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 tragedy
때는 이른바 유신시대, 박근혜 대통령의 어바마마께서 통치하고 계시던 기간에 벌어진 일이다. 1973년 10월 2일, 서울대 문리대에 이어 4일에는 법대생들이 유신 반대 데모에 나섰다. 여느 때처럼 당연히 경찰은 ‘강경 진압’을 했다. 피투성이가 된 제자들의 모습에 화가 난 최종길 서울대 법대 교수는 “부당한 공권력의 최고 수장인 박정희 대통령에게 서울대 총장을 보내 항의하고, 사과를 받아야 한다.”는 요지의 발언을 했다. 최교수는 남산에 올라가서, 내려오지 않았다.
가족들은 빈소를 자택에 마련하지도 못했다. 중앙정보부는 가족들에게 최교수의 죽음이 대외적으로 알려질 경우 장례조차 치르지 못할 것이라 협박했다. 유신 1년 뒤에 벌어진, 이른바 ‘의문사 1호’라고 불려지는 사건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납치사건이 있던 해에 벌어진 일이다.
최종길 교수가 묻히고 4일 뒤인 1973년 10월 25일, 중앙정보부는 유럽거점간첩단 사건을 대대적으로 발표했다.(발표자는 중앙정보부 차장 김치열이었는데 발표 한 달 반 정도 뒤에 영광되게도, 검찰총장이 되고 법무장관이 되었다고 한다)최종길 교수가 독일 유학 중 평양에 가 노동당에 입당한 간첩이었으며, 취조 중 간첩임을 자백한 뒤 조직을 보호할 목적으로 중앙정보부 청사 7층 화장실에서 투신자살했다는 것이 그 발표 내용이었다.
희극Comedy
2014년 9월의 일이다. 광주 비엔날레에 전시될 예정이었던 한 작품이 광주시 고위 공무원들에 의해 수정압박을 받았다. 홍성담 작가의 말을 따르자면 “김기춘 비서실장과 이건희 회장을 빼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상징물인 계급장과 선글라스를 떼라.”라는 직접적인 요구를 했다고 한다. 홍성담 작가는 박근혜 대통령을 닭으로 바꿈으로써 대답했다. 그냥 닭도 아니라 우는 닭이었다. 이후 홍성담 작가는 전시 철회 의사를 밝혔다. 작품은 광주를 떠나, 대한민국도 떠나, 대만으로 가서 전시되었다.
조금만 더 거슬러 올라가보자. 2011년의 일이다. G20 포스터에 쥐그림을 그려넣은 박정수 씨가 재판에 회부되었다. 결과적으론 200만원의 벌금형이 구형되었으나 검찰은 결심공판에서 징역 10개월을 구형했다. “청사초롱을 마치 쥐가 들고 있는 것처럼 그림을 그려넣었습니다. 피고는 우리 국민들과 아이들로부터 청사초롱과 번영에 대한 꿈을 강탈한 것입니다.” 위는 당시 담당검사의 말이다.(내겐 그런 꿈을 꾸었던 기억이 없다) 담당검사의 문학적 재능이 돋보인다.(사시생은 달라도 뭔가 다르다)
다시 9월의 일이다. 9월 16일 국무회의 당시 박근혜 대통령은 “대통령에 대한 모독이 도를 넘었다. 사이버상의 국론을 분열시키고(이 세상에 분열되지 않은 국론이 존재 가능한 것인지 의문스럽지만) 아니면 말고 식의 폭로성 발언이 도를 넘어서고 있어 사회의 분열을 가져오고 있다.”라는 요지의 말을 한다. 이후 정부는 정말로 도를 넘었다. 카카오톡 검열 사태가 일어났다.
표현의 자유는 위협받고 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오래 전부터 위협받고 있었으며, 위협받고 있으며, 앞으로도 위협받을 전망으로 보인다. 표현의 자유 반대편에는 공공의 안녕, 이른바 공안이라는 개념이 있다.
박근혜의 사라진 7시간에 대한 의문을 던진 산케이 신문 가토 지국장은 대통령 명예훼손죄로 고소당했다. 여기서 공공의 안녕이라는 개념은 기이한 모습으로 뒤틀린다. 한 국가의 최고통치권자가 7시간 동안 없어졌을지도 모른다는 의문은 심각한 공안의 위기로서 해석돼야 마땅하다. 그러나 대통령은 스스로의 명예가 공안을 위해, 나라의 품격을 위해 더 중요하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아니면 인간 박근혜의 대통령이기 이전에 차라리 한 사람이고 싶다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휴머니즘적인 의사표명이었을지도.(박근혜의 인권을 보장하라.)
