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편에서는 나폴레옹이 자코뱅과 왕당파 사이에서 암살 음모에 시달리면서도 정적인 모로를 제거하고 국내 정치 권력 기반을 휘어 잡는 모습을 보셨습니다. 이때부터 그 다음의 주요 전투인 아우스테를리츠 또는 트라팔가 해전 사이에도 주요 이벤트는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나폴레옹 법전의 제정, 영국과의 아미엥 평화조약 체결, 아이티 노예 반란 진압, 그리고 황제 즉위 등등 많지요.
이번주에는 그런 것들 외에, 별로 티는 많이 나지 않지만 그래도 몹시 중요한 사건 하나를 짚고 넘어가고자 합니다. 나폴레옹과 그를 중심으로 돌아간 이 전쟁사가 유럽의 근대를 닦았다고 하는데, 나폴레옹이 직간접으로 관여한 그런 중요한 주춧돌 사건 중의 하나가 바로 이번에 다루고자 하는 내용인 프랑스 은행, 즉 Banque de France의 설립입니다.
즉, 이번 호는 군사적인 이야기가 거의 없습니다. 다소 지루하게 생각될지는 모르지만, 현대처럼 군사력보다 금권력이 더 중요한 시대에는 이것이 더 흥미진진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치헤드 해전
나폴레옹이 설립한 Banque de France 이야기는 꽤 먼 과거, 즉 1690년 7월 10일, 영불 해협의 어느 해전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뜬금없다고요 ? 속는 셈 치고 읽어보시면 납득이 가실 겁니다.
1690년 당시, 영국은 (뭐 항상 그렇지만) 또 프랑스와 전쟁 상태에 있었습니다. 이때는 9년 전쟁이라고 1688~1697년 사이에 프랑스의 태양왕 루이 14세와 영국-네덜란드의 윌리엄 3세 (오렌지공 윌리엄), 그리고 영국 편에 붙은 신성 로마 제국, 스페인 등 온갖 나라들 사이의 전쟁이었습니다.
이 당시는 프랑스 루이 14세의 위세가 하늘을 찌르던 시절이었고, 아직 영국의 로열 네이비는 확고한 제해권을 확립하지 못한 시대였습니다. 그 결과로 나온 것이 바로 1690년 7월 10일의 비치 헤드 (Beachy Head) 해전이었습니다. 이 해전에서, 75척의 프랑스 함대는 단 한척의 전함도 잃지 않고 56척의 영국-네덜란드 연합 함대를 완파하여 11척의 적함을 침몰시키거나 빼앗았습니다. 다만 프랑스 총사령관 투르빌 백작 (Comte de Tourville)이 전과 확대에 소극적이어서 영국-네덜란드 함대는 간신히 파멸을 면하고 템즈 강으로 도주할 수 있었습니다.
이 해전으로 인해 영국은 난리가 났습니다. 섬나라가 제해권을 빼앗기다니 ! 그렇다고 육군이 튼실한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이건 재앙이었고 하루 빨리 저 강력한 루이 14세의 해군에게 도전할 수 있는 강력한 해군 건설이 시급했습니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해군 건설에서는 무지막지한 자금이 들어갔습니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 74문짜리 전열함 한척을 건조하는데 약 5만 파운드 (현재 가치로는 대략 150억원) 정도가 들어갔으니까, 17세기 말의 빈약한 경제 규모로 볼 때 이건 영국 정부로서도 상당한 부담이었습니다. 돈이 없다면, 해군도 없었습니다.
자, 그러자면 먼저 돈이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다소 철학적인 문제부터 살펴보아야 합니다만, 여기서는 간단히 이렇게 설명하고 넘어가기로 하시지요. 원래 사람들에게는 돈이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냥 식량이나 가죽, 옷감 같은 상품만 있었지요. 그러나, 가령 포도주 100 리터의 가치가 여우 가죽 3장 반에 해당한다고 해서, 멀쩡한 여우 가죽을 반으로 싹둑 자를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또 상대방은 여우 가죽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밀가루가 필요한 경우도 있을 수 있고요.
국채의 탄생
그 때 등장한 것이 금이나 은 같은 귀금속이었습니다. 이런 귀금속은 닳지도 변하지도 않고, 또 필요만큼 조금씩 잘라서 쓸 수도 있고, 필요하면 다시 녹여 하나의 큰 덩어리로 만들 수도 있었으며, 그 공급이 무척 제한적인데다 그 자체로 예뻐서 전세계 모든 사람이 다 귀하게 여겼으니까요.
