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부터 ‘사원-대리-과장-부장-임원’으로 상징되는 전형적인 한국 기업의 직급 체계의 대안을 모색하는 기업들이 늘어나고 있다.
최근 합병을 선언한 ‘다음 카카오’가 양사에서 각각 다르게 쓰던 호칭을 어떻게 통일할지에 대해 고민이라는 기사도 나왔는데, 사실 호칭과 직급 체계만 바꾸고 정작 기업 문화나 경영진의 생각이 바뀌지 않으면 아무런 효과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호칭과 직급 체계, 그리고 그를 통해 기업들이 만들고자 하는 열린 문화에 대한 내 경험과 생각을 정리해본다.
1. 직급/호칭 — 뭐가 좋은가?
위의 기사 내용과 내가 아는 내용을 바탕으로 직급/호칭 파괴를 실현하고 있는 기업들의 사례를 아래와 같이 정리해봤다. 여러분은 어떤게 더 좋다고 생각하시는가?
내 생각은 이렇다.
1) 호칭: 한국 이름이 가장 좋다. 처음엔 나이많으신 분께 마치 친구처럼 한국이름+님을 붙여서 부르는게 어색하기도 하고 영어 이름을 부르는게 차라리 편하다는 생각도 들었으나, 좀 적응이 되면 그 사람이 한국 이름을 쓰는지, 영어 이름을 쓰는지는 커뮤니케이션의 편안함에 그다지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오히려 영어 이름을 병용함으로서 오는 불편함(기사에 소개된 카카오 사례처럼 서로의 본명을 모른다)도 있고, 조성문님이 ‘한국인의 영어 이름 사용에 대한 생각’ 이라는 블로그에서 제안하신 바와 같이 외국인들은 한국 이름을 발음하는데 의외로 큰 불편이 없고, 더 선호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니 외국인들이 정말 발음하기 어려운 이름이 아니라면 한국 이름을 쓰는게 좋다고 생각한다.
2) 직급: ‘님’이 가장 좋다. ‘매니저’나 ‘프로’의 경우 사원/대리 등 경력이 상대적으로 짧은 직원들도 본인이 맡은 업무를 책임감있게 진행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취지에서 정해진 것으로 알고 있으나, 그 기업들과 일을 하는 다른 회사의 입장에서는 어색한 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반면 ‘님’이 가장 좋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1) 상대방에 대한 존중을 담고있어 저년차 직원이나 인턴들도 존중받는 문화를 만들어주고 2) 한글/영어 이름 모두에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구글코리아에서는 상대방을 부를 때 가급적 성을 생략하고 ‘XX님’이라고 이름만 부르는데, 성+직급만 부르는 일반적인 기업, 또는 ‘김XX님’이라고 부르는 일부 기업보다는 훨씬 서로를 친근하고 편안하게 부를 수 있는 것 같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윗 사람이 아랫 사람을 부를 때 ‘님’을 생략하거나 반말을 쓰면 안 된다. 윗 사람 입장에선 친근하게 하고자 그런 것일 수도 있으나, 상호 존댓말이 아닌 반말/존댓말이 섞인 관계가 될 경우에는 언어때문에 위계질서가 생기고 그로 인해 열린 커뮤니케이션이 어려워진다.
하지만 직급/호칭을 바꾸었다고 해서 위에 언급한 기업들이 모두 열린 문화를 갖게 되고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샘솟게 되었는가? 물론 도움은 되었을 것이지만, 나는 호칭/직급 파괴는 시작일뿐이며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선 더 많은 노력이 지속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2. 열린 문화 — 어떻게 유지/강화할 수 있을까?
1) 보고/지시 문화 -> empowerment (권한 위임)
직급을 없애는 건 단순히 서로 커뮤니케이션을 편하게 하라는게 아니라, 직급에 상관없이 실무담당자가 책임감과 오너십을 갖고 알아서 일을 진행하라는 취지에서 시작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너와 임원들이 대부분의 중요한 의사결정을 하고 실무자들은 그들의 의사결정을 받기 위한 ‘보고서 작성’과 지시 사항 이행에 대부분의 시간을 쏟는 현재의 기업 문화가 바뀌지 않으면, 실무자들은 절대로 오너십을 가질 수 없다. 오너십이 없으면, 아무리 직급과 호칭을 파괴해도 실무자들의 업무 자체는 전혀 변하지 않는다. 그냥 시키는 일을 부속품처럼 할 뿐이다.
