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선의원이 원내대표직을 사퇴했습니다. 얼마 전 비상대책위원장 직을 물러 난 데 이어 원내대표직까지 그만두었으니, 영광 아니 자신의 말대로 짐을 다 내려놓은 셈입니다.
물론 그렇더라도 국회의원 자리는 지키고 있으니, 그녀의 정치활동은 계속될 것입니다. 다만 야당지도자로서의 모양새는 구겨버리고 말았지요.
박영선은 MBC기자 시절부터 눈에 띄었고, 여장부같은 당찬 자세와 똑똑한 발음은 정치가로서 커나갈 자질을 일부 보여주었습니다. 또 의원이 되자 삼성 관련법 문제에서 적당히 삼성의 비위를 맞추고 타협한다든가 하지 않았습니다. 감히(?) 삼성과 맞장을 뜬 셈입니다. 하지만 그녀가 과연 어디까지 커나갈 수 있을지는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의 세월호 사태 이전에도 이미 지난 몇 년 사이에 그녀의 한계를 목격하게 된 일이 몇 번 있었습니다. 오늘은 그걸 소개하고 한국의 정치인이 성공하는 데 필요한 자질, 그리고 야당에게 필요한 개혁을 한번 짚어볼까 합니다.
민주당, 계파간 의전과 얼굴 비추기의 생활화
여러 해 전 민주당 주최의 재벌관련 토론회에 참가한 일이 있었습니다. 당시 유종일박사 등이 발표를 하고 저는 토론자 중의 한 명이었습니다. 그런데 눈에 거슬린 일이 토론회 시작 전에 일어났습니다.
당시 주최 측은 민주당 의원 중에서도 정동영과 가까운 인물들이 중심이었습니다. 그 인물들을 토론회 시작 전에 박영선이 일일이 소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냥 소개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의원들이 거의 모두 다 마이크를 잡고 한 마디씩 하도록 했습니다. 아마도 10여분은 그걸로 흘러가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당시 청중은 몇 명 되지도 않았고 기자도 없었으니, 의원들 발언에 주목할 사람은 없었습니다. 또 실제로 의미 있는 발언 내용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굳이 마이크를 잡고 자신의 존재를 확인한 것이지요.
반면에 10명 가까운 의원들은 의원들 소개가 끝나자마자 대부분이 자리를 떴습니다. 사실상 주최자인 정동영을 비롯해 겨우 한둘 정도가 자리를 지키지 않았던가 싶습니다. 그렇다면 그 의원들은 그 자리에 무엇 하러 왔을까요.
재벌문제와 관련해 한 수 배울 것도 아니고, 많은 청중들 앞에서 자기의 소신을 피력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정동영에게 눈도장을 찍기 위해 온 셈입니다. 그리고 그런 자리에서 의원들에게 일일이 마이크를 잡도록 한 게 박영선이었습니다. 정작 박영선 자신도 소개 행사가 끝나자 금방 자리를 떴습니다.
제가 국회의원 주최 토론회에 많이 참석한 편은 아닙니다. 그러나 어쩌다 참석했던 야당행사에서는 대부분 의원들이 얼굴만 내비치고는 곧장 자리를 뜹니다. 도대체 무슨 일을 한다고 그리 바쁜 것일까요. 그리고 정말로 바쁜 다른 일이 있다면 얼굴만 잠깐 내비칠 행사엔 아예 들르지 않는 게 더 낫지 않을까요. 결혼식에 부조금 내러 오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반대로 한나라당(새누리당) 행사는 달랐습니다. 2000년대 초 대우자동차 문제와 관련한 토론회에 토론자로 참석한 일이 있습니다. 그때 인천근처 지역 한나라당 의원들은 모두 참석했습니다.
사안이 민감해서 대우자동차 노동자를 비롯해 청중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당시 행사에서는 참석한 국회의원들을 이름을 부르고 청중에게 인사하게 했을 뿐 마이크를 잡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의원들은 민주당과는 정반대로 거의 모두 끝까지 자리를 지켰습니다.
2012년의 새누리당 행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새누리당 경제민주화 실천모임에서 제가 발표를 한 조찬모임이었습니다. 그 행사엔 새누리당 전현직 의원 20명 가까이가 참가했는데, 아예 의원들 소개도 하지 않았습니다. 곧바로 발제에 들어갔습니다. 이 행사에는 주요 신문사 기자들이 다 참석했는데도, 형식적인 소개 따위는 아예 생략한 것입니다.
이처럼 민주당과 새누리당의 문화가 다른 것이지요. 물론 제가 두어 개의 행사경험만 가지고 과도한 일반화를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민주당에 비해 새누리당이 훨씬 실질적이란 느낌을 받았습니다. 아니 민주당에선 계파 챙기기가 의원들 장래와 관련되어 실질적으로 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겠지요.
중간과정에는 침묵하다, 끝난 후 문제제기를 하는 박영선·민주당의 모습
어쨌든 위에서 말씀드린 민주당 국회토론회를 보면서 저는 박영선의 장래성에 의문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충격적인 일이 2012년 국회의원 공천과 관련해서 벌어졌습니다.