그러니까 포도주를 파는 사람은 그에 해당하는 은을 조금 받아다가 그것을 다시 밀가루를 파는 사람에게 주고 밀가루를 얻을 수 있었고, 여우가죽을 파는 사람도 가죽을 먼저 은으로 바꾼 뒤 그 가치에 해당하는 만큼의 포도주를 사갈 수 있었습니다. 가장 좋은 것은 포도주나 밀가루를 사고 남는 은을 저장할 수도 있다는 것이었지요.
고대 지중해 세계가 무척 국제적인 모습을 하게 된 것도 은을 매개체로 하여 여러 민족들 간에 활발한 무역 활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아테네가 당시 에게해 최강의 함대를 건설하여 살라미스 해전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도, 전쟁 몇년 전에 아테네 인근에서 막대한 양의 은광이 발견되어 그 은을 재원으로 대해군을 건설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이 세계 최초의 프랑(franc)화입니다. 장 2세 (Jean Le Bon)가 백년전쟁 중 프와티에 전투에서 영국의 에드워드 흑태자에게 포로가 된 뒤, 그 몸값을 지불하기 위해 1360년 주조한 금화인데, 당시 단어에 franc이라는 말의 뜻이 자유를 뜻한다고 하여 franc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합니다. 장 2세는 일단 석방되어 이렇게 금화를 주조하는 등 자기 몸값 마련에 애를 썼으나, 결국 몸값에 해당하는 금을 다 모으지 못해, 다시 자발적으로 영국에 건너가 포로 상태로 죽었습니다.
좀 횡설수설하기는 했는데, 돈이란 과연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 대한 답을 한줄로 요약하면 돈은 금이나 은이다 라고 답할 수 있습니다. 최근에 개봉했던 영화 ‘미션 임파서블 4’를 보니, 유명한 국제 암살자는 그 보수로 항상 다이아몬드만을 받는다고 하던데, 실제로는 보석은 보편적인 돈이 될 수 없었습니다. 보석은 더 작은 단위로 자르거나 부서뜨리면 그 가치가 떨어지거든요. 그러니까 17세기 말 해군 건설을 위해 영국 왕실의 윌리엄 3세는 금이나 은이 있으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영국 왕실에는 당시 금이나 은이 없었습니다. 전쟁이라는 것은 돈을 무지막지하게 먹어대는 괴물이었으니, 정상적으로 세금을 다 거두어도 터무니없이 돈이 부족한 편이었거든요. 결국 남는 옵션은 돈을 빌리는 것이었습니다. 민간의 ‘장사치’들은 항상 돈을 가지고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1692년 영국 왕실에서는 흔히 하던대로 연 10%라는 짭짤한 이자를 약속하는 국채 (life annuity)를 발행했습니다. 판매 총액은 1백만 파운드였지요. 그런데 정작 팔린 액수는 고작 10만 8천 파운드였습니다. 목표액의 1/10에 불과한 액수였지요.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
뭐 사실 놀라운 일도 아니었습니다. 일단 당시 9년 전쟁이 일어난 이유 자체가 네덜란드의 오렌지공이었던 윌리엄 3세가 영국 왕위에 오르는 것이 문제가 되어서 터진 것이었으니만큼, 당시 윌리엄 3세는 국내에서도 정치적 기반이 약한 편이었고 또 전쟁에서 이겨 영국 왕위를 공고히 할지 아니면 고향 네덜란드로 쫓겨날지 알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평생 원금은 갚지 않고 이자만 연 10%씩 주겠다는 종이 쪼가리 국채 (life annuity)를 믿고 윌리엄 3세에게 돈을 내줄 사람이 많지 않았던 것입니다. 궁지에 빠진 영국 왕실은 이자를 14%까지 올려주겠다고 공표하지만, 여전히 국채는 팔리지 않았습니다. (요즘 이탈리아나 스페인 등에서 국채 발행에 실패했다 성공했다 하는 것이 이런 상황입니다. 국채 이자가 높아질 수록 그 국가는 망할 가능성이 높다고 시장이 판단하는 것이지요.)