희비극Tragicomedy
앞서 언급한 사건들은 한국 근현대사의 얼룩들이다. 둘 다 얼룩이라는 점에선 같으나 색감은 좀 다르다. 말 한마디 잘못했다고 사라질 수 있는 세계는 바깥에서 관찰될 때 우스움을 유발하지만 안에서 체험하는 자에겐 공포를 유발한다. 시대는 희극이었지만 통치권력은 비극적 인물이었다. 공포는 죽음에 대한 각오없이는 아무 말도 못하게 만들었다. 침묵은 일반적인 일이 되었고, 이 침묵의 부당함에 대한 발언은 특별한 사건이 됐다.
덕분에 당시의 저항예술은 숭고함을 가질 수 있었다. 죽음을 무릅쓰고 자신이 옳다고 믿는 일들을 행하는 자들이 가질 수 있는 아름다움이었다. 당대의 상황은 무거웠고, 예술 또한 같이 무거웠다.
반면 요즘엔 그 성격이 다르다. 물론 걱정은 좀 되지만 죽음에 대한 공포없이 우리는 누구나 자유롭게 말할 수 있다. 문제는 말들의 과잉이다. 말들은 인터넷이라는 공간에서 서로를 참조해가며 왜곡되고, 반복된다. 정보의 숱한 반복들은 사건이 사건이 되지 못하도록 만든다. 무거운 사건들은 자신들의 무게를 잃는다. 정작 주목받아야 할 사건들이 주목받지 못하게 되는 일들이 벌어지는 것이다.
표현의 자유에 대한 대중들의 위기의식은 예전만큼 고조되지 못한다. 사회에 대한 양심적인 예술적 행위들은 주목받지 못한다. 혹은 주목받아도 일시적인 주목을 받고 금새 다른 문제 아래 묻혀버리고 만다. 중요한 말들과 중요하지 못한 말들이 다 함께 평범해지는 것이다.
지금의 통치권력은 희극적 상황에 아주 잘 어울리는 희극적 인물이다. 과잉근대화된 추종세력을 뒤에 두르고 목을 빳빳하게 세우나 결과는 우습다. 쥐나 닭에 반응하는 권력의 과민반응은 무지함을 가장한 어린아이의 전략처럼 보인다. 땅을 파서 강과 강을 잇고, 메신저를 검열하는 시대착오적인 일들이 실제로 발생해도 사람들은 진지하게 대응할 수 없다. 어린아이의 장난에 진지하게 응하는 성인은 없으니까. 우스운 일들이 주목받지 못함으로써 일어나고 있다. 숭고함의 무기마저 잃은 예술은 무기력해지기 쉽다. 어떤 시도도 소용 없을거라는 생각이 일어나니까. 이런 상황에서 어린아이의 진지함으로 무장한 통치권력은 비웃음을 사면서도 자신들이 하고 싶은 일들을 해나간다.
예술은 언제나 잠수함 속의 토끼들이었다. 누구보다 예민하게 깨어있으면서 그 시대의 위기를 감지해내고 감지해낸 바를 드러냈다. 일제강점기 치하에서 예술가들은 독립에 대해 노래했다. 독재권력의 그늘 밑에서 예술가들은 저항을 노래했다. 시대가 억압하거나 무기력하게 만들어도 예술은 언제나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는’ 양심으로 남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얼마 전 박근혜 대통령의 희화화된 초상을 서울 시내에서 배포하다 체포된 팝아트 작가에 대한 기사를 읽었다. 시대 자체가 코메디일 때 코메디는 사실주의가 된다. 쥐 그림도, 닭 그림도 이 시대 스스로의 초상인 셈이다.
연극 광고 <실수로 죽은 남자>
그래서 준비했다.(짜잔)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에 대해 생각했고 이것이 그 결과물이다. 본격 정치권력 풍자 연극!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지하 실험무대
2014년 10월 30일(목) 16:00, 20:00
10월 31일(금) 16:00, 20:00
11월 1일(토) 15:00, 19:00
*본 공연은 전석 무료이며, 현장티켓은 공연 1시간 전부터 선착순 1인 1매 배부합니다.공연 문의 : 기획 변재원 010-2682-6768
본 글은 광고글이긴 한데, 돈을 받지도 않았고, 정작 공연도 무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