그녀는 국회의원 공천과 관련해서 최종결정권을 행사하는 최고위원회 멤버였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공천작업이 거의 끝나가는 시점에서 갑자기 폭탄 기자회견을 했습니다. 민주당의 공천이 엉망이어서 자기는 최고위원에서 탈퇴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민주당의 공천이 엉망진창이었던 것은 사실이고, 그 때문에 원래는 유리했던 선거에서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박영선은 그 공천작업에 결정적이지는 않더라도 일정한 책임을 공유해야 하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녀가 공천작업의 문제점을 깨닫고 그것의 시정을 요구하려 했다면 적어도 공천작업의 막바지가 아니라 초반이나 중간단계에서 탈퇴를 하든 뭐를 하든 행동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막바지까지 자기 사람을 심으려고 노력하다 그게 잘 안되니까 탈퇴함으로써 엉망진창 공천의 책임을 피해보려 했다는 비판을 면할 수 없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기자회견을 통해 민주당 공천의 문제점을 바로잡지는 못하면서 민주당 공천의 문제점을 증폭해서 대중에게 널리 알리는 역할을 했습니다. 이게 바로 해당(害黨) 행위입니다. 당의 문제점을 비판하는 걸 나무라는 게 아닙니다. 자신이 몸담고 있는 당에 대한 비판은 당을 바로잡기 위한 것이어야지 자기 개인이 잘난 체 하기 위한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오늘날 새민련의 여러 인사들은 당의 혁신을 위한 비판이 아니고 해당행위에 속하는 비판을 함부로 저지르고 있습니다. 당의 규율이 서 있지 않은 것입니다.
새누리당에서 당을 비판한 예컨대 소장파 인사들은 당의 노선을 바로잡으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그런 비판을 했습니다. 물론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주가를 올리려는 의도가 깔려 있지만, 무조건적인 비난을 일삼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반면에 박영선을 비롯한 새민련 일부 인사들은 당의 노선을 바로잡기 위한 것이라고는 보기 힘든 행위를 버젓이 저질러 왔습니다. 이는 김대중 시절의 강한 독재적 리더십이 사라지고 당이 민주적 리더십을 찾아가는 과도기에서 불가피한 현상이라고 긍정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계파 문제도 그런 과도기에서 발생한 셈입니다.
하지만 그 과도기를 슬기롭게 극복하지 못하고 지리멸렬한 상태가 계속되면 새민련도 어려워지고 국민도 어렵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많은 정치학자나 정치평론가들이 새민련의 문제점을 지적하지만 실현가능한 해결방안을 제시하는 경우를 잘 보지 못했습니다.
새정련, 지금이라도 경쟁 메커니즘이 필요하다
이제부터는 어떻게 계파문제를 극복하고 민주적이면서 효율적인 리더십을 발휘하게 할 수 있을지를 둘러싼 대안들이 많이 제시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새민련의 문제는 리더십만이 아니라 비전과 진정성의 취약성, 당과 대중의 괴리 문제 등등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새민련 아닌 쪽에서 답을 찾으려는 시도도 있겠지만, 그런 시도는 안철수의 사례에서 보듯이 성공하기 힘듭니다. 의원내각제의 도입 또는 비례대표의원의 대폭 증가가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에선 좀처럼 돌파하기 어려운 현실입니다. 게다가 사실 새로운 정치조직을 만들려는 사람들은 새민련 인사들보다 정치적 자질이 더 떨어지는 3류, 4류가 다수가 아닌가 싶습니다.
새민련의 리더십이 거듭나기 위한 방안의 하나로 정치엘리트들을 발굴하고 육성하는 시스템을 정립하는 문제를 저는 제기하고 싶습니다. 정치세계에서의 ‘경쟁 메커니즘’ 문제입니다.
박영선을 비롯한 야당 정치인의 상당수는 이런 경쟁 메커니즘을 제대로 거친 경우가 아닙니다. 그러니 정당인의 자세가 무엇인지도 잘 모르고, 대중과 어떻게 호흡해야 하는지도 잘 모르고, 리더십을 어떻게 세워야 하는지도 잘 모릅니다.
그저 국민에게 널리 알려졌다는 이유만으로 선발되고 높은 지위에까지 올라가서는 박영선이나 안철수의 사례에서 보듯이 위기의 순간을 돌파할 정치력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이상돈 교수나 강준만 교수를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영입하려 한 일도 유명인사가 정치력을 갖고 있는 걸로 착각하는 행태의 하나이지요.
사실 정동영도 방송 앵커로서 남이 써준 원고를 읽는 일만 주로 하다가 스스로 판단해야 하는 자리에 오르니, 내공부족을 드러냈던 셈입니다. 한국의 복잡하고 어려운 사안들에 대한 답을 스스로 고민해보는 꾸준한 훈련 없이는 정치인으로 성공할 수 없습니다.
물론 현재 대통령의 자질은 박영선보다도 훨씬 더 떨어지겠지요. 그러나 현재의 대통령에게는 막강한 지원세력(재벌, 수구보수언론, 관료)이 존재합니다. 제가 여기서 제기한 대성할 정치인의 자질이란 것은 그런 기울어진 운동장을 극복할 수 있는 야당정치인의 자질을 말하는 것입니다.
박영선이 고지에서 추락한 것은 아쉬운 부분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사건을 계기로 본인이 내공을 비약시켜 거듭나고 당도 내공을 길러갔으면 좋겠습니다. 아울러 한국정치에 관심을 가진 분들은 막연한 비난은 이제 그만하고 실현가능한 대안을 둘러싼 논쟁을 벌여갔으면 좋겠습니다..