이렇게 되자, 1694년 영국 의회는 울며 겨자먹기로 3년전인 1691년 스코틀랜드의 사업가인 패터슨(William Patterson)이 내놓았던 제안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 제안이 바로 영란은행 (Bank of England)의 설립이었습니다. (여기서 참고로, 영란은행의 ‘란’자는 네덜란드의 한자어인 화’란’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잉글랜드의 ‘랜’자를 뜻하는 것입니다. 즉, 영란은행은 네덜란드와는 무관합니다.)
영란은행은 흔히 국가 중앙 은행의 효시로 알려져 있습니다만, 사실 그보다 먼저인 1668년 스웨덴의 Riksbank가 유럽 최초의 중앙 은행으로 설립되었지요. 여기서 착각해서는 안되는 것은 영란은행이나 스웨덴 릭스방크(이렇게 읽는거 맞나요 ?)나 모두 국가 소유의 은행이 아니라 개인 주주들이 소유하는 사기업이라는 점입니다.
영란은행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기존에는 영국에 은행이 없었냐고요 ? 물론 그렇지 않았습니다. 여러가지 민간 은행이 설립되어 활발히 영업을 하고 있었지요. 문제는 윌리엄 3세의 정부를 이런 은행들이 믿지 못하여 돈을 꿔주지 않았다는 점 (즉 국채를 사지 않았다는 점)에 있었습니다.
패터슨이 제출한 제안은, 정부가 달라는 대로 얼마든지 돈을 꿔줄테니 대신 몇가지 특혜를 받는 그런 은행을 설립하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제안에 따라 1694년 설립된 영란은행이 가진 특혜는 이런 것들이었습니다.
(1) 정부의 모든 대출을 관리할 독점권
(2) 정부에게 돈을 대출해줄 독점권
(3) 다른 은행을 합작으로 설립할 권리
(4) 영란은행이 파산하더라도 그 채무는 출자금 이하가 되도록 하는 유한 책임제
(5) 국채를 담보로 하여 지폐를 발행할 권리
한마디로 영국 정부의 돈줄을 쥐고 흔들 독점권을 달라는 것이었지요. 당장 궁했던 정부는 이 요청을 승인했고, 그 패터슨과 그 일당 (런던의 금융가인 the City의 주요 멤버들)은 불과 12일만에 120만 파운드의 출자금으로 영란은행을 설립합니다. 정부에 대한 대출 조건은 연간 8% 이자에 연간 관리비용 4천 파운드. 정부로서도 나쁘지 않은 조건이었습니다. 연 14%의 이자로도 모이지 않던 돈을 불과 8%에 빌릴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영국 왕실은 이렇게 빌린 돈의 2/3를 해군 건설에 투입합니다. 단, 이런 독점권은 영구적인 것이 아니라 12년에 한번씩 갱신하는 (charter renewal) 것으로 정해졌습니다.
(아무리 영국이 망했다고 해도 영란은행의 위엄은 아직 살아있습니다.)
자, 이렇게 보면 영란은행 설립자들은 연 6%의 이자를 손해보는 것처럼 보입니다. 원래 14% 받고 빌려줄 돈을 불과 8%에 빌려주는 셈이니까요. 120만 파운드가 원금이니까 매년 7만 2천 파운드의 기회 비용을 날리는 셈이지요. 그런데 왜 패터슨과 그 일당은 이런 조건으로 은행을 설립하려고 했을까요 ? 저 위에 나열된 5가지 조건 중 다른 조건들도 무척 짭짤했지만 마지막 조건, 즉 지폐를 발행할 권리가 무엇보다도 짭짤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서 또 잠깐, 지폐(bank note)라고요 ? 아까 ‘돈은 금이나 은’이라고 하더니 이제 와서 무슨 종이돈 이야기가 나오나요 ? 사실 종이돈, 그러니까 지폐는 꽤 오래전부터 사용되었습니다. 원래 은행과 지폐의 기원은 이런 것이었다고 해요. 금화나 은화를 들고 다니자면 무겁기도 하고, 또 도난의 위험도 컸습니다.
그래서 그 대신 튼튼한 금고를 가진 믿을 만한 귀금속 상인에게 금화를 맡겨두고 그 영수증을 받아두었다가, 금화로 지불해야 할 일이 있을 때 금화대신 그 영수증을 건네주는 일이 조금씩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그 귀금속 상인에게 그 상인이 발행한 영수증을 들고가면 거기에 쓰인 금액만큼의 금화를 받을 수 있다는 신용이 있어야 했지요.