따라서 경영진/임원들의 역할은 ‘실무자들의 보고를 받고 의사 결정을 내리는’ 사람이 아니라 ‘훌륭한 인재들을 뽑아서 오너십을 주며 알아서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고, 기업의 장기 전략 수립에 집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얼마전 세월호가 침몰하여 구조와 수색이 다급한 시점에도 ‘청와대 직원들의 관심은 온통 대통령 보고에만 쏠려 있었다’는 JTBC의 보도를 보면서 분노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상당수 우리나라 직장인들의 모습도 그 청와대 직원들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본인에게 의사 결정 권한이 없고 따라서 오너십도 없기 때문에 현장에서 어떤 문제가 있던간에 윗 사람에게 보고하는데만 매달리는, 너무나 낯익은 모습이었다.
2) 회사 내 계층을 줄이기
사장 -> 부사장 -> 부문장 -> 본부장 -> 팀장 -> 파트장 -> 과장… 한국 기업엔 ‘장’이 너무 많다. 그리고 이러한 피라미드 조직의 문제는 저 많은 단계별로 보고를 하는 과정에서 너무나 많은 시간과 자원이 낭비된다는 점과, 과장 밑에 있는 대리/사원들은 본인이 자율적으로 할 수 있는게 거의 없다는 점이다. 의사 결정권도 없는 과장이 윗선에 보고하기 위한 자료를 서포트할 뿐이다.
구글의 예가 모든 기업에 적용될 순 없으나 참고로 말씀드리면, 구글에선 CEO에서 평 사원에게까지 이르는 단계를 최소화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직원이 4만명이 넘는 큰 회사이지만, 나같은 실무자와 창립자 래리 페이지 사이에 단 4명의 관리자/임원만이 존재한다.
그리고 한 팀 내의 팀원들은 (연차의 차이는 있지만) 각자 평등한 관계로 자신에게 주어진 업무를 오너십을 갖고 알아서 진행한다. 그러다보면 ‘장’이라는 직급이 아닌 실력으로 다른 팀원들을 이끌어 갈 수 있도록 서로 노력하게 되고, 자연스럽게 리더십을 발휘하는 팀원이 눈에 띄게 된다. (이런 걸 leadership without authority라고 한다)
3) 열린 문화를 유지하기 위한 제도를 만들기
아무리 직급/호칭을 없애고 오너십을 주더라도 모든 사람이 완벽할 순 없기에, 그리고 영업 실적 등으로 압박을 받는 상황 등에 처했을 때에는 아무리 훌륭한 경영진도 사람인 이상 보고/지시하는 문화로 돌아가기 쉽다. 따라서 이를 견제하기 위한 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역시 구글의 2가지 제도를 소개하고 싶다.
먼저 Googlegeist라는, 직원들이 1년에 한 번 자신의 현재 업무에 대한 만족도 및 팀장/임원/경영진을 직접 평가할 수 있는 제도다. 평가 항목은 실적이 아니라 팀장/임원들의 리더십, 열린 커뮤니케이션 준수 여부, 일과 삶의 균형 여부, 업무 만족도 등이다.
철저히 익명이 보장되며, 모든 팀장/임원/경영진들은 자신이 받은 설문 조사 결과를 공개해야한다(참고). 이런 제도를 통해서 구글은 대기업이 되었음에도 스타트업의 마인드와 문화를 계속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두번째는 구글 뿐 아니라 많은 실리콘 밸리 기업들에서 이루어지고있는 TGIF라는, 매주 최고 경영자가 전 직원들에게 기업의 주요 현안과 성과를 직접 공유하는 자리이다.
TGIF에서는 인턴이라도 최고 경영자에게 직접 질문을 할 수 있으며, 페이스북의 TGIF에서 인턴이 마크 저커버그에게 잘못된 내용을 지적했고 마크가 바로 반영했다는 에피소드도 있다.
최고 경영자의 의사 결정에 따라 전 직원이 일사분란하게, 전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한국의 기업 문화는 제조업 중심으로 초고속 경제성장을 하는데 큰 기여를 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 나라는 더 이상 제조업만으로 먹고 살 수 없고, 또한 우리 나라의 젊은이들은 더 이상 그런 기업 문화에서 부속품처럼 일하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원문 : 진민규의 마케팅/Teach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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