓸했다.
2014년, 오백예순여덟 돌을 맞는 한글날 전날, 나는 아이들에게 내일 아침에 국기를 달자고, 그것으로라도 올 한글날을 차분하게 기리면 좋겠다고 부탁하고 교실을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