사람들 생각이나 판단은 다 비슷한지라, 평판이 좋은 일부 귀금속 상인에게 그런 서비스를 받는 사람들이 집중되었고, 그런 일부 귀금속 상인들이 발행하는 금화 예치 영수증은 거의 해당 금화와 같은 가치로 사용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지폐와 은행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지폐를 금태환 지폐라고 합니다. 즉, 지폐를 은행에 들고 가면 그 액수에 해당하는 금을 받을 수 있어야 했던 것이지요.
위의 것은 1913년에 재무성에서 발행된 50달러짜리 달러 지폐입니다. 이건 지폐에 GOLD라고 적혀 있고 은행에가져가면 바로 50달러에 해당하는금, 즉 당시 2.41896 트로이 온스의 금으로 바꿔 받을 수 있는 금태환 지폐입니다. 반면에 아래 것은 연방 준비 위원회 (Federal Reserve)에서 1914년 발행한 50달러 지폐인데, 이건 금으로 바꿔준다는 말이 전혀 없는, 불태환 지폐입니다. 이런 불태환 지폐를 영어로는 fiat money라고 하지요.
귀금속에서 지폐로
그러면 그 귀금속 상인, 그러니까 은행은 왜 그런 금고 대여라는 귀찮은 서비스를 제공했을까요 ? 이는 귀금속 상인들이 오묘한 진리에 눈을 뜨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즉, 사람들이 금을 1,000 파운드어치 맡겨놓았다면 원래 그 예치 영수증도 1,000 파운드 어치만 발행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몇년 그런 일을 하다보니, 실제로 그 예치 영수증을 들고 은행에 찾아와서 해당 금화를 요구하는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더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은행 금고에 든 금화는 1,000 파운드어치 밖에 없더라도, 1,200 파운드 어치의 예치 영수증, 즉 지폐를 발행해도 아무 탈이 없더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지요. 이렇게 되니까, 은행가 입장에서는 허공에서 뚝 200 파운드라는 돈이 생긴 것이나 다름없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시작된 지폐는 그 근본부터가 일종의 사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돈을 있는 것처럼 속이는 것이니까요. 경제적으로는 이것을 두고 신용의 창출이네 뭐네 하지요. 이렇게 존재하지 않는 금에 기반을 둔 지폐는 경제 공황시에 문제가 되었습니다. 가령 전쟁이 난다든지 해서 사람들이 한꺼번에 우르르 몰려와 금화로 바꿔달라고 하면 그 날로 그 은행은 파산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문제가 반복되었기 때문에 지폐에 대한 신뢰도는 그리 높은 편이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당시 지폐는 국가나 중앙 은행에서 발행하는 것이 아니라, 이 은행 저 은행이 제 마음대로 발행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종류도 여러가지였고, 발행처가 어느 은행이냐에 따라 아예 돈으로 받아주지 않는 지폐도 있었습니다. 법적으로 통용이 강제되는 돈을 법정 화폐 (legal tender)라고 하는데 당시에는 그런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지폐의 해악에도 불구하고
이런 지폐가 일으킨 온갖 해악 중에서 가장 악명높았던 사건은 바로 프랑스에서 터졌습니다. 원래 루이 14세의 전쟁은 영국에만 돈 문제를 안겨준 것은 아니었습니다. 프랑스도 금화나 은화 같은 경화 (specie)가 부족해 난리였지요. 그러자 여기에 홀연히 나타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존 로 (John Law)라는 스코틀랜드인이었습니다.
순수하게 암산만으로 카드 놀이에서의 확률을 계산하여 연전 연승할 정도의 천재였던 존 로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1701 – 1714)으로 파탄난 재정을 물려받은 루이 15세의 재무 담당관 (Controller General of Finances)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는 전부터 독점권을 가진 중앙 은행 제도를 도입하여 국가 채무를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1716년 방크 제네랄 프리베 (Banque Générale Privée)라는 은행을 설립하고 여기서 지폐를 찍어냈습니다. 그 지폐의 담보는 (당장 금이나 은이 없었으므로) 북아메리카의 프랑스 식민지인 루이지애나와의 무역을 독점하는 회사인 미시시피 회사 (Compagnie d’Occident 또는 The Mississippi Company)를 설립하고 그 주식을 담보로 했습니다.
문제는 그렇게 담보로 삼았던 미시시피 회사의 수익이 별로 크지 않았음에도 거품이 끼어 점점 더 많은 지폐를 감당하지도 못할 정도로 찍어냈다는 것이었지요. 결국 거품은 꺼졌고, 이때 발행된 지폐는 모두 휴지가 되었으며, 존 로는 여장을 하고 프랑스를 빠져나가 베니스로 도주해야 했습니다. 지폐에는 이런 흑역사가 있었으므로 사람들은 지폐에 대한 신뢰가 높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영란은행은 국왕의 법령에 의해 세워진 은행이고, 또 거기서 발행하는 지폐는 국채라는 든든한 담보가 있었으므로 그나마 신뢰도가 더 높은 편이었습니다. 영란은행의 설립자들은 그 점을 십분 활용했습니다. 즉, 정부에게 출자금 120만 파운드를 꿔주고 받은 채권을 근거로, 또 다른 120만 파운드 상당의 지폐를 찍어내어 시중 민간인에게 빌려준 것입니다.
물론 이자를 받고요. 그렇게 되면 실제 출자금은 120만 파운드 밖에 없는데, 그것을 정부와 민간에게 각각 이중으로 꿔줄 수 있게 되므로, 민간에 대한 이자율을 8%로 한다고 해도 8% X 2 = 총 16%라는 고수익을 올릴 수 있었던 것이지요. 이것이야말로 땅짚고 헤엄치는 식의 장사였습니다.
영국 정부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 정부는 계속 영란은행의 독점권을 계속 새로 갱신해주었습니다. 당시는 끊임없는 전쟁의 시기였고, 전쟁에는 세금만으로는 감당되지 않는 많은 돈이 들어갔는데, 그런 돈을 지속적이고 안정적으로 꾸기 위해서는 영란은행이 꼭 필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실제로 맨 처음 설립된 중앙은행인 스웨덴의 Riksbank도 러시아와의 전쟁에 들어가는 군자금을 빌리기 위해 만들어진 은행이었고, 나폴레옹 전쟁 기간 전후에 세워진 여러 유럽 국가들의 중앙은행들도 모두 전쟁 자금을 충당하거나 그로 인해 생긴 빚을 처리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들이었습니다.
미국 최초의 중앙은행인 First Bank of the United States도 독립전쟁으로 인한 빚을 처리하기 위해 한시적으로 만들어졌던 것이지요. 이렇게 중앙은행이라는 것의 기원은, 정부가 민간으로부터 전쟁 자금을 안정적으로 빌리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엉뚱하게 튄 불꽃
영란은행이 이렇게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다른 유럽 국가들은 이런 중앙은행 설립에 소극적이었습니다. 일부 자본가들에게만 돌아가는 이익이 너무 컸거든요. 당장 급하지 않으면 이런 민간 소유의 중앙은행을 둘 이유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1789년 프랑스의 루이 16세는 당장의 한푼이 급한 상황으로까지 몰리게 되었습니다.
주제넘게 미국 독립전쟁에 끼어든 대가였지요. 이때 재무장관이던 네케르 (Jacques Necker)는 더 이상 국채를 찍어내지 말고 세금을 늘리자는 방향으로 국가 재정 방침을 정합니다. 그래서 세금을 늘이기 위해 소집했던 삼부회 (Estates-General)를 소집했고, 그 결과 프랑스 대혁명이 발발했던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뒷일은 생각하지 않고 무분별하게 돈을 빌리느니, 세금을 더 거두는 것이 좀더 건전한 재정을 꾸려나가는 방침 같습니다만, 상황이 엉뚱하게 튀었던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총재 정부 – 그들의 이야기 편에서 자세히 다루었으니 여기서는 여기까지만 쓰지요.
아무튼 나폴레옹이 브뤼메르 쿠데타를 통해 제1통령이 되었을 때, 그가 처리해야 할 가장 시급한 일은 당시 한창 진행 중이던 제2차 대불동맹전쟁이 아니라 오히려 국내 경제 파탄 문제였습니다. (혁명의 종말 – 브뤼메르 쿠데타 참조) 나폴레옹은 궁극적으로는 외국에 대한 침공과 약탈로 이 문제를 해결했지만 그건 나중의 문제였고, 당장은 어디선가 돈을 꿔야 했습니다.
외국을 침공하기 위해 군대를 조직하려고 해도 당장 돈이 필요했으니까요. 결국 나폴레옹도 쿠데타를 일으킨지 불과 2개월만인 1800년 1월 18일 영란은행을 본떠 중앙은행인 Banque de France를 설립하게 됩니다.
프랑스 은행의 탄생
나폴레옹은 사실 경제 문제에 있어서 참고할 만한 사례가 매우 풍부했습니다. 영란은행이 가장 좋은 성공 사례였고, 반면 교사로 삼을 만한 사례도 많았습니다. 존 로의 방크 제네랄도 있었고 지극히 최근의 아시냐 지폐 건도 있었지요. 프랑스 중앙은행이 성공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시냐로 인해 바닥에 떨어진 지폐에 대한 프랑스 국민들의 신뢰성 회복이었습니다.
아무래도 결국 지폐를 찍어내는 것 외에는 당장 돈을 만들 방법이 없었거든요. 나폴레옹이 생각하기에 그 신뢰성 회복을 위해서는 지폐 발행 주체가 정부로부터 독립적인 기관이어야 했습니다. 결국 프랑스 중앙은행도 정부가 아닌 민간 소유로 이루어졌고, 자본금, 즉 정부가 빌릴 돈은 3천만 프랑 (약 3천7백2십억원)으로 정해졌습니다.
나폴레옹도 이 은행의 주요 출자자 중 한명이었고, 나폴레옹은 자기 가족 및 부하들도 여기에 출자하도록 독려했습니다. 나폴레옹은 대체 어디서 그런 큰 돈이 생겼을까요 ? 그에 대해서는 확실한 기록이 별로 없네요. 확실한 것은 이 은행이 약 1달 뒤인 2월 20일에 영업을 시작했을 때, 아직 그 출자금 전액이 다 입금된 것도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은행은 지폐를 찍어내기 시작했지요. 아마 출자금을 납입하지 않은 멤버 중에 나폴레옹 본인이 포함되었지 않을까 싶습니다. 결국 나폴레옹은 그 와중에서도 정말 허공에서 돈을 버는 재주를 피운 것입니다.
이 프랑스 중앙은행은 처음부터 전국적인 독점권을 가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 은행이 지폐를 찍어낼 권리를 독점하게 된 것은 3년 뒤인 1803년 4월 14일이었습니다. 또한 그 권리는 오직 파리 시내에서만 통용되는 것이었고 또 15년 한정이었지요. 게다가 이 지폐는 1848년까지는 법정 화폐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나폴레옹의 권위 덕택에 프랑스 중앙은행은 꽤 빨리 자리를 잡을 수 있었고, 계속 독점권을 연장받았지요. 나중에 나폴레옹이 퇴위하고 부르봉 왕가가 돌아온 이후에도 프랑스 중앙은행은 살아남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후 거듭된 혁명 속에서도 살아남았고, 1848년부터는 전국적으로 그 영향력을 인정받았습니다. 그렇게 수많은 정변을 겪으면서도 살아남았다는 것이 프랑스 중양은행의 기초를 놓은 나폴레옹의 우수성을 간접적으로 증명하는 일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나폴레옹의 말을 떠올리며
이번에 전세계적인 금융 위기를 겪으면서 우리나라 사람들도 세계 금융에 대해 이것저것 많이 알게 되었지요. 저도 리먼 사태 이후에야 미국의 중앙은행이라고 할 수 있는 FRB (연방 지급준비 위원회)가 공공기관이 아니라 사유 회사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어떻게 일국의 중앙은행이 국유가 아닌 사유 회사일 수가 있는지 처음에는 전혀 이해를 할 수 없었습니다.
중앙은행에 얽힌 이런 역사를 살펴보면서 어느 정도 이해가 되기는 했습니다. 나폴레옹이 세웠던 프랑스 중앙은행도 국유화된 것은 무려 1946년도가 되어서였습니다. 그나마 1993년에는 유로화로의 전환을 준비하기 위해 다시 민영화되었지요. 이런저런 사정을 보면, 나폴레옹이 금융계에 대해 했던 다음 말은 여전히 유효한 것 같습니다.
“자본에게는 조국이 없고, 은행가들에게는 애국심도, 고결함도 없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오직 이익 뿐이다.”
1814년 패배한 뒤 퐁텐블로에 돌아온 나폴레옹의 모습입니다. 이 초상은 당연히 훗날 그린 상상화지요. 이때 나폴레옹은 과연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에게 패한 것일까요 영국의 돈에 패배한 것일까요 ? 나폴레옹 자신은 후자에게 패배했다고 여겼다고 합니다.
원문 : Nasica의 뜻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